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인정’ 이론을 주장한 제3세대 비판이론가다. 호네트에게 ‘인정’은 어떤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을 긍정적으로 타인으로부터 확인한다는 의미인데, 호네트 비판이론의 출발점은 사람들은 저마다 인정’을 받기 위해 산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타인과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자질이나 능력을 인정받아야만 긍정적인 자아 정체성과 공동체에의 소속감을 획득하면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정을 얻는 과정은 사회구성원 간의 존중과 인정 상황보다는 갈등과 투쟁 상황에 가깝다는 것이다. 호네트의 스승인 하버마스는 인간은 상대방과 소통하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그 결과 합의에 도달 가능하다고 본 반면, 호네트는 하버마스와 달리 사회구성원들 간의 인정과정에서 소통과 존중이 아니라 갈등과 투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어떤 사회든지 모든 구성원이 타인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 결과 구성원 간에 인정받기 위한 투쟁과 갈등이 벌어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결국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인정투쟁을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합리적인 상호작용을 통한 상호인정으로 끌어낼 수 있냐는 점이다.
호네트는 사람이 타인이나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나 모욕을 받게 되면, 당연히 괴로움과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고 그로 인해 사회적 갈등과 저항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호네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국 인정투쟁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사람들 간의 상호인정이 잘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이런 사회가 바로 사람 살기 좋은 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비민주적인 사회는 인정투쟁이 자유롭지 못하고 상호인정 대신에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무시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호네트 주장이 우리 한국 사회와 정치에 주는 시사점과 함의는 상당히 의미 있고 중요하다. 호네트는 인정의 형태를 ‘사랑’과 ‘법’ 그리고 ‘가치 부여’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사랑은 가족이나 애인과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정이다. 예컨대 가족이나 연인관계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받는 것은 중요하다. 법 또한 인정의 한 형태다. 호네트는 인간은 법을 통해 자신이 사회로부터 자율성을 인정받은 존재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고 보았다. 법은 공동체 구성원인 개인의 독립성과 자기 결정권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법은 자유권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한다. 가치 부여도 인정의 또 다른 형태다. 가치 부여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의미한다. 예컨대, 개인의 성과와 업적에 따른 사회적 보상체계나 분배규칙 역시 인정의 중요한 형태이다. 그런데 가치 부여 즉 사회적 평가는 법적 인정과는 다르다. 법적 인정은 법 앞 평등에 의해 형식적으로나마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여되는 반면, 사회적 평가 즉 가치 부여는 사회적 보상과 배분 과정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구성원 간의 동등성이 아닌 비동등성과 차이를 가져온다. 개인의 성과와 업적에 따라 보상과 분배의 수준이 차등적으로 부여되고 그 결과 분배규칙의 공정함을 놓고 사람들 간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된다는 점에서 동등성을 전제로 하는 법적 인정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호네트는 이렇게 인정의 형태를 세 가지 구분해서 설명한 다음, 인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인정의 병리적 현상’에 대해서 설명한다. 사회구성원 간에 인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인정의 병리적 현상인데, 호네트는 이런 상황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사회적 규칙이 타당성을 상실한 경우다. 예컨대 현재 우리 사회의 분배규칙인 성과주의나 업적주의에 대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하고 있지 않다. 성과주의와 업적주의의 폐기와 대안적인 분배규칙을 찾고 있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러한 상황이 바로 인정의 병리적 현상이다. 또 다른 병리적 현상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인정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경우다. 예컨대, 자신의 성과나 업적보다 과도한 분배를 원하거나 인터넷이나 SNS상에서 과도하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관심중독에 빠져 있다면, 이 상황이 바로 인정의 또 다른 병리적 현상이다. 마지막 세 번째 병리적 현상은 인정받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인정받으려는 상황이다. 예컨대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비싼 변호인을 사고 전관예우 등을 활용해 처벌을 회피하려 한다면 이런 경우도 인정의 병리적 현상이다.
