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을 읽으며 나의 '귀거래사'를 소망한다

도연명을 읽으며 나의 '귀거래사'를 소망한다

조송원 승인 2017.06.30 00:00 의견 0

'도연명의 귀거래'를 표현한 그림. 원나라 시대. 작가 미상.

“我豈能爲五斗米折腰向鄕里小兒(아기능위오두미절요향향리소아)” “내 어찌 닷 말의 곡식 때문에 촌뜨기 아이놈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느냐.”

도연명이 자신의 다섯 번째 은퇴이자 마지막인 팽택의 현령 직을 그만 두고자 결심을 하고 남긴 글이다. 가난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릴 호구지책으로 관직에 나갔다. 한데 감독관의 순시 때 의관을 갖추고 영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쥐꼬리 봉급을 받고자 향리의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여 사직한 것이다. 그 벼슬을 맡은 지 80여일만이고 41세 때다. 그리고 한 편의 글을 지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귀거래사〉이다.

1600여년 후학인 나 또한 ‘귀거래사’를 부른다. 돌아가리라, 고향 모옥(茅屋)으로. 부모님의 흔적이 고스란하고, 형제자매들의 숨결과 추억이 머물고 있는 곳. 손길이 닿지 않아 마당에 잡초들이 다투어 키 재기를 하는 비워 있는 집.

그곳에서 콧등에 송동글 땀방울이 맺히도록 4시간 남새밭을 일구고, 4시간은 정성껏 읽고, 4시간은 서럽도록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왜 아직 돌아가지 못하는가. 아내는 멀고 먼 데로 신화(神化)했고, 두 아들은 독립하여 서울과 부산에서 외려 아비 걱정해주는 터수에 아무 거칠 것 없으련만!

歸去來兮 (귀거래혜) 田園將蕪胡不歸(귀원장무호불귀) 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자,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고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음을 알았도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맸으나 아직은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니 오늘(귀향)이 옳고 어제(벼슬살이)가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도다.

〈귀거래사〉는 네 부분으로 이뤄졌는데 이 첫 부분은 귀향의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연명은 악덕이 횡행하는 시대에 살았다. 왕실의 세력이 약화되고 신흥 군벌이 대두하여 각축한 탓으로 이민족의 침입과 농민의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하여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였다. ‘어려서부터 세속과 어울리지 못하고 천성이 본디 자연을 사랑한’(〈귀원전거·歸園田居〉) 연명으로서는 횡포한 군벌과 어울린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사 직전의 가족을 외면할 수 없어 다섯 번이나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때마다 자신의 천성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현실에 맞닥뜨려져 환멸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연명은 불우한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높은 문학적 성취에 견줘 한미하게 촌로로서 김을 매며 평생 가난에 구속된 삶을 동정하곤 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무엇인가? 물러나래야 물러 날 곳도 없는 민초들이 대부분인 역사에서 그래도 시를 지을 수 있는 학식을 갖췄고 술을 빚어 마실 수 있는 전원(?) 혹은 땅뙈기가 있었으니 좀은 자유인이라 해도 지나침은 없지 않을까?

연명의 삶이 후학들에게 가르쳐주는 위대함은 다른 데 있다. 그는 천성이 ‘자연인’으로서 현실과 타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남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야유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현실에서의 좌절과 가난의 질곡을 울분으로 토해내지 않고 담담한 전원시로 승화시킨 점,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연명의 시에는 ‘망우물(忘憂物, 근심을 잊게 하는 물건, 곧 술)’이 자주 등장한다. ‘근심을 잊게 하는 술에 (꽃잎)을 띄워 마시니’(잡시·雜詩) ‘새벽까지 술 마시며 노래를 부른다’(의고·擬古)

연명이 세속과의 긴장을 견뎌내기 위해서만 술을 즐겨 마신 것일까? 물론 연명은 알코올 중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양이 부실하고 의술이 빈약했던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62년의 삶은 고종명(考終命)했다고 볼 수 있다. 더 깊은 원초적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고, 그림자를 밟기 어려운 대시인의 모습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에게 익숙한 연명의 얼굴을 볼 수 있다.

責子(책자) 白髮被兩鬢(백발피양빈) 肌膚不復實(기부불부실) 雖有五男兒(수유오남아) 總不好紙筆(총불호지필) 阿舒已二八(옥서이이팔) 懶惰故無匹(나타고무필) 阿宣行志學(옥선행지학) 而不愛文術(이불애문술) 雍端年十三(옹단연십삼) 不識六與七(불식육여칠) 通子垂九齡(통자수구령) 但覓梨與栗(단멱이여율) 天運苟如此(천운구여차) 且進盃中物(차진배중물)

자식을 나무라다 백발이 양쪽 귀밑머리를 덮고 살결도 전처럼 실하지 못하다. 아들놈이 다섯이나 되지만 하나같이 글공부를 싫어한다. 큰놈 서는 벌써 열여섯 살이건만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이고 선이란 놈은 곧 열다섯이 되는데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네. 옹과 단은 다 같이 열세 살인데 여섯과 일곱도 분간하지 못한다. 통이란 놈은 아홉 살이 가까웠건만 그저 배와 밤만을 찾는다. 하늘이 내린 자식 운이 진실로 이러하니 또 술잔이나 기울일 수밖에.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지은 매듭이 있다. 그러나 누구는 자꾸 그 매듭에 매듭을 더하고, 누구는 한때의 매듭들을 하나씩 풀어간다. 삶은 태생부터 매듭의 집합이다. 그러나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은 아니다. 하여 알렉산더 왕처럼 그 매듭을 칼로 잘라버린다고 그 매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매듭을 다 풀어야 비로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내가 지은 매듭 매듭을 알고 있다. 하여 기꺼이 ‘존재구속성’을 감내한다. 한 올씩 매듭을 풀어 비로소 모든 매듭이 해체되는 날들을 희망한다. 희망은 신산한 삶을 살아낼 용기의 원천이기는 하지만 외줄타기처럼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나 외줄타기, 지켜보면 아름답지 않는가.

매듭은 수효가 있으니 다함이 있다. 매듭을 다 풀고 자유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4시간 일하고 4시간 읽고 4시간 쓰면서 하루를 영원 같이 살리라. 그리워하는 삶, 곧 휴대폰이 없이 살면서 보람을 외물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길어 올리며 단순하고 질박한 생활로 당장 내일 스러져도 아까움이 없는 날들을 살아야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