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게 준 선물 (27) - 진짜 공부
나의 교단일기 / 부산시광역시교육연수원장
이미선
승인
2021.12.17 20:47 | 최종 수정 2021.12.1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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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시작되고
백창우
......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이 울릴 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걸
수능이라는 거사(巨事)를 치른 후의 학교는 어딘지 생기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이들의 허탈함과 그 아이들을 지켜보는 교사들의 우울함이 더해지는 데다, 교정의 나무들마저 찬란했던 옷들을 벗어버리기 때문인 듯. 고3 선배의 헛헛함이 후배들에게도 미치는지 기말고사마저 끝내고 나면 1, 2학년 아이들 역시 수업에 집중을 잘하지 못하고 맥을 놓아버린다. 고입 내신 성적 산출이 끝난 중학교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교육청, 학교는 다양하고 의미 있는 대응책을 만들어 보지만 이미 의욕을 잃은 아이들과 알찬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입시제도가 초·중등 교육 현장을 뒤흔들고 능력주의의 신화에 빠져있는 한 이런 모습은 부인하고 싶지만, 솔직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 땅의 교사로 살면서 교육전문가가 되어서도 쉽게 풀 수 없는 고민이다. 그러나 제도나 시스템을 탓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지금은 다시 올 수 없는 소중한 학창 시절이기에 내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아이들 성장을 돕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다지......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이 시기의 아이들과 즐겁고 의미 있는 수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고민과 시행착오를 계속하다 보니 찾게 된 성공 사례가 있어 나누고 싶다.
1998년 국제고 1학년 윤리 수업
시험도 교과서 진도도 끝났으니 이제야말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나는 누구인가?’ ‘아버지와 나’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화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등 주제를 넓혀가며 특강 시리즈를 준비했다. 시험이 없어도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으려면 내용이 알차고 의미도 있어야겠지만 충분히 매력적이어야 했다. 자료를 찾고 PPT를 만들고 활용할 매체도 찾다보니 나 자신이 먼저 빠져들어감을 느꼈다. 그야말로 한 시간 수업을 위해 거의 일주일씩 걸려 준비를 했다. 이런 정성은 헛되지 않아 특강을 하고 나니 수업에 대한 몰입은 물론이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일어서서 다음 시간을 기다리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특히 강만길 교수의 ‘역사를 위하여’를 중심으로 설계한 ‘역사란 무엇인가?’ 특강 후에는 아이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크게 공감해주어 내 교직 생애 잊을 수 없는 수업 시간을 선물 받았다. 지금도 그 시절 수업을 생각하면 가슴 벅차다. 큰 감동과 선물을 준 그 아이들에게 다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며칠 전 2022 개정 교육과정 주요 내용이 발표되었다. 새 교육과정에 우려되는 부분도 있지만 공감되는 부분도 많다. 그 중 ‘깊이 있는 학습’ 부분은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역사 속 이야기를 교과서대로 입시 위주로 수업하다 보면 그 중요한 역사 수업은 암기 과목으로 전락하고 몇 년씩 역사 수업을 한 후에도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갖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대동법으로 조세제도를 개혁했다.’가 아니라, 그래서 오늘 우리 현실에서 생각할 것은 무엇인지, 향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그것이 내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과 생생하게 교감하는 수업’을 해야 아이들은 몰입하게 되고 수업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한 뼘씩 성장하게 된다. 시험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할 때인걸.”
‘그렇지, 겨울은 한 해의 끝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지.’
◇ 이미선 원장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현 부산시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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