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12>불교경제학, 행복에 이르는 길

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12>불교경제학, 행복에 이르는 길

김 해창 승인 2018.01.16 00:00 의견 0

불교경제학 내용이 담겨 있는 슈마허의 사후저작 『내가 믿는 세상』 표지.

E.F.슈마허의『작은 것이 아름답다』제4장의 제목이 ‘불교경제학’이다.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은 그가 1950년대 중반 미얀마, 인도 여행을 통해 불교에 큰 영향을 받은 데서 나온 것이라 본다.

E.F.슈마허는 경제학 위에 ‘메타경제학’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메타경제학은 파생과학으로 서구의 물질주의라는 메타경제학적 토대를 버리고 그 자리에 불교의 가르침을 수용하면 경제적, 비경제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지게 된다”며 메타경제학의 가장 윗자리에 ‘불교’의 가치를 넣어 ‘불교경제학’이란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슈마허는 불교를 선택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며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의 가르침도 이용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의 불교경제학에는 기독교, 특히 산상수훈과 같은 신약성경의 교훈도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E.F.슈마허는 사후 저작인『내가 믿는 세상』(1997) 제3장에도 ‘불교경제학’이 나온다. 슈마허는 ‘불교에서 해탈을 방해하는 것은 부(富)자체가 아니라 부에 대한 집착이며,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라면서 불교경제학의 핵심은 ‘단순소박함(simplicity)’과 ‘비폭력(non-violence)’이라고 말한다.

또한 재화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일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불교경제학은 최소한의 수단으로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임을 강조한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아 불교도의 생활이 단순소박한 것은 그 양식이 매우 합리적이고 결국 놀랄 정도도 작은 수단으로 충분한 만족을 얻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근대경제학이 소비를 경제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요소들을 그 수단으로 취급해 최적의 생산패턴으로 소비를 극대화하려는 것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티쉬 쿠마르와 『사티쉬 쿠마르』 한국어 번역서 표지.

『내가 믿는 세상』 추천사에서 녹색운동의 성자로 불리는 사티쉬 쿠마르는 슈마허가 불교경제학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슈마허는 불교경제학이란 제목의 책을 펴낸 뒤 수많은 경제학자 동료들이 “슈마허 씨, 경제학이 불교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불교 없는 경제학은 사랑 없는 섹스와도 같아요. 영성 없는 경제학이 당신들에게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지요. 그러나 내적인 충만함을 줄 수는 없을 겁니다. 영적인 경제학은 봉사, 동정심, 인간관계를 이윤이나 효율성과 같은 선상에 놓습니다.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고, 그것도 둘 다 동시에 필요하지요.”

또한 슈마허는 이러한 종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경제학을 불교경제학으로 이름붙인 것은 기독교경제학이라고 하면 서구사람들이 누가 관심을 갖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불교경제학은 1966년 슈마허가 주창한 경제학이다. 영국 정부 경제고문이었던 슈마허는 1955년에 당시 버마정부에 경제고문으로 초청돼 현지 방문했을 때 현지 불교도의 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불교경제학은 불교의 8정도(八正道), 그 중에서도 정업(正業)․정정진(正精進)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불교의 8정도는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正定: 바르게 집중하기)이다. 이 중 정업(正業)은 올바른 신체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살생·도둑질·불륜 등 잘못된 행위를 떠나 선행을 쌓는 것이고 정정진(正精進)은 올바른 용기와 노력을 뜻한다. E.F.슈마허는『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불교경제학의 기본이 단순소박함(Simplicity)과 비폭력(Non-Violence)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단순소박함이란 ‘소욕지족 무집착(少欲知足, 無執着)’, 즉 욕구를 줄이고 족함을 알고,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며, ‘최소자원으로 최대행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은 경제적으로 자리(自利)만이 아니라 이타(利他)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은 바로 행복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슈마허는 이를 위해 먼저 일(正業)의 역할과 내용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활용하고 개발하는 것이 우선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함으로써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그러면서 자연히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경제학에선 오로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외에 ‘공유해야 할 노동의 가치’가 배제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처럼 불교경제학은 방법적으로 단순소박함과 비폭력을 중시함을 안다. 적정규모의 소비는 비교적 낮은 소비량으로 높은 만족감을 주고,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압박감이나 긴장감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사회에서 자급자족적 삶을 하고 있는 사람이 세계 각국과 무역에 의존해 생활하는 사람보다 전쟁이나 분쟁에 휘말려 들어갈 소지가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슈마허는 비폭력과 관련해서는 수목을 존중하는 태도, 특히 나무를 심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동남아시아의 경우 경제 쇠퇴 원인으로 산림을 부주의하게 다루고 괄시한 것을 들 정도이다.

