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송포를 아시나요?”
해운대 센텀시티 센텀아파트 앞 도로와 수영강 사이 언덕을 거닐다 보면 ‘재송포’라고 씌어진 한글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예전에는 포구였다는 말이다. 재송동을 알고 있는 시민들조차 ‘재송포’라는 말은 낯설다. 그 열쇠는 ‘수영강’에 있다.
수영강은 1652년(효종 3년)에 하구(수영구 수영동 231)에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이 설치되면서 수(水)와 영(營)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수영강을 사이에 두고 절도사영과 재송포는 맞바라보고 있었다. 이 수영강에 조선시대에는 숱한 배가 드나들었고 수영강과 해운대 앞바다에서는 각종 어로작업이 성행했다. 재송포의 강 건너 맞은편에는 경상좌수영의 전선들이 정박하고 활동하던 시절 재송포는 수영강의 가장 큰 포구였을 가능성이 높다(『해운대구지』, 1994).
18세기 경상좌수영의 제도·조직을 정리해 놓은 『내영지(萊營誌)』에 따르면 ‘재송포는 경상좌수영 동쪽 5리에 있다. 소나무 수만 그루가 있다.’ ‘재송포는 동래부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고, 소나무가 수만 그루 있다.’ ‘장산에서 베어낸 소나무로 조선골에서 전선(戰船)을 만들어, 재송포에서 띄워 좌수영으로 가져갔으며, 조선통신사로 조엄이 일본에 갈 때 조선골에서 만든 배 2척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재송포는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재송포의 진산(鎭山)인 장산 역시 소나무가 울창했음을 알 수 있다. 재송포의 ‘송’은 소나무 송(松)이다. 거북선을 비롯해 조선시대 전선(戰船)의 주 재료는 소나무였다. 재송포의 위치는 1992년 온천천 직강공사 이전에 흐르던 온천천과 수영강이 합류하는 지점, 곧 지금의 재송동 773-2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조선골의 위치는 장산의 남서산록에서 발원하여 수영강 하류 재송포로 흘러드는 소하천 골짜기, 즉 지금의 재송 1동 산75-5번지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골에서 만든 배는 재송포를 통해 수영강으로 나아갔다.
옛 문헌에 재송포는 한자로 栽松浦, 裁松浦가 혼용되고 있다. ‘심을 재(栽)’와 ‘마를 재(裁)’가 함께 쓰이는데 ‘소나무로 조선골에서 전선(戰船)을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나무를 마름질해 무엇을 만든’ 포구라는 의미의 재송포(裁松浦)란 표기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 수영강은 어로자원이 풍부했다. 수영강 하류에 위치한 재송포는 수영만으로 출어하는 어선들의 전진기지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을 것이다. 또한 가까운 곳에 사창(社倉)이 있었으므로 세곡선도 무시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재송포는 장산의 소나무, 조선골, 경상좌수영, 통신사 선박 건조, 사창, 수영강, 수영만과 어우러져 내륙물류기지로서 번창했음을 쉬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는 6척의 배에 약 500명의 인원과 물자를 싣고 쓰시마, 오사카를 거쳐 교토, 때로는 도쿄까지 갔다는데 한양을 출발한 통신사 일행은 2개월 정도 걸려 부산에 도착해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이러한 통신사 일행의 움직임에 대해 재송마을까지도 영향을 받았다(한국학중앙연구원). 수영강 재송포는 ‘동아시아 해양수도’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 부산의 입장에선 항만물류도시의 원형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도 재송포의 흔적이 재송동에 보인다는 것이다. 재송마을은 조선골에 더해 뒷골, 안골, 서당골로 불리어 온 세 계곡이 있었는데 지금도 재송1동 산74-5번지 일대 골짜기의 옛 명칭이 조선골이라고 전해진다. 이를 지도상에서 유추하면 지금의 해운대 재송동 센텀고와 메르세데스벤츠 부산해운대전시장 사이 도로 뒤편 산중턱쯤으로 추정된다. 뒷골은 지금의 해운대경찰서가 있는 지역이고, 안골은 북쪽 현 삼성아파트가 있는 지역이며, 서당골은 현재 은진송씨 문중 재실인 재송재(栽松齋)가 있는 자리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1로 31번길 12-12와 신대암메디칼(해운대로 91번길 21-13) 일대이다. 서당골 사람들은 원래 충청도 회덕에서 임진왜란 이전인 1550년께 동래로 이사 온 은진송씨(恩津宋氏) 삼성공파 문중으로 이곳 집성촌을 송촌(宋村)이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재송마을의 옛 모습은 근세문학자인 최한복(崔漢福, 1895-1968) 선생이 정리한 『수영유사(水營遺事)』의 ‘수영팔경(水營八景)’에 ‘재송직화(栽松織火)’로 묘사된다. 재송직화는 재송마을의 부녀자들이 관솔불을 밝혀놓고 베를 짜는 길쌈 광경을 수영강 건너편 좌수영성에서 바라본 풍광으로 마치 소나무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밤의 반딧불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수영강 일대는 조선시대 해군기지이자 조선업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수영강 상류는 오늘날 노포동이 있는 팔송 일대로 거슬러 간다. 옛날에는 수영강의 교역선이 팔송진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들이 수영강을 따라 팔송진을 통해 들어와 호국사찰인 범어사를 공격했다고도 한다(해운대 향토사 과제도출 연구, 2018).
