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수(高手)

조송원 승인 2018.09.07 17:09 | 최종 수정 2018.09.10 09:34 의견 0

“사업을 포기하기로 했어.” 친구는 허심하게 말했다. 천만 뜻밖이었다. 두어 달 전만 해도 인생 2막을 괜찮은 사업으로 활짝 열었다며 흥분하던 그였다. 하동호가 바닥의 맨살을 부끄럼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겨울 가뭄 탓이다. 1월의 산바람이 매섭다. 방향 없이 이리저리 몰아친다. 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하동호 둑길을 걷다가 목을 움츠리며 되짚어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이 친구에게는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이 하동호 깊이가 얼마인지 알아?” 친구가 종이 커피잔을 두 손으로 보듬어 쥐고 물었다. “전망대 교각의 눈금을 보니 98m인가, 아무렴 한 100m는 되겠지.” 내가 대답했다. 친구는 씩 웃으면서 나로 돌아다봤다. 그리고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말했다. “보통 다 그렇게 알아. 교각의 눈금이 호수의 깊이를 표시하는 줄로 알지. 그러나 그 눈금은 해발을 표시하는 거야. 하동호 바닥의 해발이 확실히는 모르는데 아마 94m일 거야. 그러므로 갈수기인 지금 하동호의 물 깊이는 아마 4~5m인 셈이지.”

5년 전 친구는 대처에서 귀향했다. 나는 군대생활 말고는 객지 생활을 한 적이 없다. 비닐하우스에 수박, 부추, 상추 등을 재배하며 그럭저럭 살림을 꾸리고 있다. 친구는 귀향 1년차에는 예초기며 분무기를 내게 자주 빌려갔다. 그러나 어느덧 나만치 농사꾼이 되었다. 나처럼 종일토록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전이면 오전, 늦은 오후면 오후, 하루를 구분하여 절도 있게 농사일을 했다. 물론 벌어 놓은 것이 있으니 나보다 절박하지는 않겠지.

작년 9월 말 친구가 불쑥 명함을 내밀었다. <(주)청정석면환경-석면 해체 및 제거>. 대표이사에는 친구 이름이 박혀 있었다. 시골 전통 가옥은 거의 스레트(슬레이트. slate)로 지붕을 이었다. 예전의 초가지붕을 새마을 운동으로 지붕개량을 한답시고 짚을 걷어내고 스레트로 지붕 단장을 한 것이다. 이 스레트는 평면이 아니고 물결처럼 골이 있어 삼겹살 구워먹기 딱 제격이었다. 가족모임이나 회식 때 불판으로 이 스레트를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스레트의 재료인 석면이 발암물질이라는 게 밝혀져 전면 제거 작업을 하게 되었다. 시골의 지붕 스레트는 정부가 권장한 것이므로 책임을 인정하여 무료로 스레트 제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는 ROTC 선배로부터 이 회사를 인수했다. 선배는 건강상 사업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수익이 괜찮은 반면, 경리 여직원 한 명만 있으면 되고, 철거 작업할 때 인력시장에서 인부를 부르면 되니까 관리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만두자니 참 아까운 회사였다. 그래서 아끼는 후배에게 안겨 준 것이다. 친구는 인수하고 나서 작년 10월부터 12월까지 시골집 여러 채 스레트 해체 및 제거 작업을 했다. 나도 친구 일에 나가 보통의 농촌 일당 1.5배를 받아 쏠쏠하니 용돈도 벌었다. 한데 그 사업을 포기한다니, 왤까?

“왜, 사업이 어려워? 별스럽게 힘든 일은 없어 보이던데?” 내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무슨 곡절이 있겠지. 그러나 그 곡절이 아픈 데를 건드리는 것이라면, 내가 꼬치꼬치 이유를 캐묻는 게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부러 무심한 척 물은 것이다.

“명색이 사업인데 성가신 일이야 없겠냐. 일반 농촌 주택은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러나 공공건물은 참 까다롭더구먼. 학교 건물 두 칸의 스레트를 걷어냈는데, 말도 마라. 환경부, 고용노동부 경남 지청에서 오라 가라 하더라고. 그뿐인 줄 알아. 학교다 보니, 또 교육청에서 이말 저말 하지, 되게 피곤하게 해쌌더만. 석면 몇 조각 흘린 것을 사진 찍어 고발까지 하더구먼. 검찰청 출입까지 했다네.”

그래, 그런 남모를 고민이 있었구나. 이해는 갔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어려움에 사업을 접는다는 게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업인데 누가 차려 놓은 밥상만 받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가 그게 다야?”

친구는 차문을 열고 찬바람 속으로 다시 나섰다. 하동호 둑길을 걸어갔다. 나도 따라 나섰다. 아까보다 겨울바람이 더 매서웠다. 한참을 묵묵히 걷던 친구가 돌아보며 말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죽음이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잖아.” 나는 뜨악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앞서 가던 친구는 바람이 들지 않는 옴팍한 양지쪽이 앉았다. 나도 곁에 앉으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굳은 표정이 밝아지면서 던지듯 “아들 위한답시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해서 사업을 접었다네.” 고 말했다.

아들 때문에? 친구의 아들을 나도 잘 안다. 지적장애인이다. 친구 내외와 아들과 내가 같이 가까운 데 놀러 간 적도 있다. 아들은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만, 그래도 부모가 항상 돌봐 주어야 한다. 친구는 언젠가 자기가 퇴직하고 난 후의 삶은 오로지 아들 위주로 일상이 돌아간다고 했다. 하여 다른 시골 동창들은 사교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친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냐고 입 싼 소리를 하는 치들도 없는 건 아니었다.

“사업을 잘해서 많이 모아둬야 훗날 좋은 시설에도 보낼 수 있지 않겠나?” 친구와는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라 대놓고 물었다.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를 정색하고 바라보다 하동호 너머 저 멀리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나도 네 말처럼 생각해서 사업을 시작했어. 한데 내가 어리석었어. 사업을 하니 신경 쓸 일이 많아. 시간도 없어 아들과 놀아주지 못해. 더한 건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아들에게 자주 막 화를 내는 거야. 아들을 위한다는 일이 뭔가 거꾸로 되었다는 자책이 들었네.” 친구는 회한에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말을 이었다.

“거창한 꽃 대궐 무덤을 지어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삶과 무엇이 다를까? ‘지금 여기서’ 아들의 삶을 챙겨주지 못하고, 내 죽는 날 좋은 시설에 보내준다? 이게 아들을 위한 길일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친구만 쳐다봤다. 애당초 친구는 내게 물은 것도 아니리라.

“작으나마 집도 있고, 논밭도 서너 마지기 있고, 연금도 150만 원 정도 나와. 사는 데 지장 없어. 이제 저물어 가는 삶, 아들 위하는 일만 남았는데, 같이 부대끼며 곁에 있어주는 생활보다 더 나은 게 있을까? 죽음이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네. 그러나 죽음을 낸들 어떡하겠는가? 그 이후의 일은 하늘에 맡겨야지.”

남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은 남 다른 혜안이 있다. 우리는 부나 명예 같은 눈에 잘 띄는 잣대로 사람을 쉽게 재단한다. 그 잣대는 아픔의 깊이를 잴 수도 없고, 그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혜안에는 관심까지 없다.

닦음이나 학덕을 쌓은 일도 없이 나이만 먹은 삶, 그래도 그 나이 듦이 조금은 쓸모있다고 느끼는 것은 너무 흔해 놓치고 마는 ‘삶의 고수’를 발견하는 기쁨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이지만 말이다.

<칼럼니스트·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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