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92 가을의 노래 - 머루, 청산별곡(靑山別曲)의 마을에서
이득수
승인
2021.10.20 23:42 | 최종 수정 2021.10.22 17:03
의견
0
장마가 끝나자 마자 울타리에 심은 산머루에 하나 둘 자줏빛 가을색조가 물들기 시작합니다.
이육사의 시에 나오는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을 떠올리거나 아기주먹만 한 거봉포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게 뭐 먹을 것이라도 있냐고 무시할지 모르지만 저 조그만 알맹이에 담긴 약간 달고 시면서 은근히 감치는 머루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서양에서 넘어온 포도는 과히 과일도 아닌 것입니다.
건강상 매일 과일을 먹어야하는 저는 봄에서 여름까지는 되도록 보리수, 앵두, 방울토마토, 불루베리, 아로니아 등 제철 과일을 먹고 장마가 지나가고 머루가 익기 시작하는 8월말부터 대추와 단감과 알밤과 대봉감을 먹으며 사이사이 무화과, 석류, 표고버섯 등을 곁들여 먹고 겨울이 되어야만 비로소 사과와 배, 밀감과 귤, 바나나, 야콘을 먹으며 한해를 납니다.
그 많은 과일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새콤달콤 감칠맛이 있는 머루지만 도시사람인 제 아내는 아예 먹을 생각을 않고 대신 이웃에 사는 제 누님이 매일 신 새벽에 울타리의 머루를 몇 송이 따가는 머루도둑이지만 한 동안 남매가 먹기에는 양도 넉넉합니다.
포도재배가 어려운 북한에선 머루주가 가장 맛있는 술이라 해서 금강산관광 때 마셔보니 역시 그 맛이 깊고 그윽했습니다. 그 때 저는 문득 고려가사에 나오는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라'는 청산별곡을 떠올리며 자신이 북한이 아닌 고려에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파라솔 밑에 앉아 머루를 한 줌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설핏 잠이 든 저는 문득 추풍령 넘어 누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정지용의 <향수(鄕愁)>에 나오는 논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다 어느새 도투락머리를 땋은 고려의 처녀 앞에 머루를 한 송이 들고 서있는 환상에 빠졌습니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형산강 옆 삼국유사의 마을을 지나 청동기의 움막집으로 들어갈 것 같아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잔디밭에 나가 탁자에 놓아둔 머루를 집어 들었습니다. 장마가 진 며칠 동안 버려둔 때문인지 고스러진 머루에선 시큼한 냄새가 났습니다.
(아아, 이래서 포도주가 노아의 방주에서 탄생했다고 했구나!)
문득 지금 먹고 있는 시큼털털한 머루가 태초의 포도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노아의 방주는 비가 온 날이 40일, 지구가 물에 잠긴 날이 150일, 물이 빠지는데 150일, 땅이 마르고 굳는데 60일이 걸렸다고 하니 1년이 넘는 긴 시간이라 포도주가 충분히 숙성되고도 남을 시간인데 겨우 사나흘이 된 머루를 먹고 말입니다.
거기다 농업학교 동창 하나가 간월산 등산길에서 다래를 한 배낭 따서 우리 집에 한 2kg 주고 갔습니다. 거기다 냉장고에는 봄에 제기 따다둔 다래덩굴도 있습니다. 가을에 머루랑 다래를 먹고 겨울에 머루즙과 다래순 반찬을 먹게 되면 저는 아마도 <머루랑 다래랑 먹고>의 청산별곡(靑山別曲)에 사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