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릴 때마다 한잔

조송원 승인 2019.06.28 00:24 | 최종 수정 2019.06.28 00:47 의견 0
杜甫

萬里悲秋常作客(만리비추상작객)
百年多病獨登臺(백년다병독등대)
艱難苦恨繁霜鬢(간난고한번상빈)
潦倒新停濁酒杯(요도신정탁주배)*

만 리 타향 나그네 늘 가을이 서러워
평생 갖은 병에 시달리며 홀로 누대에 올랐네.
가난에 찌들고 백발된 것도 한스러운데
늙고 병든 요즈음 탁주잔을 들고만 있구나.

옴인가, 감인가? 새벽, 기차의 도착을 알리는 여자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나오고, 이윽고 기적소리가 울린다. 이 철마는 그리운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일까, 데리고 가는 것일까? 이별의 이미지만 그려지는 것은 왜일까? 새벽의 쓸쓸함, 흔들린다. 흔들리니 한 잔 해야지. 새벽이니까 큰 잔으로 마셔야지.

우리 동네에 있는 역은 무인역이다. 역무원이 없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잇은 경전선의 경상남도 끝자락에 있다. 우리 동네 역, 곧 횡천역 다음이 하동역이고 그 너머는 전라남도 진상역이다. 이 경전선이 복선화하면서 좀 먼 데 있던 횡천역이 우리 동네로 이전해 왔다.

진주나 마산, 부산에 갈 일이 생길 적에 기차를 탄다. 요즘은 무궁화호라도 냉난방이 완비되어 있는 데다, 화장실이 있으니 버스 타는 것보다 편안하다. 요금도 버스보다 반 정도밖에 안 먹힌다. 아니, 공짜인 경우도 있다. 무인역을 이용하는 시골 사람들에 대한 국가적 시혜(?) 덕분일까?

부산행은 하루 네 번 있다. 첫차는 아침 6시 59분에 도착해서 7시 정각에 출발한다. 역무원이 없으니 차표를 끊을 수 없다. 기차에 타서 자리에 앉아 있으면 컨닥터(conductor. 차장)가 와서 차표를 끊는다. 한데 이른 아침에는 승객이 몇 안 되고, 컨닥터가 피곤한지 차표 끊으러 오지를 않는 경우가 세 번에 두 번이다. 목적 역에 내려서 출구를 통과할 때도 요즘은 검표를 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무임승차를 하게 되는 셈이다. 부정승차도 아니다. 한 날은 진주역에서 출구를 통과하고 나서 역무원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요금 2600원을 건넸다. 그 역무원은 씩 웃으면서 그냥 가시라고 했다.

하동군 횡천면 원곡마을의 횡천역.

석 달 전, 무임승차하여 공짜로 진주에 갔다. 시내버스 몇 번을 옮겨 타면서 볼 일을 마치고 나니 배가 허출하다. 점심시간에 가깝다. 짜장면 한 그릇하고 되짚어 돌아간다? 간만에 외출인데 뭔가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다. 두보도 <광부狂夫>에서 노래했지. ‘잘 사는 친구에게서는 서신이 끊어지는(厚祿故人書斷絶)’ 법이라고. 그렇다고 내가 외면하랴, 전화를 해야지. 다행스럽게 반가이 전화를 받는다. 내 있는 장소를 물으면서, 곧장 오겠단다.

“형님, 염색한 거 아니지요? 아직 머리칼이 새까맸네요. 제는 염색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짜장면으로 되겠습니까, 일식집으로 모실 수도 있는데.”

중견 건설회사의 이사인 고등학교 후배다. 살아가는 길이 다르고 삶터도 서로 어긋나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젊은 날 한때는 기회만 있으면 막걸리 잔을 밤늦게까지 기울일 만큼 친교가 막역했다. 후배의 마음씀씀이가 세월에 침식당하지 않음에 적이 고마웠다.

“헤이, 그러면 모처럼 탕수육에 빼갈 한 잔하자. 우리 예전에 호주머니에 몇 푼 들었을 때, 탕수육 안주에 빼갈 호기 있게 입에 안 털어 넣었나. 오늘 입호강 한 번하자.”

역시 빼갈은 입안이 불타듯 화끈거려야 제 맛이다. 좋다, 연발하며 석 잔을 연거푸 털어 넣고, 잔을 건네려니 후배는 아직 첫잔을 만지작거리고만 있다. 무슨 일이고?

