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운동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같은 점은 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노동을 하면 돈을 받고, 운동을 하면 돈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곧, 땀을 흘리되, 돈을 받으면 노동이고 돈을 주면 운동이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신문대금 등 정기간행물 구독료가 더 미룰 수 없을 만큼 꽉 찼다. 조심스런 독촉을 벌써 서너 번 받았다. 미안하다. 그러나 절독絶讀할 수는 없다. 농부아사침궐종자(農夫餓死枕厥種子·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그 종자를 베고 죽는다)라 했던가. 명색이 글농사 짓는 사람으로서 서책을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통장잔고가 비어 <민주언론시민연합> 정기후원금도 6월에는 내지 못했다. 바야흐로 돈을 받고 땀을 흘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일할 데가 마땅찮다. 읍내의 인력시장을 찾으면 일감은 매일 있다. 그러나 육체노동이 주업인 사람만을 원한다. 나 같이 일주일에 하루 이틀 부업으로 일하는 사람은 잘 써주질 않는다. 적어도 한 달 이상 장기근속(?)할 일꾼이어야 작업 계획에 맞춰 인력을 작업장에 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생 알음알음으로 일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매실농장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이 친구는 별로 돈 욕심에 아옹다옹하지 않음을 익히 안다. ‘규모의 경제’를 추구할 만도 한데, 대부분 가족노동으로 감당할 만한 소규모만 고수한다. 그래도 혹몰라 노동력이 필요한지를 물은 것이다. 그만큼 내 사정이 절박한 탓이었겠지. 아니나 다를까, 식구끼리 소화할 일거리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틀 후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매실씨 건질 일이 있는데 사흘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있다마다, 곧바로 전화해서 약속을 잡았다. 한 시름 놓고 나니 친구의 속내가 궁금했다. 없던 일이 벼락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 터, 일거리가 있는데도 친구에게 일시키는 게 껄끄러워 그저께는 피했던 것일까? 아니면, 글쟁이의 근력을 못 미더워한 것일까? 그렇게 계산 빠른 친구는 아닌데······. 어쨌든 오늘은 일을 같이 하자고 한 연유는 무엇일까?
내 거처와 매실농장까지는 약 20여리 떨어져 있다. 한 번에 갈 수 있는 버스 노선도 없다. 갈아타야 한다. 이래서는 일할 시간에 댈 수가 없다. 그래서 막노동을 하더라도 트럭 정도는 있어야 제 밥벌이를 할 수 있다. 나는 최악 조건의 노동자인 셈이다. 다행한 일로, 친구가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니 그나마 하루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은 단순하다. 모든 막노동이 으레 그렇듯, 오로지 근육만 필요할 뿐이다. 다만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일이 좀 까다롭다. 스테인리스강(stainless鋼) 용기에 매실을 설탕에 재워둔다. 매실을 발효시키는 것이다. 용도나 주문에 따라 숙성기간이 몇 달, 1년, 3년 등 다양한 모양이다. 매실발효액을 만들기 위해서는 숙성과정에서 매실즙 위에 둥둥 떠 있는 매실을 건져내어 매실즙만 용기에 남겨야 한다. 즙이 다 빠진 매실을 손잡이 달린 체로 건져서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버리는 작업이 내 일이다. 일을 하면서 어렴풋이 친구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숙성 기간이 각기 다른 용기가 수십 개 있으므로 매실을 건져 내는 작업은 얼마든지 완급을 조절할 수 있다. 내가 일을 부탁하지 않았으면 가족끼리 세월을 두고 작업할 수 있는 물량이었다. 내 궁박한 사정을 배려한 것이다. 고맙기도 하도 미안키도 하다.
친구는 서두는 법이 없다. 물론 일이라는 게 왈칵 서둔다고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이 일하는 친구 아들의 표정도 밝다. 시골 농사일을 해봤다. 부자지간에 일을 하면 더러 된소리가 나오곤 한다. 한데 이들은 시종 즐기듯 일한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아들은 식품공학과 출신이란다. 애당초 매실농장을 목적으로 한 학과 선택인 모양이었다.