한국 사회와 한국 정치는 현재 정확하게 인정투쟁과 인정의 병리적 현상에 놓여 있다. 법적 인정 측면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개인의 자유권뿐 아니라 사회권의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법적 인정은 원래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법적 장치인데, 이제 한국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상의 자유권을 넘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적극적인 권리인 사회권의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 현행 헌법인 87년 헌법에는 87년 민주화 영향으로 인해 자유권은 강화되어 있지만 사회권은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담겨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회권 확장은 세금 인상 등 개인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침해 여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 따라서 사회권 확장을 위한 인정투쟁은 기존의 자유권과 충돌하는 측면이 존재하며, 이 틈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부자와 서민들 간의 인정투쟁이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법적 인정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인정투쟁은 기존의 자유권을 놓고도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기존의 자유권이 여성과 소수자들(성소수자와 다문화 소수자 등)의 개인적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을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과 소수자들의 자유권 확보를 위한 인정투쟁도 한국 사회에서 강하게 펼쳐지고 있다. 여성뿐 아니라 소수자들의 자유권 쟁취를 향한 인정투쟁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정체성 투쟁이기도 하다. 남성과 여성, 다수자와 소수자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 세력 간의 인정투쟁이 현재 대한민국에 팽배한 것인데, 이는 그동안 소외당하고 혐오 받아 온 소수집단들이 자기 결정권을 지니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투쟁에 다름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공동체가 직면한 인정투쟁은 법적 인정투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외에도 가치 부여 즉 사회적 평가 측면에서도 인정투쟁은 현재진행형으로 거세게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공동체의 분배규칙은 성과주의 즉 업적주의에 기초한다. 개인이 능력별로 성취한 업적에 따라 더 많은 것을 분배받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분배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러한 업적주의와 성과주의 분배규칙의 타당성 여부를 놓고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예컨대, 현재 대한민국 공동체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얻고 다시 자식들을 잘 가르쳐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공동체의 결속을 해칠 정도로 과도하게 심화되었다. 반대로 가난하면 교육의 기회를 상실하고 다시 가난이 대물림 되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성과주의와 업적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 찾기에 나선 것이 현재 상황이다. 사회적 약자와 진보 진영이 주장하는 대안적 분배규칙은 기회의 평등을 실질화하고 사회권을 확대하는 것이다. 보수 진영의 사유재산권과 자유시장 그리고 자유권 강조에 맞서 진보 진영이 기회의 평등과 사회권 확대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서로 격한 인정투쟁과 갈등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문제는 인정투쟁이 강하게 펼쳐지고 있는 반면 상호인정은 너무 느리고 어떤 경우에는 기존의 인정마저 다시 후퇴하고 있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점이다. 인정투쟁은 격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상호인정이 느리거나 어렵고 오히려 기존의 상정마저 퇴행하는 상황은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 다름 아니다.
특히 인정투쟁과 상호인정이 다시 후퇴하는 상황은 20대 대선 이후 윤석열 정부하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대 대선은 우리 사회에서 인정투쟁이 가열된 시기였다. 그동안 중시되지 않고 무시 받아온 청년층이 인정투쟁의 새로운 주역이자 전선으로 부각 되면서, 이들의 인정투쟁과 이에 대한 정치적 작용이 우리 사회와 정치권에서 가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기존에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우리 사회의 균열은 지역 균열, 이념 균열, 세대 균열, 계층/계급 균열이었다. 이러한 균열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 간의 인정투쟁이 벌어져 왔고, 정치권은 이들 균열을 동원하여 표를 관리해왔다. 균열을 통한 표 관리가 우리 사회의 인정투쟁을 주도해 온 것이다. 그런데 20대 대선에서 소위 말하는 이대남/이대녀 균열이 기존의 지역, 이념, 세대, 계층/계급 균열에 가세하여 새로운 균열과 인정투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이대남의 표를 끌어오기 위한 국민의힘의 전략은 이대남을 제대로 온전히 인정한 결과가 아니라 선거 공학적으로 활용하고 폐기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준석 전 대표와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는 이대남의 표를 의식해서 이들을 인정하는 정책을 내놓았지만, 대선 이후 이대남들을 위한 정책을 철회했다. 이대남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이대남을 선거 공학적으로 활용하고 용도 폐기한 것이다. 더 비판받아야 할 점은 가부장제와 남녀 차별이라는 사회구조적이고 전통적이며 문화적인 구조적 어려움 속에서도 1987년 이후 지속적으로 영향력과 저변을 키워온 여성의 인정투쟁 즉 페미니즘을 이준석 전 대표와 윤석열 대통령이 선거기간에 반 인정투쟁의 대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대남 결집을 통해 페미니즘을 폄훼하고 부정하며 결국에는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공약을 내놓았고, 지금은 여가부 폐지를 추진 중인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들의 인정투쟁을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부정한 것이고 퇴행시킨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2023년 현재 대한민국 공동체는 인정투쟁과 상호인정이 합리적이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민주사회인가? 그렇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리 사회는 1987년 절차적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이 점차 강화되면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인정투쟁이 나날이 활성화되어 왔지만, 사회구성원 간의 인정투쟁이 너무 거칠게 전개되고 있고, 특히 윤석열 정부 들어 사회구성원 간의 상호인정은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인정투쟁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인정투쟁 과정이 갈등과 투쟁으로 귀결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서로 존중하고 합의하는 상호인정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인정투쟁은 크게 두 가지 영역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정체성을 둘러싼 인정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정의 즉 분배정의를 둘러싼 인정투쟁이다.