그런데 그 뒤 재송포와 인근 해운포는 모래와 토사로 메워져 거대한 충적평야로 변했다. 이 충적평야에 일제 강점기 골프장이 건설됐다. 1928년 일본인 언론기관인 <부산일보>가 골프장 건설을 주장해, 부산골프장(재단법인 부산골프클럽)이 만들어지면서 수영강 하구 약 6만6천 평의 소나무 우거진 백사장을 갈아엎고 1933년 잔디를 깐 9홀 규모의 골프장이 들어섰다. 이렇게 해서 그 많던 재송포의 소나무 숲이 사라진 것이다. 부산골프장은 1944년에는 일제의 군용 비행장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영비행장이다.
수영비행장은 1950~1954년 국내 유일의 임시 국제공항으로 사용됐으며 1963년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으나 1976년 김해공항이 개장되면서 수영비행장은 폐쇄되었다. 그 뒤 수영비행장 부지는 국방부가 관리하면서 비행장 활주로 양측 외곽을 컨테이너 야적장 부지로 임대해 많은 양의 컨테이너가 산적해 있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센텀시티라는 신도시로 탈바꿈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재송마을 사람들이 이러한 재송포의 역사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재송포축제’를 열고, 시장통 안에 ‘재송역사박물관’을 건립했으며 재송당산제를 지내고, 전통술인 ‘송순주’ 복원에 나섰다. 재송지역발전협의회가 2007년 ‘제1회 재송포축제’를 열었다. 재송동이나 재송마을 축제가 아닌 ‘재송포축제’이다. 이 때 재송지역발전협의회는 재송1·2동 주민자치위원회와 함께 수영강변에 ‘재송포 표지석’을 건립했다. 2013년 재송마을 사람들은 해운대구 재반로 63번길 23 재송시장 안에 10평가량의 재송역사박물관을 만들어졌다. 옛 문헌에서 나타난 재송동의 흔적, 재송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사진, 근·현대 재송동의 변화와 발자취 사진, 재송동만의 설화와 전설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1986년 창립한 재송본통당산제회(裁松本統堂山祭會)는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재송동 주민자치위원회는 송순(松荀·소나무의 새순)을 발효한 재송마을 고유의 술인 ‘송순주’(재송주)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옛날 왜구로부터 불바다가 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운 여우 전설을 바탕으로 여우가 살았던 소나무 숲의 여릿여릿한 송순을 따다가 약수와 함께 빚어 제를 지냈는데 이때 바친 술이 송순주라는 것이다.
이러한 ‘재송포’ 스토리텔링은 2019년 부산연구원 부산학연구센터 교양총서 프로젝트인 ‘재송마을 이야기’에 담겼다. 이 프로젝트는 필자와 조송현 인저리타임 대표(동아대 겸임교수), 엄수민 인저리타임 기획이사(전 대홍기획 부장)가 공동으로 참여해 6개월간 연구한 내용으로 2019년 말 책자로 나왔다.
이 프로젝트는 △박정희 전 해운대구의회 의장 △유영진 재송역사박물관 관장 △손성민 재송본통고당제회 총무 △송동근 은진송씨삼성공파종회 회장 △박종하 재송1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 △김위자 재송2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 △서성아 재송1동 주민자치위원회 간사 등 재송마을 지역 리더들과 △김해룡 티파니21 대표이사 △박창희 스토리랩 수작 대표 △서종우 가능성연구소 소장 △정진택 해운대문화원 사무국장이다. △강동진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양흥숙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등 전문가들의 조언과 자문을 받아 이뤄졌다.
이제 항만물류도시 부산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영강 재송포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재송마을의 그랜드 디자인을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수영강에 수상레저타운을 설치하자.
수영강 수로를 이용하여 재송동 위쪽까지, 작은 배가 올라갈 수 있도록 ‘신재송포 수상코스’를 열어보면 어떨까? 하구 수영교의 교각을 좀 더 높여 선박 출입을 쉽게 하고 이곳에 소형 파워보트나 무동력 레저기구와 같은 해양레저기구 계류시설을 설치하면 어떨까? 강 중간에 도로의 중앙선처럼 청신호, 적신호의 표시등을 설치하고 우통항(오른쪽 통항)을 하게 하고 양안에는 선박계류시설을 설치하면 어떨까? 이렇게 함으로써 재송포 표지석이 있는 일대를 ‘신재송포’로 칭하고 수영만 요트계류장의 보조적 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해양레저의 메카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의 오사카의 ‘수상(水上)버스’와 같은 것을 도입해 해운대-재송동(수영강)-민락동-용호동-영도-중앙동’ 코스를 개발해보면 어떨까?
