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주요 생산이 논밭, 산야에서 이뤄지던 시절은 한참 지났다. 밥상이 땅의 산물로 차려지지만, 지금 우리는 어디 밥상에 구애되는 삶을 사는가. 하여 ‘풍성한’ ‘오곡백과’ ‘결실’이란 말은 추석과 유리된 공허한 단어들이다.
더구나 음력 7월 말에 벌초하며 성묘까지 마친 마당에 추석 차례도 농경시대만큼은 제 구실을 못한다. 그러므로 시골에 터 잡고 살지만 오곡을 가꾸지 않고, 일가一家의 직계에서 비껴선 나에게 추석은 매년 산 그림자처럼 다가왔다가 밤손님처럼 기척 없이 사라진다.
사립문을 닫아걸까? 추석 연휴가 5일이나 된다. 5일 동안 사립문을 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립문 바깥에 있는 우체통에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을 꺼내려 나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사립 한쪽의 쪽문으로 드나든다. 어차피 나갈 데도 없고 누가 올 사람도 없는데, 아예 쪽문 닫고 빗장 걸어 스스로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함이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난 사람의 참한 면모가 아닐까.
“차로 모시러 갈까요?” “아니다. 내가 걸어서 올라갈게. 30분이면 족하다.” 연휴 첫날이다. 3년 후배가 전화를 했다. 막 고향에 도착해 면소재지 식당에 자리 잡고 있단다. 사립문을 닫으면 뭐하나, 휴대폰이 켜져 있는 걸. 역시 나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인간임이 여실하구먼. 휴대폰을 꺼서 책상 위에 두고 사립을 나설 때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맥주냐 소맥(소주+맥주)이냐 소주냐,에서 소맥으로 결정을 보고, 안주로 나는 삼겹살을 선택했다. 후배는 한사코 소고기로 하잔다. 가격 차이도 크고 나에게는 차라리 돼지고기가 몸에 맞다. 후배는 간만에 형님 모시는데 삼겹살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내가 삼겹살 선택을 겸양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가격이 예의의 위아래 가늠자가 되었을까? 이런 경우에 안주 갖고 승강이는 볼품이 사납다. 후배의 호의를 받아들임이 차라리 경우 같아 ‘모듬 소고기’로 낙찰을 봤다. 소맥을 한 잔 시원하게 단숨에 들이켜고, 핏기 막 가신 소고기를 잘근잘근 음미해 본다. 이 맛이 삼겹살과 어떻게 다른가. 삼겹살과는 별미이나 더 좋음은 모르겠다는 느낌에 옛날 생각이 나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훌쩍 40년 가까이 흘렀구나. 그때 나는 고향 면사무소 병사계에서 병무보조로 방위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방위의 큰 임무 중 하나는 병역 신체검사를 받으러 온 후배들을 읍내 초등학교 체육관에 있는 신체검사장으로 인솔하는 것이다. 방위 주제에 ‘인솔’이라는 용어는 과람하고 인솔하는 병사계 공무원을 보조하는 일이다. 하지만 고향 선배이다 보니 담당 공무원보다 선배인 방위 말이 더 잘 먹히는 수도 있었다.
신체검사는 이틀에 걸쳐 하는데, 둘째 날은 12시 이전에 끝이 난다. 그 당시 후배들이 거의 다 순둥이들이라 무탈하게 신체검사를 마쳤다. 후배 10여 명이 점심 겸 소주를 한 잔하자고 했다. 지금 같이 자리하고 있는 이 후배가 친구들을 선도했다. 모처럼 식육점으로 향했다. 그 당시에는 고기와는 친할 수 없는, 명절에나 수저를 댈 수 있는 생활 형편이었다. 고기를 먹으려면 작정을 해야 했다. 병역 신체검사는 너나 나나 부모까지도 작정한 날이다.
긴 이야기 짧은 소리, 왁자하게 떠들며 거나하게 마시고 거든하게 먹었다. 모두들 신체검사 행사에 참여한 덕에 호주머니들이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호기 있게 계산서를 요청했다. 계산서를 받아든 후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확인해 보니 짐작한 액수의 세 곱절 정도의 숫자가 쓰여 있었다. 일하는 아가씨를 불렀다. “계산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우리가 아무리 많이 먹었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닙니다.” 아가씨는 나를 살짝 노려보는 듯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쌩 돌아서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성을 내질렀다. “돼지고기가 아니라 소고기를 먹었잖아요.”
이미 불판을 한 번 갈았다. 소주병, 맥주병도 늘비하다. 일어설 때가 된 것이다. 후배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목에 묵은 빚을 갚을 기회를 달라며 고기 한 판을 더 주문했다. 약간 낭패스러웠다. 그러나 얼굴만 붉을 뿐 술기 없는 진지한 표정에 차마 뿌리칠 수는 없었다. 묵은 빚이라면 묵은 빚이다. 후배는 학창시절부터 나를 친형처럼 따랐다. 장남인 관계로 집안 대소사와 진로 문제 등을 모두 나와 의논했다. 내 자신도 앞가림에 겨웠는데 무슨 도움이 됐을까만, 하여튼 젊은 시절에 후배는 나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한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내가 귀향했는데도, 후배는 고향 걸음을 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형님, 사실 제가 피했습니다. 창피하다고 해야 할까, 쪽 팔린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가정불화로 힘들다 보니 고향에 와서도 형님이 있는 줄 알지만 피해 다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 사람아. 그깟 일로 용서고 자시고 있나. 그래 지금은 신수가 괜찮은데······.”
“예. 이제 깨끗이 해결이 났습니다. 그래서 마음먹고 이번 추석에는 일찍 왔습니다. 형님 찾아 옛날의 동생 노릇하려고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맘껏 한 잔 하입시더.”
어떤 해결이기에 깨끗한지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가정사야 당사자들의 몫이니 남이 이런 저런 군말을 댈 필요는 없다. 100년 묵은 동굴의 어둠도 촛불 하나면 순식간에 물러가는 법이다. 지난세월 서운했던 감정에 되레 내가 미안해졌다. 아직도 나는 소인배이구나. 마음에 서운한 감정을 들어내니 그 자리에 혈육의 정 같은 추억이 들어앉았다. 후배도 빚을 일소하고 나니 소싯적 동생의 어리광이 뭉게뭉게 피워 올랐다. 우리 둘은 자리 옮겨 밤 이슥토록 노래방으로 가서 7080 노래를 목청껏 불러 젖혔다.
다음날 아침, 찻물을 뒤집어쓰며 샤워를 해 정신을 차렸다. 우선 휴대폰을 켰다. 사립문은 안중에 두지 않고 장갑을 끼고 마당의 잡초를 뽑았다. 오는 사람마다 사람 살지 않는 집 같다며 제발 제초제라도 뿌리라고 한 탓이 아니다. 사립문이야 열려 있으면 어떻고 닫혀 있으면 또 어떠랴! 올 사람은 올 것이고, 안 올 사람은 안 올 것이다. 구름이 오든 가든 저 산은 그대로이지 않은가. 마음의 문이 문제일 뿐이다.
마당의 잡초를 정성스레 뽑으며, 마음의 잡초를 뽑아내고 싶은 것이다.
<칼럼니스트·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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