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게 준 선물 (35) 내게 남은 것

나의 교단일기 /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이미선 승인 2022.04.01 09:26 | 최종 수정 2022.04.06 10:19 의견 0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류시화의 〈목련〉

(연수원 건물 사이 목련 사진)
부산시교육연수원의 목련 [사진 = 이미선]

겨울 칼바람 헤치고 우리 곁에 다가와서 더 반갑고 애틋한 목련.
3월의 교무실은 아직 냉기가 강해 따뜻한 차(茶)가 좋다. 
수업이 비는 시간이면 물을 팔팔 끓여 녹차나 커피를 마신다. 
학교를 사직여중으로 이동하고 아직 서로에게 어색한 3월의 봄, 
커피 한 잔을 들고 창밖을 보는데 백목련이 여기저기 눈부셨다. 
헤아려보니 일곱 그루. 사직여중 교화(敎花)가 ‘백목련’인 이유도 알 듯하다. 

창밖을 보고 있으니 내가 즐겨 불렀던 〈하얀목련〉 노래 가사가 절로 나온다.
아울러 우리 가곡 〈목련화〉도 흥얼거려진다.
〈목련〉이라는 시(詩)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시를 보면서 ‘아!’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목련꽃을 보면서 어찌 이런 깊은 생각과 사색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시인의 남다른 눈과 생생하게 길어 올린 언어가 내 맘을 사로잡았다.
‘그랬지....뭔가에 쫓기고 누군가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때 꿈에서조차 나도 갈 곳이 없었지.
삶이 헛헛할 때 무리 속에서는 웃고 있었지만 돌아와 혼자 남은 시간에 서러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지. 우리네 삶은 닮은 듯, 닮지 않은 듯......인생길을 걷고 있나 보다.

교사 시절, 통상 나는 3월 2주 정도까지는 교과서를 펴지 않고 ‘나는 누구인지, 왜 교사가 되었는지, 왜 하필 도덕·윤리 교사가 되었는지‘를 먼저 이야기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외로웠던 사춘기, 치열하게 고민했던 대학 생활 이야기를 먼저 솔직하게 들려주면 아이들도 어느새 하나둘 마음의 빗장을 푼다. 

그리고는 연간 수업과 평가 계획서를 나누어주고 수업방식은 어떻게 하고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지, 도덕 수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안내한다. 안내 후에는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과 평가는 무엇인지, 모둠 구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같이 묻고 답하며 토론을 거쳐 연간 수업 계획을 보완해서 작성한다. 말하자면 전체 숲을 보고 나무 한 그루, 꽃 한송이를 살피고 키워나가는 방식이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어 꾸준히 실행해 왔다.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 첫 단원은 ’인간의 특성‘이었다. ’인간의 특성‘이라.....도덕․윤리 교과를 가르치다보면 당연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들이라 자칫하면 지루하고 와닿지 않는 뜬구름 잡는 내용이기 쉽다. 그래서 도덕․윤리 교사들은 유난히 고민이 깊다. 뻔한 내용을 어떻게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지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인간의 특성을 어떻게 와닿게 풀어낼까? 생각에 잠기다 창밖 목련을 보다가, ’아! 그래, 이거야.’라는 생각이 반짝이며 스쳐갔다. 교사에게도 이런 순간은 흥분과 설렘이 있다.
 
바로 부직포를 찾아 류시화의 〈목련〉 시(詩)를 적었다. 그리고 〈하얀목련〉 노래와 〈목련화〉 가곡 테이프를 구하러 학교 인근을 다 뒤졌다. 이미 흘러간 노래라 테잎 구하기가 쉽지 않아 몇 시간이나 돌아다녀 겨우 찾았다. 발로 뛰며 구한 수업 자료는 귀하고 뿌듯함을 주었다. 노래 테잎과 함께 교육전문지 ‘우리교육’ 3월호에 실린 하얀목련 사진 등으로 며칠에 걸쳐 수업 준비를 하고 교실에 들어섰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차이는 뭘까요?”
“생각할 수 있다는 거요.”
“동물도 생각할 수 있지 않나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거요.”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해 바나나를 따먹던데?”
“이성(理性)이 있다는 거요.”

아이들과 묻고 답하기를 계속하다 보면 범위가 좁혀진다.

“네, 좋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인간이 동물과 정말 다른 점이 있다는 걸 찾았어요. 
여러분도 같이 한 번 찾아볼까요? 일단 여기 붙여둔 시(詩) 한 편 같이 써 봅시다.”
“네 선생님.” “좋아요, 선생님.” “우와 기대돼요.”....아이들은 시를 노트에 쓰기 시작한다.

시를 적는 동안 〈녹턴〉으로 배경음악도 들려주었다. 

제자들은 졸업 후 만나면 “음악 시간이 아닌데 음악을 듣고 국어 시간이 아닌데 시를 감상하고 미술 시간도 아닌데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바로 우리 도덕 수업이었지요.” 

라며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목련〉 시를 적고 함께 낭송도 해보고, 활짝 핀 하얀 목련 사진도 보여주고 목련을 노래한 서로 다른 두 개의 노래를 들려주고는 아이들에게 생각을 말해보게 했다. 아이들은 놀랍게 주제를 스스로 찾아낸다.

“아하, 알았어요. 동물도 생각할 줄 알지만, 인간처럼 이렇게 풍부하게 느끼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할 줄은 몰라요. 맞죠?”
“오호! 대단합니다. 그래요. 〈목련〉이라는 꽃 하나를 보아도 인간은 시로 노래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이렇듯 다양하고 풍부하게 나타내는 게 인간의 특성이 아닐까요?” 

이렇게 함께 공감하고 만들어 간 그 시절의 수업은 내 가슴 속에 살아있다. 아이들도 그렇게 정성을 다한 수업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기억들이 담겨있어, 이사를 하거나 물건을 정리할 때 도덕 공책은 버리지 않고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제자들도 있다. 

(‘하얀목련’ 노래를 생각나게 하는 연수원 뒷산에 핀 목련 사진)
연수원 뒷산 산책길의 목련. 노래 〈하얀목련〉을 생각나게 한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한 시간 수업을 위해 일주일씩 공을 들여 준비한 수업은 
수업 자료를 찾기 위해 온갖 싸이트를 뒤지고 발로 뛰며 만들어간 수업은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서로 묻고 답한 수업은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고 토론했던 수업은
아이들의 생각을 읽고 공감해 주었던 수업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무상해도 이렇게 나와 아이들 가슴에 남았다.

 

이미선 원장

<교육학 박사, 부산시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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