친구는 부산대 조선공학과 출신이다. 대기업에서 설계 일을 하다가 나보다 먼저 귀향했다. 거의 20여 년 전에 귀향해 이 매실농장을 일군 것이다. 수재였던 친구는 내심으로는 서울대 농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단다. 그러나 농사일을 해서 먹고 살 도리가 없다는 부모님의 강권에 공학도가 된 모양이었다.
“규영아, <매실향기 시골원> 브랜드 파워가 상당히 세던데, 규모를 좀 더 키워도 안 되나? 가내공업 수준은 넘은 것 같던데?” 점심 후 커피를 들면서, 나무그늘에서 자연바람에 땀을 들이며 은근히 물었다.
“이 앞의 들판, 그리고 뒷산, 풀과 나무들. 겨울, 바람이 자는 한때, 모든 자연이 정지해 있는 것 같아. 시간도 흐름을 멈춘 듯한 고요를 느끼지. 이 고요, 적막이 좋아. 욕심과 그 평온을 바꾸고 싶지 않다.” 친구는 명상가의 그윽한 눈빛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야, 음풍농월은 인문학도인 내가 해야 되는 것 아니야. 공학도인 네가 꼭 철학자 같이 말하네.” 친구나 나나 60이 넘어도 치기는 의구하니, 공박 아닌 공박을 하며 같이 목젖을 출렁이며 크게 웃었다. 웃음이 그치자 친구는 예의 숙연 모드로 돌아가며 말을 이었다.
“송원아, 나는 개미를 보면 더러더러 하늘이 연상돼. 멈춰있는 개미를 본 적이 있어?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지. 그들은 뭘 바라 그렇게 부지런을 떨까? 우리는 개미의 운명을 알지. 개미가 개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늘, 곧 하느님 말이다. 인격신 말고 ‘자연의 이치’로서의 하늘이 우리를 내려다본다고 생각해 봐. 개미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내가 쇼펜하우어니 니체의 운명애(運命愛. 아모르 파티·amor fati) 따위를 주워섬겼다. 생소하다고 했다. 친구가 서양철학에는 조예가 깊지 않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천혜天惠를 감사해 하는 삶을 통해, 책 몇 권으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저 깊은 곳의 뭔가를 체득한 것 같았다. 철학이란 뭔가? 현학적 사변을 넘어서서 삶 속에서 얻고, 삶 속에 녹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삶의 진정한 길잡이로서의 제 본분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란 인격신이 아니고, ‘하느님’이란 자연의 이치를 믿는다면,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다하면 어떻게 될까?” 친구의 깊이를 가늠하려는 얄팍수는 결코 아니다. 어쩜 책에서 끌어온 박제된 겉꾸림이 아니라, 자연과 삶에서 길어 올린 통찰을 동냥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자연의 은혜에 감사해 하는 철저한 공학도네. 내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향유하는 삶이라도 내 자신이 의미를 만들어 가며 정성껏 살고 싶은 것뿐이다. 죽음? 그냥 ‘무無’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어조는 단호한데, 낯빛은 전혀 쓸쓸해 보이지가 않았다.
친구의 말을 곰곰 되새기니,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젠장맞을, 간서치(看書癡·책만 읽는 바보)의 습벽은 여기서도 영락없구나.
「내게 신앙이 있느냐고?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것을 믿을 자유가 있다. 그리고 내가 볼 때 가장 단순한 설명은 신은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서 나는 천국도, 사후세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오한 깨달음을 얻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증거도 없거니와, 우리가 과학을 통해서 알게 된 모든 것과 정면으로 맞선다. 나는 인간이 죽으면 먼지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안에, 우리의 영향력 안에,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유전자 안에는 지각이 있다. 우리는 이 지각을 가지고 우주의 위대한 설계를 감상할 수 있는 한 번뿐인 삶을 살고 있으며, 나는 이를 대단히 감사히 여긴다.」*
*스티븐 호킹/배지은 옮김,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Brief Answers to the Big Questions』(까치글방, 2019), 74쪽.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