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뜻밖의 귀촌(15)
고추가 익기 시작하자 아연 영순씨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농막에 도착하자말자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나서며
“희한하네. 올해도 내가 고추 따는 손맛을 보네.”
천진난만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고
“내 평생소원이 한나절쯤 고추를 실컷 따보는 건데 재작년까지 구서동에선 밭이 좁아 딸 기 없고 작년에 그 너른 밭은 고추농사를 실패해 딸 것이 없고 올해 어렵게 내 땅이라고 마련해서는 못 일구어 쪼깨 심고...”
아예 고추타령을 하며 바삐 손을 놀리는데
“당신 고추 따는 재미가 낫나, 고사리 꺾는 재미가 났나?”
화단을 만들어야 집안 꼴이 나겠다며 고추와 들깨를 심지 않은 자투리땅을 삽 하나, 괭이 하나, 호미하나를 들고 씨름하기 시작한 열찬씨가 묻자
“물론 산중의 고사리가 일일이 찾는 재미, 그러니까 풀 속에서 크고 살찐 고사리를 찾는 재미가 났지. 그렇지만 제가 농사지은 고추도 제 자리에 가만히 서있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지만 빨갛게 잘 익은 고추가 한 포기에 수십 개씩 달린 것을 보면 밥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를 것 같아.”
“혹시 할머니들이 손주 고추 만지는 그런 재미는 없고?”
“물론 있지. 이렇게 크고 실한 고추를 어디서 만져보겠어? 이 골치 아픈 영감아.”
“그럼 나도 손맛 좀 보게 고추나 좀 딸까?”
“택도 없는 소리. 내 손맛 보기에도 모자라는 고추를 당신이 왜 따? 당신은 거기서 곰처럼 돌이나 파소.”
하며 고추 골에 들어오지도 못 하게 했다. 그렇게 한 두어 소쿠리 고추를 따면 그대로 차에 싣고 연산동 집으로 가져가 잘 씻어서 아파트옥상에서 말리는 것이었다.
“첫 번째 두 근반, 두 번째, 네 근, 세 번째 두 근반... 이렇게 한 예닐곱 번 따면 스무 남은 근은 되겠지. 우리 김장은 우째 될 것도 같은데 슬비랑, 엄마랑, 성아랑, 울산에 백찬이 대름이랑 한 서른다섯 근만 되면 한이 없겠는데...”
못내 아쉬워해
“내년에는 하루 종일 고추나 따게 한 300포기 심어 고추 100근에 도전하지.”
“좋지.”
하고 죽이 맞을 때쯤
“아이고, 의논이 척척 맞네. 늙은 처형이 눈꼴시럽어서 못 보겠네.”
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던 미혜씨가
“제부, 밥 묵고 합시다. 내 돈 내고 묵는 밥, 그거 한 끼 동갑짜리 제부하고 같이 묵을라고 언양까지 올라와서 또 몇 시간을 기다리노?”
하며 재촉을 했다. 한번은 언양장터에서 가장 번창하는 곰탕집, 그러니까 옛날 소피국물집 아들이 하는 식당에서 소머리곰탕, 그것도 양이 많은 만 삼천 원짜리 특탕을 먹던 미혜씨가 아무래도 양이 부족한지 차마 숟가락을 놓지 못 하고 입맛을 쪽쪽 다시는 것을 보고
“처형, 적으면 한 그릇 더 시키소.”
열찬씨 말에
“나는 어데 여자 아이고 소(牛)뱅교? 안 그래도 아까 국밥 들고 온 아지매가 여자가 특 탕 시켰다고 흘낏흘낏 보던데.”
하고 씩 웃더니
“영순아, 니는 삐가리 눈물 같은 보통도 아직 몬따 묵고 홀짝거리네.”
하고 계산을 치르고는
“아아, 아쉽다. 명색 언양 와서 소고기도 실컷 한 번 못 묵고...”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영순아, 우리 간월계곡이나 어디서 좀 쉬었다가 배 꺼지면 가천린포크 가서 소고기 좀 묵고가자.”
“언니, 그러면 트렁크에 실린 고추가 뜰 건데.”
“니는 우째 자나 깨나 고추타령이고? 와 가서방이 잘 안 해주나?”
“마 가서방보다 일곱 살 많은 형부나 걱정하소.”
“그렇지. 우리 집은 인자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일요일이지.”
