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 아카데미의 소크라테스 상(왼쪽)과 육조혜능 진신상.
혜능이 8개월째 방아 찧는 행자 생활을 하던 어느 날, 5조 홍인 대사는 후계자 선발을 위해 심게(心偈. 마음의 깨친 바를 쓴 게송)를 공모했다. 1000명이 넘는 동산사(東山寺) 학인들에게 각자 깨친 바를 게송으로 지어오게 한 것이다. 홍인이 그 게송을 보고 불법 대의를 참으로 깨친 자가 있다면, 초조 보리달마-제2조 혜가-제3조 승찬-제4조 도신-제5조 홍인 자신을 이을 제6대 조사로 삼겠다는 것이다.
학인들은 이미 동산법문의 교수사(敎授師)인 수상좌 신수 스님이 홍인 대사의 법석(法席)을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 확실하니 자신들은 게송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신수 상좌(神秀 上座. 606~706)는 이미 큰스님으로 칭해지고 있었고, 출가 이후 노장・유학・불교 삼장 등을 두루 섭렵, 통하지 않는 데가 없이 박식했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지혜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다.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때때로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莫使有塵埃(막사유진애)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
신수는 이 게송을 감히 홍인 대사께 바치지 못하고, 궁리 끝에 방장실 옆 회랑 벽에 붙여 놓았다. 홍인 대사는 이 게송이 신수의 것임을 알고 그를 불렀다.
“너의 게송은 다만 문전에 도달했을 뿐 아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했으니 네 자신의 본성을 명확히 철견하진 못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아직 미혹한 학인들이 이 게송에 의지해 수행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학인들을 회랑 앞으로 소집해 신수의 게송에 분향 경배하게 하고는 이 게송을 수지(受持), 암송하라고 지시했다.
혜능은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여 세부터 땔나무 장사를 해서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하루는 혜능이 땔나무를 산 사람 집에 나무를 져다주고 나오는데 탁발승이 무슨 경전을 독송하는데 마음에 와 닿았다.
혜능은 탁발승에게 지금 독송하는 경전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지 등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자 탁발승은 ⟪금강경⟫이며, 기주 황매현 동산사에서 왔으며, 그곳에는 5조 홍인 대사가 주석하고 있는데, 5조께서는 ⟪금강경⟫ 한 권만 가지면 곧바로 견성・ 성불할 수 있다고 대중들에게 설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혜능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에게 숙업(宿業)의 인연이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온 즉시 어머님께 고별인사를 하고 황매현으로 달려가 홍인 대사를 예배했다.
홍인 대사는 혜능에게 방앗간에 가서 방아 찧는 일을 하라고 명했다. 혜능은 명대로 8개월째 방아를 찧고 있는데, 한 동자승이 방앗간 앞을 지나면서 신수의 게송을 열심히 암송했다. 혜능은 동자승에게, 암송하는 게 무슨 게송이냐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혜능은 방아만 찧었을 뿐, 절 안은 사정은 전혀 몰라 게송 공모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이없어 하는 동자승에게 저간의 사정을 들으며 안내를 받아 남쪽 회랑으로 가 신수의 게송을 향해 예배를 올렸다.
그러나 혜능은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게송을 직접 읽을 수 없어 옆에 있던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읽어주자 혜능은 한 번 듣고 난 뒤 곧바로 대의를 파악하고는, 즉시 자신도 게송 한 수 읊고자 했다.
글자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혜능은 읽어준 사람에게 자신이 읊은 게송을 글자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같잖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써준 혜능이 읊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佛性常淸淨(불성상청정) 불성은 늘 청정하거늘
何處有塵埃(하처유진애) 어디에 먼지, 티끌이 붙을 수 있으랴.
홍인대사는 혜능이 이미 자신의 본성을 깨쳤음을 알고는 돈교(頓敎) 선법과 조위 계승의 신표인 가사(袈裟)를 혜능에게 전해주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이 가사는 지난날 달마 조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와서 선법을 전파한 이래 역대 조사들이 그 법맥의 계승 증표로서 면면히 전해온 것이다. 이제 이 가사를 너에게 전해줌으로써 너는 선종의 제6대 조사가 된 것이다. 유념할 점은 이 가사가 전승의 증표일 뿐 불법의 본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법이란 이심전심으로 전하고 자오자해(自悟自解)하는 것이다. 자고로 불법을 이어받은 사람은 ‘목숨이 실 끝에 매달린 것처럼 위험하기 때문에’ 너에게 가사를 전수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아주 큰 위험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기도 하다. 늘 조위 계승의 상징인 이 가사를 서로 차지하려는 다툼이 벌어질 테니, 전의부법(傳衣咐法) 전통은 너에게서 끝내고 다음부터는 가사를 전수해 주지 말도록 하라. 네가 여기에 계속 있으면 대중들이 너를 해칠까 두려우니 즉각 여기를 떠나라.”
“크리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꾸었는데, 잊지 말고 갚아주기 바라네.”
이것이, 플라톤이 알기로 모든 사람 중 가장 지혜롭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뛰어난 분이라고 진정으로 부를 수 있는 소크라테스 최후의 말이다.
