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게 준 선물 (21) - 영광의 자리

나의 교단일기 / 부산시교육연수원 원장

이미선 승인 2021.09.11 00:16 | 최종 수정 2021.09.13 12:45 의견 0
'영광의 자리'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 원장에 취임한 필자

2021년 9월 1일자로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 원장’이라는 ‘영광의 자리’로 이동하게 되었다. 교육연수원은 말 그대로 우리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고 가르치고 함께하는 선생님들과 교직원들이 연수를 받고 함께 공부하는 곳이다. 전문성을 기르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교실에서 바로 실행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혹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롭게 배우고 충전하고 싶어서......등의 이유로 연수원을 찾는다. 원장은 현장의 요구를 잘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장차 펼쳐질 세상을 먼저 읽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고민하고 실행해가야 하기에 참으로 중하고 귀한 자리다.

연수원과 나의 인연은 각별하다. 일단 연수원이 자리하고 있는 ‘토곡’이라는 이 지역이 내게는 고향 같은 곳이다. 우리 아버지는 고향인 남해에서 교사도 하고, 공무원도 지내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7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1960년대 초반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 부산 광안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바로 위 언니까지는 남해가 고향이고 나는 광안리로 이사 와서 태어났다. 내 어린 시절은 해 저물도록 광안리 바닷가에서 놀았던 기억이 많다. 4학년 1학기까지 남천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이사 온 곳이 ‘토곡’이다.

그 당시 ‘토곡’은 ‘흙고개’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포장도 안 된 진흙탕 길이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었다. 우리 집은 대충 지어진 무허가 건물이어서 태풍이 오면 지붕이 날아가는 일도 있었다. 어머니는 농사일만이 아니라 돼지도 기르며 억척같이 우리 7남매를 공부시키셨다. 어머니 손은 나무토막같이 거칠고 피가 흐르기도 해 만지면 눈물이 났다. 어머니의 이런 헌신에도 불구하고 아직 초등학생인 나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눈앞에 두고 외풍을 직격탄으로 맞은 언니, 오빠들은 뛰어난 재능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진로진학에 큰 타격을 받아 인생을 돌고돌아 늦게서야 꿈을 이루게 되었다.

집은 초라했지만 둘러싼 자연환경은 더없이 정겹고 아름다웠다. 집 바로 옆에 흐르는 냇가에서 빨래도 하고 가재도 잡으며 신나게 놀았다. 봄이면 온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져 꽃도 따 먹고 망개로 목걸이 해서 걸고 메뚜기, 개구리를 잡으며 해 저무는지도 모르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울도 담도 없어 들판이 바로 우리 마당이어서 정원은 넓고도 풍성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토곡에 사는 걸 부끄럽게 만들었던 기억은 아직도 아픔으로 남아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불우이웃을 돕는다면서 토곡에 사는 아이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더니, 연필 두 자루씩을 나누어 주며 아이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하셨다. 토곡에 산다는 건 가난하고 불우한 아이라는 낙인을 심어 준 것이다. 창피해서 숨고 싶었고, 어린 가슴에는 상처가 남았다. 왜 그러셨을까? 지금도 그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린 날의 그 가난했던 기억, 상처받았던 경험으로 인해, 소외되고 가난한 아이들을 진심으로 안아주고 손잡아 주는 교사로 설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아버지 하시는 일이 다시 자리를 잡아 땅도 사고 새로 집을 지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둘째 형부의 도움이 컸다. 언니네 고마움은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집의 변화만큼 그 무렵 토곡 동네 모습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 옆을 흐르던 냇가는 복개되어 도로가 생기고 산을 허물어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해 지금은 어린날의 동네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1985년부터 복개된 길을 따라 산 중턱에 연수원을 짓기 시작해 지금의 교육연수원이 1987년 개원하게 되었다. 그다음 해 우리 집은 이사를 하게 되어 나의 토곡 시절도 끝나게 되었다.

'코로나시대 부산교육가족 톡톡' 행사에서 사회를 보는 필자

연수원과의 본격적 인연은 1994년 수업 우수사례 강사로 출강하면서부터였다. 그 시절만 해도 연수원 강사는 거의 대학교수, 남성이어서 강사 협의회를 가면 여교사는 나 한 명이라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초임 교사 시절부터 유난히 수업에 고민이 많아 이런저런 수업방식을 시도해본 것이 연수원 강사로 출강하게 된 계기였다. 다행히 연수생들의 반응이 좋아서 이후로 거의 한 해도 그르지 않고 매년 연수원 강사로 출강하게 되었다. 이렇듯 나에게 교육연수원은 매우 친근하고 인연이 깊은 곳이다.

교육연수원장 자리는 승진이고 영광의 자리이지만, 오래도록 열정과 사랑을 다한 부산시교육청을 떠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교육정책연구소 못다한 과제들과 정든 이들을 떠나오는 마음도 아쉬웠고, 늦도록 불 밝히며 부산교육을 고민하시는 교육감님, 열띤 토론으로 때로는 티격태격해가면서 호흡을 맞추어온 동료들, 밤낮없이 고생하는 후배들을 뒤로하고 돌아서 나오는 날 마음이 왠지 짠~했다. 남편 말처럼 나 아니어도 잘할 사람 많고 더 잘 해낼 것임을 알지만.

이 가을, 선물처럼 받게된 ‘영광의 자리’에서 다시 마음을 다져본다.

모든 삶은 소중하기에 내가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 가까이 만나는 사람이 가장 귀한 사람임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고자 한다. 교육연수원에서 선생님들과 교직원들이 서로 배우고 성장해 나갈 수 있으면, 현장에 적용할 새로운 아이디어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때로는 사막을 지나다 만난 오아시스처럼 충전하고 편안하게 쉴 수도 있는 곳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로버드 월딩어는 ‘무엇이 행복을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에 ‘관계(Relationship)’가 인생에서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만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도록 내가 먼저 존중하고 배려하자 다짐해본다. 훗날 지금의 연수원 식구들과 우연히 만났을 때, 나와 함께했던 그 시절이 참 따뜻하고 행복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2021년의 가을을 연다.

가을은 ‘가을이라는 말’ 속에 있다지?

이미선 원장

◇ 이미선 원장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현 부산시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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