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하나 있으니` 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대학 시절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읽고 나는 비로소 역사에 눈을 떴다. 역사는 내가 무척 좋아하고 흥미를 가졌던 교과였지만, 고등학교까지는 옛날이야기가 흥미로워 재미있게 공부하고 시험 성적도 잘 나오던 하나의 교과에 불과했다. 평생 올곧게 살다 가신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통해 ‘역사관’을 갖게 되었기에 이후로도 그분의 저서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찾아 읽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詩를 읽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눈을 감으니 떠오는 사람 하나, 둘, 셋......
가슴에 살아있는 비슷한 이야기 하나. 아주 오래 전 모 신문에서 읽은 글인데, 가수 이정선님이 ‘초승달과 밤배’ ‘오세암’ 등으로 잘 알려진 동화작가 정채봉님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자신의 콘서트에 찾아와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정채봉님과 콘서트 마치고 술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정선 씨는 외롭지 않으세요? 나는 글을 하나 마무리하면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거던요. 근데 습관 때문인지 글이라는 게 마감을 하다보면 대부분 한밤중이거나 새벽녘이 되더라구요. 곤히 잠자는 아내를 깨우기도 그렇고 한밤중에 친구에게 전화하면 놀랄까 망설여지고 해서 어느 날은 원고를 들고 성당에 갔어요.
한밤중에 찾아가도 마리아님은 놀라지 않고 잘 들어주실 거 같아서요. 내가 글을 읽어 주기 전이나 이후나 마리아님 표정이 글쎄 똑같은 거예요. 왠지 안 들으신 것만 같아서 다시 원고를 들고 포장마차에 가서 아주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읽어 주었는데 다 읽고 나니 졸고 계시더라구요. 허허. 세상 참 의지할 곳 없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정선 씨는
“선생님 앞으로는 저에게 전화하세요. 한밤중이나 새벽녘 언제든 괜찮아요. 저는 놀라거나 졸지 않고 진짜 잘 들어드릴게요.” 그러면서 즐겁게 한잔했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정채봉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셔서 그 아쉬움으로 글을 썼노라고 했다.
세상에 사람들은 많은데,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정말 많은데...... 우리는 관계를 잘 맺고 있는 것일까? 한밤중에 전화해도 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불현듯 보고 싶어지는 사람, 언제든 전화해서 만나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설명을 일일이 하지 않아도 또 하나의 나처럼 편안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질문에 ‘그래 00이는 그런 사람이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전 세계를 달구고 있는 ‘오징어 게임’ 드라마가 떠오른다. 주인공이 생명을 건 경쟁 게임에서 살아남아 받은 상금 456억이란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소중한 어머니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목숨을 건 그 무시무시한 돈을 가지고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주인공. 이 섬찟한 드라마를 보면서 극도의 경쟁, 물질 만능, 계급사회, 격차 심화, 능력주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불평등 구조, 인간의 비굴함, 이기심 등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 사회 모습과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하버드대학생들을 대상으로 72년간 종단연구한 그랜트 연구에서
‘누가 정말 성공한 삶을 살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결론은 바로 ‘관계’로 나왔다고 한다. 뼛속까지 사회적 존재인 우리 인간은 아무리 첨단의 시대를 살고 로봇과 AI가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고 엄청난 돈을 가진다 해도 여전히 진정한 사랑과 정(情)을 그리워하고 관심받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특히나 부부, 부모자식 등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크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자주 만나다 보니 확률도 높지만, 그보다는 욕심과 기대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함석헌 선생님이 말한 ‘그 사람’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한밤중에도 전화하고 찾아가도 되는 ‘그 사람’을 만날까?
우리는 대부분 ‘그 사람’ 갖기를 원한다. 분명한 것은 그런 친구가 몇 명이며 누구일까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런 친구,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금률’이다.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하라!’ 아주 간단한 진리이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그 사람’을 갖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실천해보자.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가 나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먼저 하자. 상대는 나와 생각,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건강한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비록 자식이나 부부라 하더라도. ‘같이 있되 거리를 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시절 거리에 나가면, 지난여름 뜨거운 태양과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곱고 예쁘게 물든 단풍잎들과 알알이 열매 맺은 가을 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가을을 닮아 우리의 관계도 더 무르익고 성숙해지기를......
◇ 이미선 원장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현 부산시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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