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관 오디세이 - 양자도약
러더포드가 1911년 알파입자 산란을 통해 원자핵을 발견한 것은 원자 연구의 큰 걸음이었습니다. 원자는 작지만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자핵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도는 모양,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태양계 모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러더포드 원자모형은 태양계로 비유되고 ‘태양계 원자모형’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곧 원자에 대한 새로운 의문들을 던져주었습니다.
전자는 원자핵 주위를 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기적인 인력에 의해 전자가 원자핵에 끌려들어가 붙어버릴 테니까요. 전자가 원자핵에 붙어버린다는 것은 원자의 찌그러짐, 곧 물질의 찌그러짐 뜻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자는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에 의해 회전운동하는 전자는 빛을 방출해야 합니다. 따라서 빛의 방출하고 나면 전자의 에너지는 그만큼 줄어들고 결국 원자핵에 끌려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원자는 찌그러져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열을 받은 원자는 빛을 내긴 합니다. 따라서 전자가 원자 속에서 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러더포드 모형에 의하면 원자가 회전하면서 점점 운동에너지를 잃기 때문에 방출하는 빛은 연속스펙트럼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 단색광으로 이루어진 불연속적인 선스펙트럼인 것입니다.
도대체 전자가 어떤 상태로 돌고 있기에 원자가 안정상태를 유지하며, 또 선스펙트럼의 빛을 방출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1911년 이후 원자 연구를 둘러싼 물리학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닐스 보어가 1013년 기상천외한 처방을 제시했습니다. 이 처방의 핵심은 전이(transition) 혹은 양자도약(quantum jump)입니다. 이론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원자의 안정성과 방출되는 빛(선스펙트럼)의 현상에 끼워 맞춘 응급처방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전자가 핵 주변을 돌더라도 특정 궤도를 돌 때는 빛을 방출하지 않고, 전자가 궤도와 궤도를 뛰어 이동할(quantum jump) 때 특정 파장의 빛을 방출한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보어의 응급처방은 당시 고전물리학으로부터 유도될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의 탁월한 물리적 직관이 발휘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보어가 러더포드 원자모형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보어 원자모형을 제시하는 사고의 과정을 짚어보겠습니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출발점은 지금까지의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경이(驚異)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물질의 안정성이었네.”1)
뉴턴역학에 의하면 태양계는 다른 항성계와 충돌할 경우 절대로 원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태양계와 비슷한 형태를 가졌다고 생각된’ 원자(러더포드 원자모형)는 인접한 원자들과 상호작용을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어는 말하는 것입니다.
보어는 러더포드 원자모형이 설명하지 못한 원자의 안정성과 선스펙트럼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과감한 가설을 내세웠습니다.
①원자 안에서 전자는 정해진 궤도만을 회전한다. 이 같은 정해진 궤도를 회전할 경우 전자는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하지 않는다. 원자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경우를 정상상태(stationary state)라고 한다. 즉, 원자는 일정한 불연속적인 에너지 상태(정상상태)를 갖는다.
②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전이할(transition or quantum jump) 때 원자는 단색광 형태로 에너지를 불연속적으로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빛의 진동수는 두 궤도의 에너지 차이에 비례한다. υ=E/h=(E1-E2)/h. (υ = 방출되는 빛의 진동수, E1= 첫 번째 궤도에 있는 전자의 에너지, E2=두 번째 궤도에 있는 전자의 에너지, h=플랑크 상수).
③전자가 원 궤도 운동을 할 경우 전자의 운동량은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로 한정된다. 즉 전자의 각운동량(궤도반경 r × 운동량)은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를 2π로 나눈 값이다. (각운동량 L=nh/2π, 보어의 양자조건, quantization postulate).
④전자가 안정된 궤도를 돌고 있을 때(정상상태), 전자의 행동은 고전역학의 법칙을 따른다(대응원리).
보어의 이들 가정은 어느 것도 고전물리학에서 유도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보어가 아무렇게나 가설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보어는 원자의 안정성과 원자가 방출하는 선스펙트럼 등 원자의 현상에 주목하고 이 현상에 플랑크의 양자 가설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적용했습니다.
보어는 수소원자 선스펙트럼의 규칙성을 발견한 스위스 수학자인자 물리학자인 발머(Johann Jakob Balmer)의 발머계수에 주목했습니다. 수소원자의 선스펙트럼은 빨강 파랑 감색 자주 등 4가지인데, 그 파장을 조사해 어떤 규칙성을 찾았습니다다. 즉, 이들 파장의 비율은 ‘정수’와 깊은 관계를 보였습니다.
발머계수는 러더포드 모형으로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러더포드 모형이 맞다면 수소원자 스펙트럼은 연속스펙트럼이 돼야 했습니다. 결국 보어는 발머계수에 대한 분석과 플랑크의 양자 가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바탕으로 이 같은 대담무쌍한 가설을 내세웠습니다.