하고 마주보고 웃더니 기어이 명촌으로 다시 올라와 아직 장독이 없는 장독대에 고추를 널고
“언니야, 사람 많은 계곡에 가느니 잠시 청소하고 집안에서 자자.”
하고 벽에는 싱크대를 설치하다 그만 둔 자재, 천장에는 등을 달 전깃줄이 늘어진 어수선한 거실을 대충 치우고 폭 1미터에 길이가 2미터도 넘는 스티로폼 조각을 주워와 나란히 누웠다. 열찬씨도 서재방을 치우고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누우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영순아, 참 내가 집 팔았단 말 안 하더나? 우리 집 팔렸다.”
“진짜? 얼마에?
“9억5천만 원.”
“와아 잘 팔았네. 언니는 한 8억이나 8억5천 생각했다 아이가?”
“그래 마침 꼭 우리 집이 탐난다는 작자가 나와서 말이야.”
“그래. 계약은 했고?”
“그래. 집을 사는 작자가 개죽사발이 핥아놓은 것처럼 반질반질하게 생긴 아저씨가 채권장사 가방 같은 걸 들고 다니는 기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집을 한번 딱 보고 죽자 살자 덤비더니 계약한지 1주일 만에 바로 잔금을 치겠다고 안 하나? 계약은 이미 했고 모래 공인중개사사무실에서 잔금 치르면 바로 집이 넘어 간다 카더라.”
“그렇구나.”
“그런데 너거 형부가 잔금 치는 날 이 서방이 같이 좀 가줬으면 하더라.”
“와?”
“그렇게 큰돈이 오고가고 하는 것은 평생에 첨이기도 하지라 이게 제대로 되는 건지, 뭔 뒤탈은 없는 건지, 또 중개수수료 복비 주는 것도 그렇고 해서 사회경험 많은 이서방이 같이 가면 택도 없이 속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야.”
“그라지 뭐. 당신 알았지요?”
“아, 알았어.”
하고는 셋 다 잠이 들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열찬씨가 눈을 뜨자 아까 자기 전 처음 나오던 휴대폰의 노래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이 다시 나오고 있었다. 음악을 끄고 시간을 들여다보는 열찬씨에게
“제부, 일났는 가베. 영순아, 니도 일나라.”
미혜씨가 일어나더니
“벌써 오후 네 시 반이다. 밥 묵으러 가자.”
“벌씨러? 아까 점심 묵은 지가 얼마 됐다고?”
“한 시에 묵고 네 시 반이면 세 시간 반 지났다. 가는데 또 30분 걸리고.”
“아이고, 언니야. 우째 그래 묵는 거를 밝히노?”
“무슨 소리? 묵는 기 남는 기라 안 카더나?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 끼라고?”
하다 눈이 마주친 열찬씨와 미혜씨가 멈칫했다.
“와 그래쌓노? 언니 아직 말짱한데.”
“아이다. 췌장암은 고통 오기 시작하면 얼마 못 간다 카더라. 의사가 한 1년 산다 캤는데 벌써 열 달이 지났다. 일 년 하고 한 두어 달 더 버틴다 캐도 11월말, 12월초면 끝이 날 낀데 내가 이러다가 양력설이라도 씨고 한 살 더 묵을지도 모르지.”
“한살 더가 뭐꼬? 처형은 힘이 장사라 지난 번 자궁경부암도 잘 묵어서 이깄다 아잉교? 자, 밥이나 묵으러 갑시다.”
더는 말도 없이 셋이 차를 타고 경주방향 35번 국도를 향했다. 울산공단 옆에서 가죽점퍼가게를 해서 떼돈을 번 미혜씨와 남편 예소의씨는 한창 도심화가 진행 중이던 연산동로터리 요지에 땅을 사고 2층집을 짓고 처음엔 식당을 하다 그만 두고 남편은 40대지만 아내는 30대 후반인 이른 나이에 돈벌이를 그만 두고 그냥 즐기면서 먹고살기로 했다.
연산동 상가건물 말고도 집이 두 채나 더 있어 굳이 장사를 않더라도 집세와 이자로 먹고 살기에 충분했다. 자식도 아들 둘이라 크게 돈 덜어갈 일도 없어 남편은 친구들과 훌라를 치거나 주말에 관광버스를 타고 놀러 다니는 일로 소일하고 아내는 서예를 배워 여기저기 봉사활동을 하면서 청춘을 보냈다.
