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vimeo(by Apefit)
장미는 이유를 모른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장미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누가 자기를 보는지 묻지 않는다.¹⁾
‘두두두둑, 두두두둑’, 또 시작했구나. 층간 소음이다. 새벽 두 시, 꽉 막힌 시내의 자동차 경적소리보다 더 신경을 긁는다. 콱 잡아 죽어버려? 그러나 잡을 능력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한다? 황금 같은 시간대를 궁리에 할애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턴가 내 서재 더그매(지붕과 천장 사이의 빈 공간)에 쥐가 무단 입주를 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휘젓고 다니는 소음으로 짐작컨대 최소 일가족이다. 나 역시 지구에 공짜로 집짓고 사니, 쓰지 않는 공간에 쥐들이 삶터를 잡은 데 대해 별 나무랄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조용히 서로 간섭 없이 공존하면 좋으련만 내 즐기는 고즈넉한 때에 왁자지껄하니 활동을 해대니, 부아가 치민다. 놈들은 야행성이다. 나도 야행성이다.
1년 여 집을 비웠다. 그러자 고양이도 떠났다. ‘내 것’으로 키운 건 아니지만, 삼이웃을 돌며 배를 채우는 길고양이들로 득실거렸다. 더러 방문 앞에서 야옹대는 뒤처진 놈들에게는 부러 잔반이나 비린내 나는 먹이를 챙겨주곤 했다. 그때 쥐는 정말이지 쥐죽은 듯했다. 내가 떠나고, 길고양이들도 내 집에 걸음을 하지 않자 공터가 된 너른 집안을 쥐들이 독차지한 것이다. 집주인이 다시 들어앉은 지금에도 아랑곳없이 이처럼 새벽에 더그매에서 독판을 치며 난장을 떨고 있다.
예전에 학교에 있을 때, 가족이 사는 아파트와는 별도로 산 밑 조용한 곳에 방을 하나 얻어 서재를 꾸린 적이 있었다. 조용한 것까진 좋은데 개미들이 떼 지어 침노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집단지성을 이용하려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개미퇴치법에 대해 물었다. 한 학생이 ‘에프킬라’를 치면 개미를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어깨를 으쓱이며 알려주었다. 그러나 듣고 싶은 방책은 아니었다. 죽이는 방법은 나도 안다. 죽이지 않고 퇴치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아마 개미들이 드나드는 벽과 방바닥 사이의 틈새에 소금을 뿌려놓은 것으로 해결한 성싶다.
그렇다. 답은 에프킬라다. 천장 베이니어판에 자그마한 구멍을 내고 이 해충약을 더그매에 뿜어 넣으면, 날쌘 동물인 쥐는 죽지는 않지만 이사를 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새끼, 쥐새끼가 있다면? 성체는 강제이주를 시킬 수 있다손 치더라도 새끼는 죽이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죽어서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길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는 신경을 건드린다는 사소한 이유로 나와 평등한 이 지구의 세입자를 말살할 권한이 내게 있는 것일까?
선사시대 인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다지 중요치 않은 동물, 주변 환경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고릴라, 반딧불이, 해파리보다 딱히 더 두드러지지 않았다. 현생종들 중 우리와 가까운 친척으로는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이 있고, 가장 가까운 것은 침팬지다. 불과 6백만 년 전 단 한 마리의 암컷 유인원(꼬리 없는 원숭이)이 딸 둘을 낳았다. 이중 한 마리는 모든 침팬지의 조상이, 다른 한 마리는 우리 종의 할머니가 되었다.²⁾
이런 생각 저런 궁리 끝에 에프킬라는 대안에서 제외했다. 자연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개입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하여 자연의 섭리에 맡기기로 작정했다. 고양이를 키우는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고양이 새끼가 있으니, 가져가라고 한다. 곧장 농어촌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 쥐의 천적을 모시러 갔다. 있긴 있었다. 서너 마리가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볼쏙거린다. 그런데 생후 1개월 된 조막만한 게 도저히 잡히지가 않는다. 없는 것과 진배없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농어촌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하다. 내 조용한 시간에 파문을 일으키는 저 쥐들의 준동을 얼마나 인내할 수 있을까? 에프킬라로 강제퇴거시킬 수도 있고, 더그매로 통하는 틈새에 쥐약을 놓거나 쥐덫을 설치해 잡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데에는 그만한 자연의 섭리가 있다. 내가 모를 뿐이다. 하여 지구의 동반자를 간단히 처치해버림은 어쩜 자연에 대한 죄악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나도 쥐도 지금 이곳에 살고 있음은 아주 경이로운 일이다.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역사에서 생물의 멸종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사건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 지구에는 약 5백억 종의 생물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지구에는 약 170만 종의 생물이 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종 가운데 99.99%는 멸종한 셈이다.
쥐과와 사람과가 속하는 저 쥐(쥐과)와 내(사람)가 누가 더 오래 살아남아 지구의 주인행세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과거로부터 판단한다면, 우리는 현존하는 어떤 종도 먼 미래에 변하지 않는 자손을 남기지 못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종들 가운데 훨씬 더 미래까지 어떤 종류든 자손을 남기는 것은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이 체계적으로 분류되는 방식을 보면, 각각의 속의 대다수 종과 많은 속의 모든 종이 자손을 전혀 남기지 않고 완전히 멸종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³⁾
또 쥐가 ‘두루룩’거리며 난장질을 해대는 천장에 방 빗자루로 몇 번 치니 쥐죽은 듯 조용하다.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결심을 굳혔다. 지인의 고양이가 또 새끼를 낳을 때까지 더그매는 쥐들의 운동장으로 완전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왜 이런 결심을 했을까? 나도 모른다. 다만 그래야 함이 뭇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 대한 예의일 것 같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 라는 물음에, 에크하르트(Meister Johannes Eckhart, 1260?~1327)는, 전통신학에서처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혹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라고 대답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⁴⁾
※1)안겔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 독일 바로크시대의 신비주의적 종교시인. 2)유발 하라리/조현욱 옮김, 『사피엔스』(김영사, 2017), 20~22쪽. 3)스티브 존스/김혜원 옮김, 『진화하는 진화론』(김영사, 2008), 596쪽. 4)희망철학연구소, 『세상을 바꾼 철학자들』(동녘, 2015), 100~101쪽.
<칼럼니스트·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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