둘째, ‘수영강 역사박물관’ ‘수영강 옛길’을 만들어 재송포 이야기를 널리 알리자.
재송동은 수영강의 문화자산 및 유산을 재조명 정리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입석나루, 노포, 팔송진, 재송포, 해운포 등은 한때 수영강의 대표적 나루터(포구)였다. 문화콘텐츠의 하나로 재송동 아래 수영강변(나루공원 일대)에 ‘수영강 역사박물관’ 또는 ‘수영강 역사 라키비움’ 같은 것을 세워 재송포와 주변 고분군의 역사를 담아내면 어떨까?
셋째, ‘신(新)수영팔경’을 만들어보자.
수영강을 중심으로 좌수영과 재송포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송포의 옛 선창에서 누렸던 풍요를 재현’하기 위해 현재 부산시가 추진중인 수영강 보행교가 만들어질 경우 종점부(시점은 좌수영 선소 부근)로서, 낙우송, 버드나무 등을 많이 심어 오래된 분위기의 선창과 저잣거리의 재현이 가능한 수변마당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강변에 만 그루의 소나무로 가득하던 재송포와 재송직화의 상상도(想像圖), 그리고 일제를 거치면서 골프장, 수영비행장, 콘테이너 야적장, 센텀시티로 변하는 모습을 통해 수영강의 변천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원래 수영팔경 중 복원이 가능한 좌수영성을 기본으로 하고, F1963, 팔도시장, 보행교, 나루공원, 영화의전당, 삼어마을 입구 등 새로운 경(景)을 추가해 ‘신수영팔경’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또한 재송동을 둘러서 수영강을 건너 좌수영까지 ‘역사의 길’을 조성하고, 수영강 위에 거북선, 판옥선, 조선통신사선 등 역사성 있는 배 같은 디자인을 한 ‘수영강 역사박물관’을 건립해보면 어떨까? 수영강에 옛 재송포와 조선골에서 만들었음직한 좌수영의 ‘전함’ 한 두 척을 띄워놓아도 좋지 않을까?
넷째, 재송마을과 센텀시티, 재송포와 좌수영을 연결하는 축제를 만들자.
오래된 재송마을과 새로운 센텀시티를 연계할 수 있는 중간지역에 ‘브릿지시설’을 만들 필요가 있다. 아랍에미레이트의 두바이 프레임과 같은 전망대를 재송마을과 센텀시티 사이에 만들고, 예전에 콘테이너 야적장이었고 지금은 여관이 많은 중간지역에 해운대구청이 청년창업기업을 적극 유치해 ‘창의예술지대’로 만들어내면 어떨까? 또한 옛 재송포과 좌수영을 잇는 행사로 새롭게 수영강 인도교가 생긴다면 ‘재송포-좌수영 줄다리기’ 행사를 한번 열어보면 어떨까?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에 따르면 1933년 구포다리(길이 1060m)가 완성된 뒤 구포다리 가로등 전기요금을 어디서 부담할 것인가를 놓고 시비가 생겼는데 구포면장과 대저면장이 논란을 벌이다 ‘줄다리기’로 결정하자고 해서 대저-구포 줄다리기를 벌여 구포 쪽이 이겼다고 한다. 안동에서는 지금도 동네 대항 줄다리기를 재현하기도 하는 만큼 부산의 새로운 관광상품으로 기획해보면 어떨까?
재송1·2동은 원래 같은 마을이었는데 분동이 되면서 마을 사람들끼리 왠지 모르게 서먹해진 감이 없지 않다고 한다. 통합동이 됐으면 좋겠다는 주민들의 바람을 이뤄낼 순 없을까? 경기도 안산시 원곡 1·2동은 한 때 분동됐다가 2018년에 안산시 단원구 ‘백운동’으로 통합된 바 있다. 재송마을 사람들은 재송동 본동지역이 해운대지역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다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지리상 해운대의 중심에 있는 만큼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해운대구청 신청사 부지가 당초 계획한 대로 재송지역으로 이전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처럼 재송마을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조선시대 재송포의 시대적 변천과 마을사람들의 옛것 찾기를 보면서 수영강 재송포에 대한 재발견이야말로 ‘동북아 해양수도 부산’의 ‘오래된 미래’이자 ‘비전 찾기’가 아닐까 싶다.
<경성대 교수·환경경제학 박사, 소셜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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