문현동에서 혼자 산지 오래지만 도무지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시어머니와 네 명이나 되는 시누이가 좀 신경 쓰였지만 미혜씨나 예소의씨가 집안행사나 돈이 들 일은 미리 알아서 처리하는 바람에 별 갈등도 없었다. 가장 큰 애로사항이 일정한 직업도 없고 제 때 결혼도 않고 그저 늙은 부모만 괴롭히는 세 남동생에게 끝도 없이 잔 돈 푼을 뜯기는 일이었고 사이비기잔지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허우대가 멀쩡한 사내, 서울의 여동생 진혜씨의 남편, 자식도 하나 없는 여동생의 남편이 수시로 경찰서나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바람에 어떤 때는 쌀집을 하는 양정 친정의 돈이, 어떤 때는 급한 대로 방패막이를 한 자기네의 돈이 들어가 남편보기가 민망했지만 남편 예소의씨는 일절 내색을 않았다.
공부를 잘 하는 큰아들이 삼성에 취직해 영국에 해외근무까지 하며 결혼을 해 아들딸을 낳고 잘 사는데 비해 공부에 취미가 없는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말자 여기저기 장사 일에 관심을 가지더니 마침내 자기사업을 한다고 나서서 여러 번 말아먹어 반듯한 건물 한 채가 날아갔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신용불량자가 된 둘째가 늘 맘에 걸렸지만 이제 자기명의로 된 건물이 팔렸으니 남편에게 세금 없이 상속이 가능한 6억을 뺀 나머지 돈 중에서 남편이 혼자 살 작은 아파트나 하나 사고 남은 돈으로 둘째의 신용불량도 해제하고 이미 몇 년째 동거중인 처녀와 식도 올려줄 참이었다.
차가 언양을 벗어나 직동리에 접어들자
“영순아, 거게까지 갈 필요 없다. 앞에 저 조그만 축산조합건물에 들어가자.”
“와? 거게는 많이 후질 낀데.”
“아이다. 고기는 겨우 한 고개 목구멍만 넘어가면 똑 같은데 저게 큰 데 가면 오늘이 일요일이라 고기 사고 자리나오는데 또 한 30분 기다려야 된다.”
“아이구. 그새를 못 참아서. 언니 뱃속엔 거지가 들앉았나?”
“마 시끄럽다. 묵는 기 남는 건데. 내가 얼마나 더 ...”
“...”
셋이 동시에 흠칫 놀라며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고기를 고르는데
“우리 언양국민학교동창들은 모임 때 보통 남자는 200, 여자는 250그람 잡고 고기를 사는데 우리도 한 700그람 사면 안 될까?”
열찬씨의 말에
“와 남자가 여자보다 적기 묵노?”
“남자는 술 묵고 떠든다고 소리 없이 묵는 여자 반도 잘 못 묵는다 아이가?”
“그래 언니도 있고 하니 한 800그라 사지.”
영순씨가 말하자
“무슨 소리? 장장골이 사람 셋에 1킬로는 되어야지.”
포장된 고기 세 도시락, 기어이 1,1킬로를 사고서야 미혜씨가 물러났다.
“가서방, 어서 잡소. 나는 우리 갑장이 고기 구워 술 한 잔 하는 기 제일 보기 좋더라.”
“아이구, 갑장도 한 점 하소. 나도 우리 갑장처형이 구워주는 고기가 제일 맛있더라.”
“아이구, 또 갑장타령이네. 저러다가 형부한테 들켜서 또 식겁을 한번 해야 정신을 차리지.”
고기를 통 못 먹는 영순씨를 빼고 갑장둘이서 거의 전쟁을 치르듯 악착같이 먹어대어 판이 끝났다.
이튿날 화단 만들 자리를 따라 주욱 땅을 파들어 가던 열찬씨가
“야, 이건 너무 심하네. 여기는 대 뿌리 빼고 방굿돌 빼니 흙이라곤 도무지 없네.”
마침 마당자리 마사토 위에 심을 잔디를 싣고 온 또식씨를 잡고
“이 사람아, 한 여름에 그 얇은 떼딴지가 살겠나?”
“그러게 말입니다. 비가 와야 될 텐데. 데크 앞에 폭 4미터폭으로 잔디를 심는 게 설계내용이라 안 심으면 준공이 안 난답니다.”
“알았다. 죽으면 진장에 가서 동네산소 길에 있는 진짜 떼딴지 떠다 심지. 그건 그렇고 저 축대끈티 좀 봐라. 정지작업 하라커이 말캐 밑으로, 밑으로 밀어붙여 우리 땅 끄트머리에는 대나무뿌리하고 방굿돌 밖에 없다.”
