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어딘가 생기가 없고 피곤하고 지쳐 보인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못 먹어서 그런가? 교복이 아이들의 개성을 묻히게 한다는 것, 기숙사 생활이 아이들의 생기를 앗아간다는 건 교직 생활을 하면서 내 눈으로 보고 경험으로 확인한 일이다. 물론 다분히 주관적일지 모르지만. 3월 아직 교복을 입지 않았을 때 아이들은 왠지 생기발랄해 보인다. 제각기 좋아하는 디자인, 색의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 아이만의 느낌이 있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거기서 거기 같다. 모든 제복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 말처럼 개성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경찰이나 군인이 다 비슷해 보이는 것처럼.
기숙사 생활도 그런 거 같다. 1998년 부산국제고가 개교했을 때, 다섯 반으로 인가를 받았는데 세 개 반은 일반전형, 두 개 반은 특별전형이었다. 1998년 입학 당시에는 특별전형 두 반 중 한 개 반만 채워져 네 개 반으로 시작했는데, IMF의 영향으로 외국에서 갑자기 귀국하는 사례가 많아져 중간에 한 개반이 더 보충되어 다섯 개 반 완성학급이 되었다. 개교 당시 학교 건물이 완성되지 않아 임시로 부산과학고(지금의 한국영재고) 건물을 일부 빌려 쓰게 되어, 중간에 구성된 5반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통학하게 되었다. 참 신기한 것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네 개 반 아이들은 아침부터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지쳐 있는데 비해, 집에서 통학하는 5반은 뭔가 생기가 가득해 보였다. 그런데 학교 건물이 완성되어 그 아이들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부터 다들 비슷해졌다.
아무튼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로 힘들고 지친 아이들에게 난 생기를 넣어 주고 싶고 가슴에 다가오는 수업을 하고 싶어 고민을 많이 했었다. 다행히 윤리 수업은 삶 속에서 좋은 수업재료가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 수업은 교과서 위주의 강의식 일변도의 수업이 주였지만 나는 프로젝트식, 탐구과제식, 토의토론식 등 다양한 수업을 시도했다. 이런 내 수업은 진학 성과를 내야 하는 특수목적고에서 왜 저런 수업을, 그것도 하나도 안 중요한 윤리 수업에 아이들이 에너지를 쓰게 하지? 하는 눈총도 주위에서 받았지만, 내 수업 시간에 위로받고 충전하고 의미를 찾는다는 아이들 반응으로 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수업들 중, ‘가을 특강’ 한 편을 나누고 싶다. 가을을 노래한 시(詩), 노래,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과 가을을 느끼고 인생을 생각한 수업이다. 내가 선택한 가을의 시(詩)로는 김대규님의 ‘가을의 노래’였다. 시(詩)를 같이 노트에 적어보고 탤런트 김미숙님의 목소리로 녹음된 파일을 들려주었는데, 갑자기 한 여학생의 흐느낌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성숙한 아이들은 아무 일 없는 듯 그 분위기를 지켜주었고, 나도 어느 것도 묻지 않고 그냥 수업을 진행했다. 가슴에 확 꽂히는 부분이 있었겠지.......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 거라 말한다.’ 부분이었을까?
가을의 노래
김 대 규
어디론가 떠나고 싶으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중략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 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산 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死者(사자)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 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
가을에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정호승님의 ‘연인’ 책 내용을 들려주었다. ‘연인’은 물질 중심의 메마른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이다. 전남 화순 운주사 대웅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을 보다가 물고기 한 마리가 보이지 않고 빈 쇠줄만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보고 어디로 갔을까? 상상하며 이 동화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연인’은 우리들 가슴 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어느 시절보다 젊고 자유롭고 싶은 고등학교 시절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입시라는 거대한 문 앞에서 생기를 잃어가고 지쳐가고 있는 아이들. 이 이야기를 통해 잠시라도 눈을 반짝이며 따뜻함을 느꼈다는 아이들을 이야기를 들으며 짠하고 안스러웠다.
마지막으로 김민기님의 ‘가을 편지’ 노래를 들려주고, 쓰고 싶은 사람에게 ‘가을 편지’를 쓰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가을 특강’ 수업을 진행했다. 한 편의 노래, 詩, 이야기가 열 번 교과서를 읽는 것보다 와닿았던 경험이었다. 그래서 국제고 1기 아이들이 유난히 제자로 많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름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교과서 내용을 외우거나 문제를 푸는 일보다 이렇게 가슴으로 느끼고 삶을 이야기하는 수업이 더 중요한 교육이 아닐까?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현실과 생생하게 교감(交感)하는 교육을 하라.”고 당부했다. 참으로 공감되는 말이다.
아이들과 시(詩)를 쓰고 이야기하고 노래했던 1998년의 가을 수업, 그 아름답고 순수했던 기억들로 2021년 가을을 다시 물들이고 싶다.
“보고 싶구나. 얘들아, 너희들이 잘 지낸다면, 나도 잘 지낸단다.”
◇ 이미선 원장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현 부산시교육연수원장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