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35. 무식과 술녀

나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어느 곳에도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본다.
나는 아무 것도 듣지 않지만 모든 것을 듣는다.

이렇게 아래 것들한테 말하고 다니며
나는 그야말로 신적 권력을 만끽했어.

아무나 권력을 누릴 수 없다네.
권력을 준다고 해도 권력을 감당못하네.

나는 권력재능이 엄청난 권력천재였지.
세상이 온통 자기를 중심으로 도는 줄 아는
중2병 환자 스타일이 권력을 다룰 줄 알아.

존경하는 나폴레옹을 본따 초호화 황제대관식을 올렸지.
아내가 많았으니 자식들도 많았지.
아버지인 나도 그 수를 다 헤아리기 힘들어.
대략 100명 가까이 될지도 몰라.
나 이래봬도 씨를 가장 많이 뿌린 남자야.

근데 그게 내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이라면 업적이야.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저렴한 권력욕으로 나라를 망쳤어.
그래도 내 후배들이 날 잘 봐줘서 살 만큼 살았어.

무식이 내가 여기서도 뭔 폼을 잡고 싶은데 그래봤자.




얼굴허연 놈들만 보면 난 여기서도 치가 떨리네.
그 놈들은 우릴 그냥 얼굴검은 짐승으로 여겼어.
우리 씨를 말살시켰지. 나쁜 놈들, 쳐죽일 놈들.
난 우리 민족의 마지막 인간이었어.
그래서 날 희귀동물로 보존하며 살려두었지.
내가 죽었을 때 그 놈들은 나를 해부하더군.
내가 사람 아닌 동물임을 증명하겠다며.
그 놈들은 화장시켜 달라는 내 유언마저도
듣지 않고 날 박제해서 박물관에 전시했어.

피부색 다르다고 인간들끼리 어찌 그럴 수 있지.
그 놈들이 우리한테 저지른 잔혹한 패악질은
호모 사피엔스 출현 이래 인류사 최악의 범죄였어.

그럼에도 그 놈들 얼굴허연 후손들은
우리가 살던 섬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우아한 척 고상한 척 점잖은 척 다하며.

우릴 죽인 얼굴허연 그 놈들에 대한
심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아! 우리로선 도무지 역부족이야.
한 명도 살아있지 않은데 뭘 할 수 있겠어.
할 수 없으니 그냥 용서해야만 할까?

나 술녀는 여기서도 구원이 풀리지가 않아!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