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은둔 생활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중국의 소보와 허유이다. 요堯가 천자로 있을 때 허유에게 와서 천자의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허유는 친구인 소보를 찾아가 요임금으로부터 천자의 자리를 맡으라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소보가 하는 말이, “그런 말을 들었으면 너나 듣고 말 것이지 왜 그 더러운 말을 내게 해서 내 귀까지 더럽게 하는가?” 하며 시냇물에서 자기의 귀를 씻었다.
그때 번중보라는 사람이 소에게 물을 먹이러 시냇가에 왔다가 소보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으니까, 소보는 “허유가 천자를 하라는 말을 듣고 와 내게 옮겨 귀를 씻는 것이다”라고 했더니, 번중보가 “그 더러운 소리를 들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이지 않겠다”고 하며 도로 끌고 갔다는 얘기가 있지요.¹⁾
이름이 나는 게 요긴하다. 장소든 사람이든 간에 알려져야 사람이든 돈이든 꾄다. 하여 지방의 작은 군청도 고장을 알리려 무던히 애를 쓰고, 사람은 명함에 적을 표차로운 직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리라. 뿐 아니라 인지도와 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미한 시골 무지렁이도 자기 고장에 유명세를 타는 장소가 있으면 득을 보는 경우도 있다. 하동 송림은 객지에서 오는 객지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서는 제격이다. 웬만히 알려져 있고, 자동차 출입구가 한 곳뿐이라 헷갈릴 일도 없다. 주차장이 송림 진입로 끝에 붙어 있으니 기다리는 시선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약속 시각보다 10여 분 일찍 도착해 기다리는 게 습성이다. 한데 오늘은 30여 분이나 빨리 송림에 도착했다. 전화를 받고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나니,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바로 나서 버렸기 때문이다.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소나무 그늘에서 걷기도 하고, 백사장을 가로질러 섬진강물에 손도 씻었다. 시간은 기다릴 때 제일 더디 가는 법이다. 아직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벤치에 앉았다. 흰모래, 맑은 강물, 그 너머에 푸른 대밭, 그 위에 단풍 옷 입은 가을 산, 그리고 맑은 가을 하늘. 타지라면 한 폭의 풍광으로 손색없겠지만 익은 눈길에는 시틋할 뿐이다.
중얼중얼, 구시렁구시렁, 옆 벤치의 혀짤배기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수삼 년을 하동 터미널에서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고 하던 그 칠뜨기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꼽으며 뭔가를 계속 왼다. 딴은 염불을 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백사장에서는 방생법회를 막 마치고 스님과 보살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식사하는 데 가서 김밥 등을 구걸하지 않은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저 스님이나 보살들보다 신심이 올곧은지도 모른다.
호주머니의 천 원짜리 한 장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앉은 벤치로 가서 어깨를 툭 쳤다. 히죽 올려다보며 습관적으로 손바닥을 펴 내밀었다. 지폐를 놓았다. 낚아채듯 움켜쥐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빈손의 손가락을 꼽으며 종작없는 혀짤배기 염불에 다시 몰입했다. 방생법회 보살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합장도 염불도 없었다. 행락 모임처럼 보였다.
저 보살들과 칠뜨기, 누가 더 신심이 돈독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 화살은 정면으로 내 자신으로 향했다. 지폐의 촉감을 느끼며, 나는 이것이 없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다. 칠뜨기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맞는 판단이었을까? 돈의 쓸모와 가난의 정의란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의 물적 토대가 돈의 쓸모이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돈이 없어서 못한다면 가난한 것이다. 저 칠뜨기가 나보다 가난할까? 신문구독료가 석 달째 밀려 있다.
“김 주사! 자네, 반핑이(반편이)와 예서 뭐하는가?” 처음 들었을 때는 나를 호명하는 줄 몰랐다. ‘주사’라 했으니, 나일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어깨까지 짚자 고개를 돌려보니 박재달 씨, 아니 박 면장님이다. 물론 그가 나를 주사라 호칭하는 것과 내가 그를 면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피장파장이다. 그와 안면을 튼 지는 한 석 달쯤 전이다.
