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9-에세이】 설거지의 발견 - 림태주

림태주 시인

시민시대1 승인 2022.09.03 19:55 | 최종 수정 2022.09.05 13:26 의견 0

소설을 척척 써내는 인공지능이 탄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앉아서 나는 이 글을 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감각의 세계와 이성의 세계를 구분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동굴 안이고,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진짜라고 믿으며 산다고 했다. 동굴 안은 가짜 세계이고 동굴 밖으로 나가야 진짜 세계인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보이는 것만 믿는 인간의 무지를 깨우치려고 했다. 인공지능은커녕 학위란 것이 없던 고대의 은유 관념이었고, 플라톤은 위대한 철인으로 추앙된다. 우리는 지금 가상화폐가 등장하고 사이버 세계가 열리면서 어디가 동굴 안이고 어디가 동굴 밖인지 분간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테네 사람 플라톤은 과연 자신이 말한 이데아와 동굴의 세계가 이천사백 년 후에 펼쳐질 것을 예견했을까?

내게 글쓰기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글을 쓰려면 ‘사전’辭典부터 버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전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이다. 한 치도 동굴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서는 강력한 가림막이 ‘사전’이다. 국어사전, 법률사전, 금융용어사전, 철학개념사전과 같은 이름을 가진 권위와 권력은 사회 구성원들을 동굴의 테두리 안에서 그 동굴이 안전하고 완전하다고 믿게 만든다. 언어는 규범과 규칙과 정의定意를 통해 우리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하고 동질화한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의 언어로 사유한다는 의미이고, 자신의 언어를 가지려면 ‘모두의 사전’인 동굴을 버려야만 ‘자신의 사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동굴을 ‘해체’하고 사전의 개념에 ‘저항’하는 일이 글쓰기의 시작이다. 그때 비로소 내가 이 세계를 나의 시선으로 인식하고 해석하고 명명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철학哲學의 ‘철’이 밝음을 뜻하거나 필로소피Philosophy의 어원이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는 걸 상기해보자. 생각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반동이고 변혁이다. 이미 확정되고 구조화되고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미완의 세계를 모험하는 일이 ‘쓰기’라는 행위이다. 원초적이어서 거칠고 두렵지만 눈부신 한낮의 세계로 나가야 실상을 볼 수 있다. 사건의 정황과 사물의 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가르쳐준 것, 이미 말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로소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은 것을 내 언어로 사유하고 설명하는 일이 ‘지혜’이고, 그것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나의 삶’인 것이다. 내가 설명하고 해석해낸 것, 그것만이 진짜 나의 세계이고, 그 세계는 내가 가진 언어들로 구성된다.

“당신은 설거지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는 글쓰기를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이 질문을 던진다. 국어사전에는 설거지를 ‘음식을 먹고 난 뒤에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로 규정해두고 있다. 혹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이라고도 설명한다. 옛사람들은 이걸 ‘비설거지’라고 따로 떼어서 썼다. 살면서 설거지를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고, 어쩌면 먹고 자고 똥 누는 일만큼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 설거지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한다. 쓸모있는 생각들은 대개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좋은 질문은 ‘동굴’ 속 깊숙이 울리며 들어가 흔들어 깨운다. 나의 저 질문에 “그렇다면 설거지란 대체 무엇인가?”하고 근본을 헤집어보려는 사람이 있겠고, “논할 만한 가치가 설거지에 있는가?”하고 따지고 드는 사람이 있겠고, “과연 설거지란 가능한가?”하고 철학자 데리다처럼 되물어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내 질문은 그토록 의미심장하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나는 단지 설거지하는 ‘마음’이 궁금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설거지는 참 지겹고 하기 싫고 삭막하고 존재감 없는 일이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 설거지인데 그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가 나는 궁금하다. 사전에 나오는 그대로, 씻고 정리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똥 누러 화장실에 들어갈 때 스마트폰이나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처럼, 설거지하는 사막의 시간에 생각의 씨앗 하나를 품고 문장의 싹을 틔우는 시간으로 활용한다면 얼마나 울창한 글의 숲이 생성되겠는가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플라톤을 빌려 말하면 설거지란 동굴 속의 사건이다. 진짜 세계인 것 같지만 가짜 세계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반복적이고 순환적이고 자동적이어서 다른 해석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내가 설거지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내리지 않는 이상 설거지는 창조적인 삶의 시간이 아니라 소멸하는 죽음의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설거지를 ‘명상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가장 가깝게 만나는 시간으로 전환한다. 설거지는 내가 먹는 일에 빠져서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요리 재료 하나하나를 떠올려보는 시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어떻게 내게 와서 나를 생육하게 하는가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나는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름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니 피할 방법은 없다. 피할 수 없으니 여름이 좋은 점 몇 가지를 생각해내서 싫어하는 마음을 완화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텃밭에서 각종 열매채소를 바로 수확해서 신선하게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즐거움이 여름에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동물은 다른 동물과 식물을 통해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나는 이것을 살생이나 살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건 생명의 순환원리이고 생명 사이클의 근본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식주의를 찬양하지도 않지만 채식주의를 이상하게 보지도 않는다. 각자의 생각이고 각자의 선택이므로 존중해주면 될 일이다. 다만, 다른 생명을 취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므로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혹은 내 삶의 가치나 쓰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이 오늘 내가 가졌던 설거지하는 마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내 사전에서 설거지란 ‘나를 깨끗이 씻어 말리고 정돈하고, 다시 새 삶에 사용하는 일’이다. 구월의 햇살이 눈부신 동굴 밖에서 설거지를 하면 확실히 얼룩 때가 투명하게 잘 보이고 과오들이 속속 닦이고 영혼이 말갛게 소독된다.

 

림태주 시인

◇ 림태주 시인 :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다. 출판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관계의 물리학』, 『그리움의 문장들』, 『그토록 붉은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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