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꽃들은 더 사랑스럽네
들판에 화려한 첫 꽃들보다도
우리 가슴에 슬픈 꿈들을
더 생생하게 일깨우는 마지막 꽃들
그렇게 간혹 이별의 순간은 더 생생하네,
달콤한 만남의 순간보다도.
- 푸쉬킨 〈마지막 꽃들은 더 사랑스럽네〉 -
그렇지, 마지막 꽃들이 더 사랑스러운 법이지. 달콤한 만남은 기대와 설레임을 주지만 실망도 아픔도 슬픔도 같이 자라는 법이라, 산 넘고 강 건너오면서 버리고 줄이며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체념해서 더 이상 걷어낼 것이 없는 삶. 천상병 시인의 ‘소풍’처럼 세상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삶. 그런 삶이라면 마지막 꽃들은 더 빛나고 사랑스러울 듯.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노래 울려 퍼지고 약속 잡기 어렵게 달력이 일정으로 빽빽하던 시절이 언제였던지. 코로나 방역과 백신 접종 80%대를 맞아 위드코로나 시절로 접어들어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려나 기대했지만,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확산되고 있어 우울함도 더해지고 있다. 해를 보내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던 가까운 이들과의 약속도 줄줄이 취소하고, 연수원에서는 방학 중 모처럼 계획했던 대면 연수도 대부분 비대면으로 돌리며 계획을 계속 수정하고 있다.
터널의 끝이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어둡고 긴 터널이 끝나기를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나름의 일상 회복 방법을 찾아본다. 부속실에 근무하는 사랑스런 보은 주임에게 “당근마켓에 사용하던 크리스마스 트리 싸게 파는 거 있는지 한 번 알아봐 줄래요?” 했더니 작년에 트리로 사용하던 나무와 장식이 있다며 찾아온다. 중앙현관에 나무를 놓고 꾸미고 불을 밝혀본다. 배경음악도 켜두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오가는 분들의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도 들린다. ‘그래, 작은 변화라도 줘보자, 스스로 불을 밝혀보자. 어둠을 밝혀주는 사람과 전화라도 해보자. 그래, 이럴 때는 정현이지.’
첫 발령지에서 만난 귀엽고 총명했던 중학생 시절의 정현이. 눈이 유난히 반짝였고 늘 웃음 띤 얼굴에 호기심도 질문도 많아 자꾸 눈길이 가던 아이. 교사는 자기 수업에 귀 기울이고 눈 반짝이며 고개 끄덕여주고 질문해 주는 아이가 그렇게 고맙다. 교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교사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예뻐한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인간성 좋은 아이를 예뻐한다.
정현이는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모스크바대학으로 유학을 갔었다.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한 달에 한 두 번은 장문의 손 편지를 보내왔다. 문학을 전공해서인지 정현이 편지는 한 편의 수필 같아서 읽고 또 읽으며 기다림이 되었다. 그중 러시아 생활에 담긴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학생들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먼 나라에서 공부하는 남자 대학생의 생활 속 생생한 이야기라 그런지 여학생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까르르거리며 듣고 질문해 주어 우리도 따라 러시아 여행을 하는 듯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학위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자리 잡기는 쉽지 않았다. 이 대학 저 대학 시간강사, 겸임교수, 연구교수를 오래 거치다 보니 안정된 생활이 되지 않아서인지 결혼도 늦어져 맘이 쓰였다. 이런 사정에도 정현이랑 통화하면 밝은 기운이 전화기 너머로도 전해졌다. 이런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2013학년도 부산국제중 교감 재직 시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김나지아 제11학교와 부산국제중․고간 국제교류가 있어 다녀올 기회가 왔었다. 가기 전 사전 공부를 위해 자료를 찾다가 모스크바 대학에서 ‘중세 러시아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정현이가 생각나 전화를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관해 읽을거리나 책 등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백야의 뻬쩨르부르크에서』라는 책을 소개해 주며, 마침 자신도 겨울방학 내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서관에서 소논문을 쓰며 보낼 예정이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자고 했다.
정현이가 추천해 준 이병훈님의 『백야의 뻬쩨르부르크에서』 책을 읽으니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인들은 뻬쩨르부르크라 부른다-가 눈에 그려졌다. 이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은 세계적인 문인들이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뻬쩨르부르크를 만든 표트르대제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뻬쩨르부르크가 낳은 세계적 문인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의 장소를 따라 도시 곳곳을 순례하는 장면, 이 외에도 러시아 박물관, 극장 같은 예술 전시관 마린스키, 에르미타주 박물관, 피의 구세주 성당, 러시아가 사랑하는 시인 푸쉬킨 이야기 등은 나를 뻬쩨르부르크로 초대하는 기분을 들게했다. 겨울왕국 러시아, 그중에서도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뻬쩨르부르크’라니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겨울방학을 하고 국제교류를 희망하는 학생 7명과 지도교사 일행은 10여 시간 비행기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닿았다. 도시는 300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러시아의 베네치아’로 불리는데, 겨울이라 강은 온통 얼어 있었다. 겨울왕국 러시아를 한겨울에 찾았더니 그동안 우리가 만난 추위는 추위도 아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긴 밍크코트와 모자를 쓰고 있어 세상의 모든 밍크는 여기 다 모여 있는 거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도 참여했는데, 우리에게도 익숙한『죄와 벌』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내용이었다. 사전에 준비를 하고 수업에 참여해서인지 우리 아이들도 곧잘 발표하며 금새 친해져 같이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며 역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다.
자매결연을 맺고 수업도 참여하다가 문화체험을 하는 날, 우리는 러시아 전역을 미니어처로 조성해 놓은 ‘마켓 러시아’ 에 가게 되었다. 미리 와 있던 정현이와 연락이 닿아 동행하게 되었다. 정현이는 러시아어로 마켓은 ‘가게’라는 뜻이 아니라 ‘모형’으로 쓰인다고 말해주며, 미니어처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러시아 지역과 그에 담긴 역사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서 아이들의 이해를 도와주었다. 실력과 인성을 고루 갖춘 훌륭한 제자를 머나먼 나라 러시아에서 만나 도움을 받다니 감개무량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기꺼이 찾아와 준 정현이에게 다시 감사를 전하고 싶다.
“선생님은 저의 고향 같습니다. 부산 가는 기차에 몸을 실으면 저는 두 분을 떠 올립니다. 바로 우리 어머니와 선생님이지요.”
이 말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부산을 잘 지켜야겠다는 사명감(?)마저 들게 했다. 정현이는 그동안 쉼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며 오랜 시간 기다린 결과 지금은 모교의 노어노문학과 전임교수가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참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사랑하는 시인 ‘푸쉬킨’의 시(詩)처럼,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怒)하지 않으며,
우리 가슴에 슬픈 꿈들을 더 생생하게 일깨우는 마지막 꽃들이
더 사랑스러울 수 있기를!
◇ 이미선 원장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현 부산시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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