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08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첫물고추 수확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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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8 21:07 | 최종 수정 2021.07.2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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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무장을 한 아내가 열심히 빨갛게 잘 익은 첫물고추를 수확하고 있습니다. 심하게 모기를 타서 콧등과 눈두덩은 물론 입술까지 물려 눈탱이가 반탱이가 되고 입술이 당나발이 되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 텃밭에 심은 총 250그루의 고추가 풍작이 되면 한 70, 80근을 수확해 아들딸과 동생과 처갓집과 처형제등 무려 7가구의 김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담배나방 피해로 수확량의 1/3쯤이 준 데다 탄저병이라는 치명적인 병이 올 수 있어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삼대독자의 고추보다도 더 귀해 보이는 발갛게 잘 익은 고추를 따는 재미를 위해 아내는 고추모종을 사다 심고 지지대를 세우고 묶어주며 농약을 치고 고추를 따 씻어 말리고 꼭대기를 따는 수고를 결코 마다하지 않습니다.
엔간하면 무농약 자연식품을 먹으려 하지만 고추만은 농약을 치지 않으면 절대로 제대로 된 수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고추농사를 짓는 건 시중의 고추보다 한 1/3쯤 밖에 농약을 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옛날 초가지붕 위에 널어 말리는 빨간 고추를 매우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로 꼽기도 했습니다만 직접 고추농사를 지어보면 가당치도 않은 호사입니다. 비를 싫어하는 고추의 특징상 봄장마가 지나 안 지나, 또 탄저병이 오나 안 오나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긴장으로 수확기를 맞이해도 끝난 게 아닙니다.
고추가 마를 사이에 비가 오느냐 아니냐에 따라 어렵게 수확한 고추를 잘 건조시켜 상품화를 하느냐 썩히느냐가 달려있습니다. 요즘 고추건조기가 나왔지만 우선 구입비가 비싸고 전기료가 많아 기업식 영농이 아니곤 도입하기 어렵습니다.
제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골살이가 꽃가꾸기 외에 호박잎을 뒤져 애호박찾기와 고사리 채취인데 요즘은 ‘품삯을 안 받더라도 발갛게 잘 익은 고추를 온 종일 따봤으면 한이 없겠다’는 새 취미가 생겼습니다. 고추를 따는 자체가 하나의 은근한 성적유감이란 생각도 해 보지만 너무 유치해 아내도 어차피 조선의 여인인 이상 웅녀 이후 반만년을 내려온 남아선호(男兒選好) 사상에 배인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시인, 소설가 /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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