정체성을 둘러싼 인정투쟁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의 주류집단이 그동안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누려온 인간의 존엄성을 소수집단도 등등하게 누릴 수 있게 요구하는 것이다. 즉 정체성을 둘러싼 인정투쟁은 기본적으로 인간 존엄의 동등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나 소수자를 중심으로 주도되고 있다. 이들은 동등한 인권을 지닌 인격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당한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또 1990년대 이후 촛불집회 등 광장 민주주의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가 활성화되면서 국민의 주권자로서의 정체성 투쟁과 직접 민주주의 확대 노력도 현재 강하게 펼쳐지고 있다. 촛불집회 이전의 국민 정체성이 수동적인 ‘유권자’ 정체성에 가까웠다면, 촛불집회 이후의 국민 정체성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주권자’ 정체성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렇듯 정체성을 둘러싼 인정투쟁은 우리 사회의 인권 강화와 민주화 그리고 국민의 주권 의식 강화 등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사회정의를 둘러싼 인정투쟁 즉, 분배정의를 규정하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인 성과주의와 업적주의에 대한 도전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강하게 벌어지고 있다. 성과주의와 업적주의가 지닌 무시하기 어려운 문제점은 국민 개개인이 성취한 업적이 서로 계량적으로도 다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취한 업적의 분야도 다르고 이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업적주의와 성과주의 분배규칙은 세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다. 첫째, 공부를 잘한다고 평생 남들보다 가장 많은 것을 가져가는 것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둘째, 공부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을 성취한 사람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것이 진정 정당한 것인지. 그리고 셋째,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한 계량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공정한 것인지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 사람이 평생 가장 많은 분배를 가져간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게다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가정환경이 부유하거나 고학력 부모를 둔 경우가 많다. 반면,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가정환경이 떨어지거나 저학력 부모를 둔 경우가 많다. 출발선이 다른 데 결과적인 계량적 차이만으로 분배를 행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역시 공정하지 못하다. 이렇듯 이들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논쟁과 이의제기가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현재 우리 사회가 맞닥트린 분배 정의룰 둘러싼 거센 인정투쟁의 배경이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환경과 능력 그리고 현재 처한 입장이 다르다. 사람들마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와 호네트가 똑같이 강조하는 게 있다. 서로 소통하고 합의하려면 그리고 제대로 된 상호인정을 이루어지려면 개인은 상대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와 소통하거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소통하고 인정받고 싶다면 먼저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 이렇듯 상호인정에는 존중과 자제력의 상호성이 전제된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들도 서로 존중하고 자제해야 서로 소통하고 인정받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다. 개인도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 사회적 개인이다. 개인도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사회적 환경 내에서 자제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해야만 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다. 인정투쟁은 날로 거세지고 있는데, 상호인정은 어렵고 교착상태나 오히려 퇴행 상태에 빠져 있다. 호네트가 말한 것처럼 인정투쟁을 행할 자유는 사회구성원 개개인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동등하게 지닌 국가공동체 구성원들 간에는 이렇듯 인정투쟁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하고 상호인정이 민주적으로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인정투쟁을 억누르고 무시하고 혐오하는 것은 민주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고 민주시민의 자세도 아니다. 그건 비민주적인 사회이고 비민주적인 시민이다.
호네트의 지적대로 인정투쟁은 인간사회에서 불가피하다. 하지만 인정투쟁에 갇혀버린 우리 사회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회피가 가능하고 회피해야만 한다. 1987년 절차적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인정투쟁이 점차 활성화되고 상호인정이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을 하루아침에 퇴행시킬 수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 공동체를 살아가는 국민은 인정투쟁과 상호인정에 대한 역사적 책무를 지니고 있다. 인정투쟁은 그동안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 받거나 모욕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사회의 인정을 받으려는 투쟁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의 인정투쟁을 정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인정투쟁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민의식과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사회가 바로 우리가 염원하는 민주사회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인정투쟁이 과열된 공간에서 심히 오작동 중이다. 인권과 기본권을 지닌 동등하게 소중한 민주시민으로서, 작금의 시민들은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그래도 차이가 있으면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고 합의하는 민주시민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사적 욕망을 우선시하는 시민이 아닌 공익과 공동선을 개인의 사익과 함께 동등하게 고려하는 민주시민이 필요하다. 민주시민은 다름 아닌 인정투쟁을 인정하고 민주적인 갈등 해결을 통한 상호인정을 체화하고 제도화하는 시민이다. 민주주의를 통해 인정투쟁을 제도화하고 상호인정을 활성화하는 것이 우리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 진시원
▷부산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사)목요학술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시민시대』는 본지의 콘텐츠 제휴 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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