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3-수필】 종이책의 비밀 - 박향

시민시대1 승인 2023.03.16 13:27 | 최종 수정 2023.03.21 16:18 의견 0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즈음이었다. 확진자 수가 연일 상승하여 병원은 병실이 부족하고, 사람들은 극도로 외출을 꺼리고, 학교에서는 학생 한 명이 확진되면 전교생이 모두 PCR 검사를 받던 그런 때, 심리적인 불안 또한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였다.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가족 모임마저 제한하고 있는 데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만남을 꺼리다 보니 다른 도시에 사는 딸을 몇 달 동안 보지 못하고 있었다. 카톡이나 전화로 서로 안부를 주고받거나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 그즈음의 일상이었는데, 어느 날 전화를 걸어온 딸 J가 평소와는 다른 말을 했다.

“엄마, 뭐 읽을만한 거 없어?”

초, 중학교 때 독서에 재미를 붙이려고 그렇게나 애를 썼지만 결국 나를 포기하게 만든 딸이었다. 도무지 책 읽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아이라 반갑기보다 오히려 뜨악해져서 나는 놀라 되물었다.

“니가 읽으려고?”

J의 말은 퇴근을 해도, 주말에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스마트폰 보는 것도 한계가 있고, 책이라도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뭐, 혹시 알아? 이 이상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 같은 게 있을지.”

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J의 대답에 뜬금없이 감동 비슷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어쩌면 저 도서관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 중에 그런 방법을 적어놓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것이 있든 없든 책을 읽겠다는 J의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극도로 독서를 회피하던 어린 시절의 그녀를 떠올리면 나에겐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J는 지금 종이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젊은 독서 인구의 대부분이 웹소설과 웹툰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종이는 비싸고 무거우며 휴대하기 불편하고 다루기 불편한 매체라 곧 사라진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종이책 독서를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끔 생각해 본다. 점점 불편한 이 종이라는 매체가 사라진다면, 정말 그렇다면 저 많은 도서관 서가마다 가득 꽂힌 책들과 서점에 들어찬 책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경제 논리나 인간의 편의성 추구에 의해서 종이책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는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디에서 책이 주는 향기를 맡을까.

코로나가 끝나면 J의 반짝 독서도 끝날 것이라는 내 예상은 가볍게 비껴갔다. 우리 모두의 예상과 달리 코로나는 끈질기게 길었고, J의 독서도 계속되었다. 이번 겨울에 나는 J에게 줄 책으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선택했다. 내 작은 서재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 책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구입해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책은 다른 책 속에 파묻혀 버려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로 주문해서 책을 받아보니 내가 예전에 읽었던 그 표지가 아니었다. 나는 J에게 주기 전에 책을 다시 읽기로 했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배경으로 전후 세대인 15세 소년 베르크와 전쟁 세대인 36세 여인 한나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나이 차이, 또는 한쪽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고 베르크와 한나는 연인으로 발전한다. 함께 목욕하고, 사랑을 나누고, 베르크가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그들 연애의 전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너무나 행복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한나가 사라져버린다. 사랑이 그의 온 생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베르크는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찾지 못한다. 한나와의 기억으로 베르크는 그 어떤 여자와도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법대생이 된 베르크는 어느 날 법정 참관수업에서 전범자로 법정에 선 한나를 본다. 베르크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나치의 부역자였다는 사실에 수치와 고통을 함께 느낀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그녀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베르크는 빠지지 않고 재판을 참관한다. 재판 일련의 과정을 통해 베르크는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문맹은 한나의 일상에서 전쟁처럼 그녀의 온 생을 지배해 왔던 것이다. 전쟁이 인간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처럼 문맹은 한나의 삶 자체를 피폐하게 만들어왔다. 함께 재판받던 동료들이 모든 죄를 한나에게 덮어씌우지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한나는 그들의 죄까지 모두 끌어안는다. 문맹은 그녀 스스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했고, 그 어느 곳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게 했으며, 연인을 떠나게도 했고, 전범의 주동자가 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게도 했다.

한나의 종신형으로 괴로워하던 베르크는 한나가 복역한 지 4년이 지난 어느 날 책을 읽고 녹음한 테이프를 감옥으로 보낸다. 다시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된 것이다. 베르크의 책 읽어주기는 그로부터 8년 동안 계속되고, 한나는 베르크가 보내주는 테이프 속의 책을 찾아 한 자 한 자 대조하며 글자를 익힌다. 결국 혼자서 책을 읽게 되었을 때 그녀가 제일 먼저 교도소에 신청한 책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이었다. 그녀는 유대인 학살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모든 책을 찾아서 읽고, 전범자로서의 자신을 단죄한다.

한나가 글자를 익히고 책을 처음 읽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본다. 그 책은 단순한 종이와 글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글자를 품은 종이 특유의 향기, 종이와 손이 닿았을 때의 감촉, 책장을 넘길 때 종이와 종이가 스치며 내는 가느다란 소리, 책 한 권의 부피감과 그것을 잡았을 때 손에 들어차는 충만감. 그 모든 것이 한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았을 것이다. 책갈피를 끼워 넣으며 이만큼 읽었다는 뿌듯함도 느꼈을 것이고, 몇 페이지 남지 않았을 때는 안타까움으로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하는 독서가 주는 환희와 놀라움이 그녀의 인생을 다르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한나의 감동이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으로부터 왔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감히 해볼 수도 없다.

미국의 브루클린에는 독립서점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독립서점이 지역 문학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 지역 독자와 작가가 만나고 대화하는 일종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서점들은 지역작가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제공하고, 책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곳에 모여 토론도 하고 서로의 생각도 공유한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브루클린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독립서점이 도서 시장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이 나왔을 때 그림이 사라지지 않았고, 텔레비전이 나왔을 때 라디오가 없어지지 않았으며, 비디오테이프의 탄생으로 극장의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듯이, 전자책과 종이책의 가치 또한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우리는 종이책의 비밀을 다 알지 못한다. 감옥에서 한나가 맡았던 종이책의 냄새가 우리 평범한 인간의 영혼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한 그 비밀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 읽어주는 남자」 독서를 마치며 나는 책을 안고 조용히 냄새를 맡아보았다. 종이책을 거쳐 전자책으로 넘어간 보통 사람들과 달리 전자책을 지나 이제야 종이책에 진입한 J가 종이 냄새를 좀 더 오래 맡았으면 하는 기대가 은근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 박향

▷등단: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상: 세계문학상, 현진건문학상, 부산작가상, 부산소설문학상

▷저서: 소설집 『좋은 여자들』 외,

▷장편소설  『파도가 무엇을 가져올지 누가 알겠어』 외

▷에세이 『걸어서 들판을 가로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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