요즘 강조되는 지산지소(地産地消), 로컬푸드와 맥이 맞닿는다. 이러한 자연과 연결된 단순소박함과 비폭력 정신을 구체화한 것이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하도록 하겠지만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요구한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 아닌 인간과 연결된 고리로 생각해야 하고, 농업이나 임업, 원예 등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크고 강한 것이 더 좋다’는 물량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절제와 중도의 길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일과 여가를 분리해 추구할 것이 아니라 일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다른 종과 동등하며, 오히려 책임감을 갖고 다른 종에 대한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자연자원을 재생가능한 자원과 재생불가능한 자원으로 구분해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남용을 막고 자연을 약탈․파괴하는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경제학은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당연시하는 이기심과 ‘최대 이익의 추구’라는 두 원칙에 의문을 제시한다. 불교경제학은 신고전파 경제학을 넘어 원래 경제학의 목적인 ‘인류의 웰빙 실현’을 추구한다.

슈마허는 불교경제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은 ‘현대적인 성장’이냐 ‘전통적인 정체’냐 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할 문제가 아니라 개발의 바른 길(正道)을 제대로 찾느냐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와 일맥상통한다. 부처님은 오로지 한 가지 ‘괴로움과 그 괴로움을 끝내는 일’을 가르쳤는데 슈마허 차원에서 보면 괴로움이란 기존의 주류경제학에 집착하는 것이며, 그 괴로움을 끝내는 일은 주류경제학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본다.

불교경제학자인 태국 탐마삿(Thammasat)대학 아피차이 푼타젠(Apichai Puntasen) 교수는 ‘행복으로 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불교경제학(Buddhist Economic as a New Paradigm towards Happiness)(2007)’이란 논문에서 불교 차원에서 행복에 대한 해석과 이에 맞는 경제체제의 기능에 대해 밝힌다.

아피차이 교수는 불교의 웰빙이란 어떤 종류의 행복의 실현이 아니라 괴로움의 소멸 또는 감소와 더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에 불교경제학은 주어진 자원 하에 개인과 사회가 평화와 안정을 찾는 경제행위를 찾는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푼타젠은 이를 위해 슈마허가 언급한 지혜 즉 뇌의 능력으로서의 지식, 이성, 창조성이 생산요소 가운데 최고라고 강조했다.

법륜은 불교의 팔정도의 심벌이다(왼쪽). 법륜의 영어설명. 출처: 위키피디아

현실에서 불교경제학이 실현되고 있는 사례로 1970년대부터 GNP(국민총생산)보다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총행복)를 지표로 삼고 있는 부탄왕국에서 그 정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계적인 경제컨설턴트인 프랭크 딕슨(Frank Dixon)은 ‘GNH-지속불가능한 서구 경제체제 접근방식의 개선(Gross National Happiness-Improving Unsustainable Western Economic Systems' Approach)’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GNH의 시스템적 관점을 강조하고, 단견적인 사고를 배제하며, 자연의 지혜와 사회적 안정성을 강화한다.

국민총행복(GNH) 목표의 발전과 실천은 폭넓은 사회적 대화를 통한 목표 추진, 사회적 웰빙의 유무형적 관점에서 GNH 지표의 개발, 주어진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탄의 GNH 정책에 관한 박진도 충남대 명예교수의『부탄, 행복의 비밀』(2017)이란 책이 있는데, 특히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면 충분하다’는 부제가 달린 이유도 책을 읽다보면 이해가 된다. 불교경제학자인 부다페스트 코르비누스대 가보 코박스(Gabor Kovacs) 박사는 “불교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달리 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ary Scholarship)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기 위해선 심리학, 특히 행복학이나 좌절, 동기화이론, 그리고 자아의 신경과학, 경영윤리, 심층생태주의(deep-ecology)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도 이제는 경제학에서 행복, 사회적 웰빙을 이야기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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