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7-권두칼럼】 국제교류역사 도시 釜山과 동래부민 - 강석환

강석환 부산초량왜관연구회 회장

시민시대1 승인 2022.07.01 11:43 | 최종 수정 2022.07.03 10:30 의견 0

부산은 국제교류역사 도시다. 사계절 내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곳이 부산이다. 그런데 부산을 찾는 관광객 대부분은 해운대 태종대 광안리 등 바다와 자연환경 중심의 관광지로 부산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부산이 절경의 관광지 못지않게 오랜 국제교류 역사의 문화자산을 지닌 도시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산은 동아시아의 국제교류역사의 중심지, 근현대 서양문물의 수용 전진기지, 세계 최고 위치, 시설의 항만을 보유한 세계적 물류중심지다.

신라시대 국왕이 동래온천을 일부러 찾았고, 고려시대 조선시대 동래의 수령, 부사를 신선이 사는 곳에 산다하여 ‘선백’仙伯이라 불렀다. 부산의 옛이름 동래東萊는 ‘동쪽의 蓬萊’를 줄인 말인데, 동래부東萊府 객사客舍 현판 이름조차 ‘봉래관’蓬萊館이었다[봉래산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또 동래는 작은 한양漢陽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옛부터 동래는 물산 풍부하고, 인심 좋고, 기후 좋은 곳이라 조선 사람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어한 곳이 東萊, 바로 釜山이었다. 또,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국가를 수호하는 최일선에서 과감하고 의연하게 목숨을 내던지며 싸운 사람들, 동래[부산]부민들이 사는 곳이 동래, 부산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 동래부민은 조국을 수호하고자 침략자 왜적에 맞서 싸워 생명과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산화하였다.

전쟁 이후 조선과 일본이 1609년 기유약조로 국교정상화 이후, 다시 동래는 평화적인 외교 무역의 일선 기지가 되어 수출 수입의 최일선이 되었다. 그곳에서 교역의 노력을 다한 분 또한 동래부민이었고, 일본으로 파견되는 평화 사절단 ‘대일통신사’의 선원과 군사, 통역의 소임을 다한 분 또한 동래부민들이었다. 1609년 이후 古館이라 부르는 수정동 시장 일대 ‘두모포왜관’, 1678년부터 용두산을 중심으로 지금 중구지역[과거에는 ‘초량’이라 불렀다] ‘초량왜관’에 항구와 시장시설, 거류 숙소 등을 만들어 이곳 ‘왜관’에서 대마도와 교역을 하였다.

대마도는 기본적으로 조선 정부와 일본 막부에 양속관계를 맺었다. 대마도는 조선과 조공체계를 유지하며 조선의 해양을 바깥에서 방어역할을 하고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장군의 직위와 독점적 무역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조선정부가 하사한 도서[圖書-인장을 말하다]로 날인한 문서를 지참하지 않은 무역선은 일체 입항이 불가하였다. 또 남성에 한해서 부산의 ‘왜관’내에 한정해서 머물 수 있었고, 철저한 동래군관의 통제 아래 운영되었다.

조선 정부가 특히 대마도를 통해 조달 수입한 물품은 중국과의 교역에 필요한 물품[주로 銀]/ 재정운용과 국방상 필요한 화폐주조 재료 ‘구리’/ 활과 화살 재료/ 탄약 재료인 유황/ 유럽 동남아시아 물품 등이었다. 그에 상응 수출한 물품은 중국에서 조달한 면사, 비단, 조선의 쌀, 인삼, 목면, 약재, 서적, 불교도구, 다양한 생필품 등이었다.

강석환 회장
강석환 회장

조선후기 270년간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와 무역은 선린 평화와 문화교류시대를 구가하였다. 이 시기 동래부민은 국제교류의 최일선 동래에서 국가를 대표하여 국제무역의 기초가 되는 노역, 통역, 물품 조달 등 온갖 힘든 역할을 충실하고도 훌륭히 소화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에게는 아직 ‘왜’字 콤플렉스가 남아있다. ‘왜구’ ‘왜란’과는 달리, ‘왜관’은 조선정부의 훌륭한 ‘대일외교무역시스템’이었다. 또한 이 왜관시스템을 운영하면서 기여한 우리 동래부민의 노력 또한 너무나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왜관’의 인식은 아직 낮설고 부정적이다.

부산은 국제교류역사도시다. 부산에서 국제교류역사도시의 상징은 ‘왜관’과 통신사가 아닐 수 없다. ‘통신사’ 못지않게 부산의 ‘왜관’에 대한 시민적 인식과 진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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