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게 준 선물 (36) ‘상처가 꽃이 되다’ - 판혁 

나의 교단일기 /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이미선 승인 2022.04.15 22:25 | 최종 수정 2022.04.17 23:43 의견 0

상처가 뿌리를 내린다
화단에 꺾꽂이를 한다
눈시울 적시는 아픔
이 악물고 견뎌내야
넉넉하게 세상 바라보는
수천 개의 눈을 뜰 수 있다

중략

막무가내로 꺾이는 상처,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박성우의 봄, 가지를 꺾다 중에서>

 

이쁘고 반짝여 조심해서 닦아도 쨍그랑 깨져 버리는 유리잔,
미끄러져 바닥에 세게 떨어져도 끄떡없는 강한 스텐,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그릇들을 설거지하다 문득 떠오르는 우리 아이들 모습.

한 교실에 앉아 있는 올망졸망 같은 또래 아이들,
얼핏 보면 철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이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공부만 하면 되는데 뭔 걱정이냐 싶지만 
아이들은 제 나름의 상처가 있고 저마다 개성도 다르다.
한 개수대에 같이 담겨 있어도 제각기 그 특성이 다른 그릇처럼.

진학을 눈앞에 둔 중3, 고3 학생들의 2학기는 고민이 가득하다.
부모님의 기대가 크고 자신도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고 잘하고 싶은데, 
꿈과 현실은 거리가 있다. 
상담하고 어깨가 축 처져 교무실 문을 나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교사의 마음은 무겁다.

오래전이지만 잊을 수 없는 판혁이와의 진학 상담. 

“판혁이는 뭘 하며 살고 싶어?”
“저는 무조건 돈을 많이 벌겁니다.”
“무조건?”
“네, 무조건요. 무슨 일을 해도 돈만 많이 벌면 됩니다.”
“돈이 그렇게 중요한가?”
“당연하죠. 돈이 제일 중요하지요. 돈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지요.”
“인간답게 사는 데 돈이 필요하지. 그래도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 않나?”
“아니요. 선생님은 아직 뭘 모르셔서 그런 거 같습니다.”
“실망이다. 판혁이가 그렇게 돈에 목을 매는 사람인 줄 몰랐네.”
“선생님이 제 사정을 알기나 하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선생님이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판혁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며 울기 시작했다. 
놀라서 이유를 물었더니, 집안 사정을 들려주었다.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시던 부모님이 빚을 져, 집으로 찾아온 빚쟁이들에게 무시당하고 발로 짓밟히고 멱살이 잡힌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서 판혁이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판혁이는 한참 울고는 진정이 되었는지 잠시 부모님 생각에 흥분했다며 죄송하다고 말하고는 문을 나섰다. 담임인 내가 아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가슴 깊은 상처를 건드렸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서 나도 사과하고 손잡아 주었다. 

가정방문을 하지 않으니 아이들의 가정 사정을 쉽지 않다. 특히 사춘기 남자아이들은 말수가 줄어들고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는다. 같은 교복을 입고, 무상교육이 이루어져 겉으로는 별 표시가 나질 않는다. 더욱이 판혁이는 인간성이 워낙 좋아 압도적인 친구들의 지지로 반장이 된 아이라 집안이 그렇게 어려운 줄을 몰랐다.

졸업 앨범 속의 판혁이

판혁이는 평소 말수가 적고 무슨 말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앉아 있어 그저 조용하면서 자신의 할 일을 잘하는 총명하고 착한 모범생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3학년 반장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반장이 되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친구들에게 판혁이가 그렇게 압도적 지지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었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인간성을 이야기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힘든 친구를 아버지 같이 챙겨주고, 학급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인성이 최고의 실력이라더니 그 말이 맞네.’ 생각이 들었던 아이였다.

 

그때의 기억은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그가 누구보다 잘 되기를,
꿈을 이루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돈도 잘 벌어 의미 있게 쓸 수 있기를 기도했다.

“막무가내로 꺾이는 상처, 그런 상처가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그런 상처 때문인지 판혁이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거 같다. 의사가 된 걸 보면. 

얼마 전 판혁이를 만났는데 어느새 아이 둘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그와 이야기해보니 나의 기도가 통한 거 같았다. 참 흐뭇하고 보기 좋았다. 

판혁이 가족 사진 두 장 삽입
단란한 판혁 가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부모님 안부를 물었더니, 아버지는 허리가 많이 안 좋아 소일거리 정도 하고 계시고, 어머니는 아직 옷 수선일을 하고 계신단다. 여전히 집안 사정은 안 좋은데 자신이 별 도움을 못 드린다고 말했다. 의사가 되긴 했지만 아직은 자기 가정 꾸리는 정도라며 앞으로 더 잘해 드려야겠다고 말한다. 세월이 그렇게 지나도 어린 날의 상처는 아직 남았는지 꿈을 이루고 아주 잘 되어서 만나도 부모님 이야기에는 눈시울을 적신다.

판혁 가족의 식물원 나들이

우리는 누구나 기도한다. ‘상처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그저 즐겁고 기쁜 일들만 있었으면.....’ 

그러나 아무도 그런 인생을 살지는 못하는 거 같다. 석가의 말처럼 우리는 이미 업(業)을 갖고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 살아갈수록 태어난 이상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이가 들어서야 정호승 시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도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미선 원장
이미선 원장

<교육학 박사,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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