보어 모형에 따르면 전자가 정해진 궤도를 돌고 있을 때는 빛을 방출하지 않습니다. 이를 보어는 ‘정상상태(stationary state)’라 이름 붙였습니다. 전자의 에너지는 바깥쪽의 궤도를 돌 때 높고, 안쪽 궤도에서는 낮습니다. 전자가 궤도를 바꾸는 것을 전이(transition)라고 하는데, 높은 궤도에서 낮은 궤도로 전이할 때 그 에너지 차이만큼 전자기파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보어의 가설 ③을 구체화한 것이 보어의 양자 조건입니다. 이것은 ‘전자의 운동량에 궤도 한 바퀴의 길이를 곱한 것이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에 한정된다.’(L=nh/2π)는 것입니다. 즉 전자의 궤도반경은 플랑크 상수를 포함한 최소 단위(양자)의 정수배와 비교한 수치 즉, 일정한 간격을 가진 불연속적인 값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전자가 최저 궤도(보어 반경)를 돌 때 그 에너지가 최저이며 결코 그 이하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어는 이 양자 조건에 의해 전자가 원자핵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원자모형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보어는 또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광양자의 에너지는 플랑크상수와 진동수의 곱)에다 가설 ②를 조합하여 원자가 방출한 빛의 진동수에 대한 관계식을 정립했습니다. 즉, 전자가 표면의 궤도로부터 내부의 궤도로 옮길 때 전자가 방출한 빛의 진동수는 전자가 각각의 궤도에 있었을 때의 에너지의 차이를 플랑크상수로 나눈 값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어의 진동수 조건’이라고 불립니다. 보어는 이를 통해 발머계수의 각 파장과 진동수를 정확히 유도해낼 수 있었습니다.
원자에 대한 의문, 즉 ‘원자가 열을 받으면 빛을 내며, 그 빛은 하필이면 왜 발머계열처럼 특 정한 파장(진동수)의 선스펙트럼을 보이는가?’ 하는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어의 원자모형을 요약하면 전자는 일정 궤도만을 가질 수 있고, 그 궤도를 돌 때는 안정상태를 유지하나, 다른 궤도로 전이할 때만 빛을 흡수 또는 방출한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안정궤도를 돌고 있을 때(정상상태), 전자는 고전물리학 이론에 따라 행동한다’는 보어의 가설 ④는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라고 불립니다. 보어는 전이 현상을 고전역학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 가설을 통해 양자이론을 고적역학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보어가 대응원리를 착상한 것은 전자의 선스펙트럼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전역학(맥스웰의 전자기이론)에 의하면 전자가 회전하면서 내는 빛은 전자의 궤도와 궤도를 회전하는 진동수와 진폭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보어가 가정한 궤도 간의 전이에 의해 방출되는 빛은 이상하게도 전자의 궤도와 진동수를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소원자 에너지 준위의 크기는 궤도 수 n(정수)의 제곱에 반비례하므로 궤도 상태 수 n이 매우 클 때는 궤도 간의 에너지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전자가 높은 궤도에서 바로 그 아래 궤도로 전이할 때는 빛을 내지만 고전역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전할 때 빛을 방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보어는 여기서 대응원리라는 개념을 착안한 것입니다.
고전역학적인 복사(빛의 방출)와 보어 원자모형에서 궤도 전이에 의한 복사는 과정이 전혀 다르지만 궤도 수가 클 때는 결과적으로 복사의 진동수 값이 거의 같습니다. 그는 이 방법을 이용해 양자화된 수소 에너지 준위 공식을 유도했습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실험값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보어는 결국 고전물리학의 언어를 빌려서 원자의 현상을 표현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양자의 세계는 고전물리학적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고전물리학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후에 양자역학의 표준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이 됩니다.
보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정상상태의 전자도 고전역학적인 법칙에 따른다고 가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가장 안정된 상태(n=1)의 원자 크기(보어 반지름)를 이론적으로 도출했는데, 이는 그동안 실험으로 구한 10nm(10⁻⁸㎝)와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는 또 대응원리를 에너지 준위 공식에 적용해 양자조건을 유도했습니다.
이로써 보어는 광양자 가설을 토대로 한 4가지 가설을 동원해 그동안 설명이 불가능했던 원자가 내는 빛의 스펙트럼, 원자의 안정성, 에너지의 불연속성을 설명하는 이론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소원자가 내는 가시영역 빛의 스펙트럼, 즉 발머계열의 정체는 수소원자 안의 궤도 n=3, n=4, n=5, n=6에 있던 전자가 궤도 n=2로 각각 전이(transition)할 때 내는 빛이라는 것이 보어의 이론에 의해 깨끗하게 설명되었습니다.
보어의 이론은 원자의 화학적 반응과 원자의 선스펙트럼을 정성적(qualitative)으로 설명했습니다. 보어의 가설은 고전역학이나 전자기이론에서 유도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지만 원자의 현상은 기가막히게 잘 설명했습니다. 전자의 에너지 준위가 불연속적이라는 보어의 가설은 불과 1년 후 프랑크(James Frank)와 헤르츠가 행한 실험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보어의 초기 모형은 뮌헨대학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에 의해 한층 일반화되어 ‘보어-좀머펠트 모형’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이 같은 보어-좀머펠트 모형을 양자역학이 완성되기 이전의 이론이란 뜻으로 ‘전기 양자론’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1923년에 들어서면서 보어-좀머펠트 모형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이 모형이 전자 1개인 수소 다음으로 간단한 헬륨 원자(전자 2개)를 설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보어의 가설들이 당시 물리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고전역학에 따르면 물체의 운동은 인과론적 결정론을 따릅니다. 즉 현재 상태를 알면 전후 상태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보어 모형에서 원자 궤도 내의 전자가 언제, 어디로 전이(양자 도약)하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물리학계에는 양자도약(quantum jump)이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보어의 코펜하겐학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파울리 등은 ‘양자도약’을 신비하고 괴상하기 짝이 없는 가설이라며 비판했습니다. 완전한 양자역학체계인 행렬역학(하이젠베르크)과 파동역학(슈뢰딩거)은 양자도약에 대한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하이젠베르크, 김용준 옮김, 부분과 전체, 지식산업사, 1989, 56p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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