“예. 포클레인기사가 슬슬 밀다보니 그렇지요.”
“이 사람아, 자네가 업자고 사장이면 감독도 해야지.”
“예. 나중에 대뿌리 하고 돌 빼고 흙 채워드릴 게요.”
“아이다. 당장 화단을 맨들어야 되는데.”
“...”
“우선 화단의 윤곽이나 잡아야 집의 모양이 나고 준공도 날 거 아이가? 일꾼들 시켜서 저 모서리에 대뿌리 하고 방굿돌 치우고 흙을 채워라. 내가 화단 네 개를 구성하는데 거기가 두 번째 화단으로 대문입구라 제일 중요한 자리다.”
“예. 알겠심더.”
“그라고 하는 김에 바닥에 큰 돌 불거진 거는 미리 좀 빼라. 그냥 두면 나중에 내가 삽과 괭이로 판다고 생각해 봐라.”
“예.”
“큰 돌 뺄 자리는 내가 꼬쟁이 꼽아서 표시해 놨다. 저게 빨간 노끈 팔랑거리는 거 보이제?”
“아이구, 외삼촌 참 알뜰하기도 합니다.”
“그라고 돌 뺀 거 중에 되게 큰 거는 치우고 화단 쌓기 좋은 것은 마당 끝으로 좀 밀어놓고.”
“예. 알겠심더. 화단은 외삼촌이 직접 쌓게요?”
“그래. 그 기 돈이 백오십만원이나 든다면서?”
“예. 외삼촌 말씀은 맞는데 그러면 우리 같은 업자는 뭐 묵고 사능교?”
“허허 참. 그 기 그러나?”
이튿날 노랑머리 호동씨가 백호우라는 작은 포클레인으로 열찬씨가 말한 대로 대나무뿌리와 바윗덩이를 대문 건너 모서리 쪽 장영희씨 땅에 밀어붙이고
“외, 외삼촌 화단을 대충 어, 어디에 할 건데요?”
남이 안 물으면 하루에 세 마디도 안 한다는 사람이 말을 다 걸어
“그래. 호동씨 데크에서 4미터 띠우고 일직선으로 만들 거니까 돌덩이를 대충 그쪽으로 밀어붙여.”
“예.”
“내 말 잘 들으면 중신해준다 카는 거 잊지 말고. 이래 봐도 내게 노처녀 조카들만 여럿이 있다는 거 알제?”
“...”
말은 없어도 히쭉 웃는 것이 관심은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영순씨에게
“저 호동씨하고 진장에 조카딸들 하고 한번 전자보면 어떨까?”
하니
“택도 없는 소리. 누구 신세를 조질라 카요?”
“와? 호동씨 기술 있어 돈 잘 벌겠다 여자만 야무지면 살림 모으고 살지.”
“안 돼요. 진장에 큰 거는 지 성질도 보통 아니라서 시끄러워서 못 살 끼고 작은 거는 마음이 여리고 시근머리가 없어 남자가 하자는 데로 하면서 그저 눈물이나 찔찔 짤 거요. 그라고...”
“그라고?”
“너무 본데가 없어서 집안사람들한테 중신애비 욕 얻어먹기 마침하고.”
“저런!”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동씨가 부지런히 돌덩이를 밀어다 놓는 바람에 한 나절 만에 건물정면 화단의 전면이 완성되자
(흠, 제법인데. 내가 진작 이 길로 나설 걸 그랬나?)
무거운 돌로 화단 둑을 쌓은 것이 움직이는 것이 힘들 뿐 사이사이 작은 돌로 받침돌만 넣어주면 잘 견뎌 생각보다 쉬운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신이 나서 맞은편을 쌓아가는 열찬씨를 보며
“외삼촌은 연금도 많이 나온다면서 이런 거까지 하면 우리는 굶어죽으라고요?”
연변 할아버지가 웃자
“외삼촌, 이런 거 언제 배웠어요? 노가다 하는 나도 한번 안 해본 일인데.”
또식씨도 웃었다.
“야야, 이 한여름에 여다 뭐를 숭굴 긴데?”
구경 온 금찬씨가 하는 말에
“글쎄...”
“아 맞다. 니 김장 심을 땅 없다고 난리더마는 배추는 밭에 숭구고 무시는 여 숭구면 되겠다.”
“뭐. 그라든지요.”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