박 면장은 목욕탕 동지(?)이다. 생활 리듬이 비슷한지 일주일에 한두 번 가는 목욕탕에서 더러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한 달 티켓을 끊어 매일 목욕탕에 출근했다. 한 번은 욕탕에 둘이서만 마주 보고 목을 내놓고 있었다. 시선을 안 맞추려 멀거니 애먼 데 눈길을 주고 있자니 몹시 불편했다. 그는 나이가 나보다 20여 년 위로 그는 나를 몰라도 나는 친구의 삼촌이라 익히 안다. ‘면장님, 저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뚱한 얼굴을 환히 풀며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친구의 이름을 들먹이려다 문득 짚이는 데가 있어 꿀꺽 삼켰다.
친구에게 혈육의 정을 일절 베풀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귀향한 지 벌써 10여 년, 알 것은 다 안다. 친구에게 제 작은아버지의 험담을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알조다. 면장 이력은 있다. 예전 박정희 시절에 공화당 면책(면 책임자)였다가 ‘특별 사무관’인가 뭔가로 면장에 임명 받았다. 그러나 주민 여론이 하도 안 좋아 6개월인가 근무하다가 사퇴했다. 어쨌든 명색이 면장은 면장이었다. 생애 최고 직함을 죽을 때까지 달고 사는 우리의 관습에 비춰보면 ‘박 면장’이 맞다. 그러나 박재달 전 면장은 박재달 씨나 박 씨로 불리지 아무도 박 면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가 인심을 잃은 데는 부자이면서 너무 가난하게 행동한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 시절에는 양조장, 전두환 때는 주유소 등으로 돈을 벌었다. 우리나라 부자의 모범 답안으로 건물이며 토지 등 부동산에 돈을 묻어 뻥튀기로 불렸다. 이에 더해 천민자본가의 모범답게 악착스럽게 세를 받아내고, 날짜 못 지키면 야멸치게 내쫓았다.
더 가관인 것은 자신의 건물 식당에서도 밥 한 끼 사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주도 슈퍼에서 사서 집으로 직행할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다.
나같이 청빈(?)한 사람이야 ‘이스털린의 역설’²⁾은 그냥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다. 앞가림에 급급한 내가 박 면장에 느끼는 연민, 이 또한 역설이겠지. 목욕탕에서 만나는 그 누구도 그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인사를 드리고 ‘면장님’이라고 호칭했으니, 참 반가웠으리라. 그래서였을까?
“김 주사, 또 보네. 다음에 시간 되면 소주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 좀 하세. 자네 같은 말벗이 귀해서 말이네.” 세 번째인가 욕탕에서 만났을 때 박 면장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런 저런 얘기 중에 면사무소 병사계에서 방위 근무를 했다고 하니, 면장님이라고 불러준 데 대한 보답으로 높게 쳐줘서 동네 이장도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 ‘주사’라는 직함을 안겨줬다. 넓은 오지랖이 발동했다. “저는 술을 못합니다. 그 안 있습니까, 게이트볼 장 같은 데 가서 자장면 몇 그릇에다 소주 몇 병만 내면 말벗이 숱하게 있을 건데요.” “그래볼까?” 박 면장은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별 밝지가 않았다.
친구가 막 도착했다. 친구와는 송림을 산책할 형편이 아니었다. 송림은 만날 장소였을 뿐 애초 목적지 화개로 이동해야 했다. 박 면장은 벤치에서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게이트볼 장엔 놀러 가십니까?”
“응, 아직은 못 가봤네. 조만간 한 번 가려 하네.”
승용차에 오르자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에 ‘돈이 아까워서일까, 대우를 못 받아서일까?’고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 며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1)김석진, 『대산 주역강의(하경)』(한길사, 2005), 50~51쪽. 2)Easterlin paradox.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칼럼니스트·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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