누구나 소크라테스가 추하게 생겼다는 데 동의한다. 그는 들창코에 배불뚝이였으며, 사타로스 연극에 등장하는 실레노스(반은 사람, 반은 동물)보다 못 생겼다고들 했다. 그는 늘 허름하고 낡은 옷을 입었으며 어디든 맨발로 다녔고, 더위와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에 하도 무관심해서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알키비아데스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군 복무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한 번은 혹한이 닥쳤을 무렵 지독하게 추워서 모두 막사 안에 머물거나 밖에 나간다 해도 옷을 몇 겹씩 껴입고 발을 천으로 감싸고 양모 가죽을 댄 신을 신었지요.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맨발에 평소 옷차림으로 신발 신은 병사들보다 더 당당하게 얼음판 위로 행군했습니다. 병사들은 자기들을 경멸하는 것 같아 소크라테스를 노려보곤 했지요.
소크라테스는 신체에서 비롯되는 모든 정욕을 극복하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완벽한 오르페우스교의 성인과 다름없었던 셈이다. 하늘에 속한 영혼과 땅에 속한 신체가 분리된 이원적 세계에서, 그는 영혼의 힘으로 신체를 완벽하게 제어했다. 물론 그는 정통 오르페우스교도가 아니었던 까닭에 기본 교리만 수용할 뿐 미신적인 요소나 정화 의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테네 시민인 소크라테스는 돈이 거의 없었는데 애써 돈을 벌려 하지 않았다. 내일에 대해서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즐거움은 친구들이나 남들과 토론하는 것이었고, 아테네 청년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그 대가로 돈을 받지는 않았다. 그는 철학자였을 뿐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전쟁터에서 큰 위험을 무릅쓰고 알키비아데스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친구나 제자들의 식사 초대를 신사들처럼 사양하지도 않았다.
그러하니 가정에서는 별로 환영 받지 못했다. 그는 처자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내 크산티페 입장에서 본다면, 가정에 빵을 가지고 돌아온다기보다는 오히려 악명을 가지고 돌아올 뿐인 아무데도 쓸모없는 게으름뱅이에 불과했다.
소크라테스는 ‘사악한 자이며 땅 아래에 있는 것과 하늘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괴상한 사람이고, 나쁜 명분을 좋은 명분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에 능한 데다 그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까지 한다.’는 고소장에 따라 기소되었다.
기소의 실제 이유는 그가 귀족층을 지지하는 당파와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제자들 대부분이 귀족 출신인데다 권력자의 지위에 있던 일부 제자들이 악독한 통치로 아테네 시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유능한 자를 권력자로 만드는 문제에 끊임없이 몰두했다고 전한다. 그는 “내가 구두를 수선하고 싶다면 누구를 고용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질문을 했다. 영리한 청년은 “소크라테스 님, 그야 구두장이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이어서 목수, 구리 세공인들에 대해 질문하고, 마지막으로 “국가라는 배는 누가 고쳐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우중에 이끌리어 격정에 우롱되는 정치였다. 장군들도 추첨으로 선출되었다. 무식한 농부와 상인을 알파벳 순서에 의해 최고재판소의 구성원으로 삼았다. ‘덕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국가인가?’에 대해 심혈을 기울이는 소크라테스에게 이 아테네 정치는 비판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아테네 정권은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받아들여 악덕을 고치기보다는 독약을 마시게 하여 그를 침묵시키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일찍이 델포이 신전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는지 물었더니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신탁이 나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신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기 때문에 무척 당황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잘못을 입증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 현명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먼저 정치가를 찾았다. 그리고 정치가는, ‘여러 사람이 현명하지만, 자신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자였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시인은 ‘지혜가 아니라 비범한 재능과 영감으로 시를 쓴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역시 현명한 자는 아니었다. 다음에는 장인들을 찾아갔으나 똑같이 실망했을 뿐이었다. 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신은 신탁을 통해 인간의 지혜란 가치 없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는구나. 소크라테스란 특정인이 아니라 단지 소크라테스란 이름을 사례로써 들면서 이렇게 말하려 한 것이구나. ‘오, 인간들이여,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지혜가 사실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바로 가장 현명한 자이다’
소크라테스는 확실히 그리스의 사상가·작가·예술가의 모든 업적에 정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라 하더라도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알고 있는 것도 무한한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점을 깨닫게 된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올 것이다.
30년 농사를 짓는 40년 지기가 있다. 비닐하우스 15동에 딸기, 수박, 부추 등을 재배해 소득도 꽤 높다. 술, 밥 간에 신세를 많이 진다. 귀농 뉴스가 심심찮아 친구에게 시골로 와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도시 출신 초짜 농부들의 성공 여부를 물은 적이 있다.
“1-2년차에는 거의 성공한다. 그러나 3년차에는 대부분 실패한다. 왜 그런 줄 아나? 1,2년 차에는 30년 이상 비닐하우스 노하우를 가진 우리 조언을 곧이곧대로 듣고, 들은 대로 하거든. 한데 3년차쯤 되면 이젠 자기가 더 잘 안다, 며 우리말은 들으려도 하지 않고, 자기 요량대로 거름 주고 농약을 치거든. 가방 끈 길고 한때 도시에서 잘 나간 치들이 더더욱 자신만만해 하지. 결과는? 열에 팔구 명은 말아먹는다.”
*참고 문헌. 이윤은, 『육조 혜능평전』, 동아시아 / 버트런드 러셀·서상복, 『서양철학 사』, 을유문화사 / 윌 듀런트·임헌영, 『철학 이야기』, 동서문화사
(곧 후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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