“사실 술을 못한 지가 몇 년 됐습니다. 집 한 칸 장만하고, 자식들 학교 보내고, 이 자리 지키려다 보니, 술도 못 마시는 몸뚱이가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세월 다 허무합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고 남에게 아무 베푼 것도 없는데 내리막길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서글픕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술도 맘껏 마실 수 있는 건강이 있고, 아직도 책에 묻혀 사는 형님이 차라리 부럽습니다.” “이 친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노?”

“아까 형님이 공짜로 기차를 타고 왔다면서, 그 컨닥터를 우리 회사 직원이면 책임을 물었을 것이라고 했지요. 저는 그 친구가 직무태만을 저질렀다고 보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선행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의 2600원 손실보다는 시골 사람의 2600원 이득을 더 높이 치겠습니다. 평생 자신의 앞가림만 해 온 사람이라 마음이 이렇게 소심해졌습니다. 사람이 제 손해를 보면서도 남을 베풀 수 있어야 사람 아니겠습니까?”

젊은 날 이 후배가 심지 곧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야기가 묘하게 돌아간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 담론을 듣게 된 것이다. 후배는 대뜸 정약용의 가마꾼 이야기 정도는 형님이 알지요, 하고 물었다. 그야 뭐 내 즐겨 읽는 바이니 낯선 게 아니다. 후배가 왜 이 시를 꺼내는지 짚이는 것도 있다. 정약용은 <견여탄肩輿歎·가마꾼의 탄식>에서 하고자 한 말은 첫 두 구절이 아닐까. ‘사람들은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人知坐輿樂),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고 있네(不識肩輿苦).’

“형님, 제는 평생 토목쟁이로 살아오면서 공무원들에게 뇌물도 줘봤고, 그들과 어울려 잃어주는 내기 골프도 쳐봤습니다. 그런 떳떳치 못한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먹고 살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일개 토목기사로서 거대한 사회흐름에 묻혀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배는 빼갈 잔을 옆으로 밀어놓고, 맥주잔에 생수를 가득 채우고 벌컥대고는 말을 이었다.

“경전선 복선화 공사에 우리 회사도 참여했습니다. 우연히 귀동냥한 <가마탄>을 마음에 새기고, 공사에 조금도 빈틈이 없도록 성심껏 일했습니다. 가마 메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 쏟아 땀 흘리고 나니 뭔가 조금은 짐을 벗은 것 같아 참 개운했습니다.”

세상은 참 넓다. 아니, 참 좁다. 좁은 이웃에 스승이 있는 줄을 내가 몰라봤을 뿐이다. 마실 수 있을 때 안주 푸짐하게 곁들여 양껏 마시라며 부어주는 후배 잔을 마다지 않고 홀짝홀짝 털어 넣었다. 일상의 쳇바퀴에 켜켜이 누적된 정신적 권태가 일거에 가셨다. 마음은 개안開眼으로 도취하고, 몸은 술로 만취했다. 막차 버스나 기차가 아직 남아있는지 알 수가 없다.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몸과 마음이 대취한 탓으로 없는 거나 진배없다. 후배가 택시를 불렀다. 내일 아침 술 깨는 약까지 챙겨주며 택시 기사에게 잘 모시라는 당부와 함께 팁도 주는 모양이었다. 택시비가 10만여 원이나 될 터인데······.

꼬박 하루 자리보전하며 몸 고생을 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아직까지는 빈속에 깡소주를 마셔도 속 쓰림은 없다. 그저 기력이 쇠잔해 운신이 불편할 뿐이다. 엎치락뒤치락하며 후배의 말들을 되새김질해 봤다. 결국 인생의 노후를 결정하는 건 건강이다. 하여 ‘무병제일복無病第一福’이다, 란 말에 생각이 딱 꽂힌다.

앞뒤 좌우 어쨌건, 일단 잔병치레 없으니 복인福人임을 인정하자. 그래서 좀 더 긍정적으로 사명감을 갖고 책을 읽자. 그러나 마음 다져먹어도 새벽 기적소리에 마음 쏴-한 허전함이 밀려와 흔들린다. 그래, 흔들릴 때는 한 잔해야지. 새벽이니 더욱 큰 잔으로.

새벽 신신한 공기를 온몸으로 감각하면서, 마당가 상수도로 가 수도꼭지를 튼다. 우리 동네 상수도는 일급수이다. 정화수에 버금가는 현주(玄酒·무술. 제사 때에 술 대신으로 쓰는 맑은 찬물)를 머그잔 가득 담아 시원스레 마신다. 평생 술꾼이 어이 술을 마다하리오. 마는, 세월과 ‘해야 할 일’을 감안해, 술 종류는 바꿔야지 않겠는가!

※*두보杜甫의 칠언율시 <등고登高>의 제5연~제8연.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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