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렐리의 2017베를린학생영화제 공식 작품 '아모르 파티(Amor Fati).
토마스 모렐리의 2017베를린학생영화제 공식 작품 '아모르 파티(Amor Fati)' 스틸 사진.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이 밟을 길이 되리니.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¹⁾

“삼촌이 어찌 ‘아모르 파티’를 알아요?”
“아니, 네가 어떻게 ‘아모르 파티’를 아니?”

공원묘원은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공간이다. 몇 개월 전 피안彼岸으로 가신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만큼 내 삶이 고달파서 그런 지도 모른다.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조카의 승용차를 타고 골분骨粉으로나마 영면하고 있는 공원묘원을 찾았다. 그리움은 회한으로 폐부를 찌른다. 왜 사대육신 멀쩡한 내가 엄마 가슴의 무거운 돌덩이로 얹혀 가시는 길까지 무겁게 했는가. 속내야 어쨌든 표정은 밝게 해 엄마의 마음을 가볍게 할 수는 없었던가. 바라건대 이제 레테의 강물을 마셔 이승의 근심을 망각하고 편히 쉬시기를, 아모르 파티!

굳은 표정과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던 조카가 ‘아모르 파티’란 내 신음 비슷한 발성에 즉각 반응했다. 삼촌의 어두움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 또한 놀랐다. 인문학부도 아니고 이공계 출신인데 니체를 알다니, 의아스럽고 대견한 마음이었다. 운명애(運命愛. love of fate)를 나름대로 이해하는 데에도 서양철학에 대한 상당한 공력을 필요로 한다.

“삼촌, 그 노래 요즘 인기예요. 중딩들도 김연자 할매를 ‘아모르 언니’라고 불러요.”
“뭐라고? 노래? 그런 게 있어?”

똥장군을 지기로 결정을 했다. 역시 궁즉통窮則通이다. 궁하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통하는 법이다. 고심을 했다. 벌써 나에게는 연말이다. 책값 고지서가 삭풍처럼 날아든다. 정기간행물 갱신 기간인 것이다. 줄이고 줄여도 꼭 봐야 할 주간지가 있다. 한데 수중에 가진 건 변소를 푸려 꼬불쳐 논 돈밖에 없다. 뒷간이 생리를 해결하려면 절박한 수준까지 차 있다. 그래서 궁리와 궁리를 거듭한 끝에 두 가지 난제를 한 방에 해결할 방도를 찾은 것이다. 내가 직접 똥장군에 분뇨를 퍼 담아 지게로 지고 동네 묵혀둔 뒷밭에 거름으로 살포하면 되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도 변소 퍼는 작업은 내가 도맡았다. 40여 년 넘게 잊어왔지만, 변소 퍼기, 까짓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청년 니체의 정신을 사로잡은 것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사상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이해했던 니체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가 건강하고 적극적인 염세주의를 구상한다. 지금 여기를 포기하고 해탈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여기를 인정하면서 모든 것을 발 아래 두는 사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니체는 강한 염세주의의 입장에서 허무주의nihilismus를 주장한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적인 문제와 관련한다. 끝장을 내는 결심으로서의 허무주의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감행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허무주의가 그것이다. 끝과 시작의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허무주의 사상이다.

새로운 시작은 하나의 끝맺음을 전제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치 전도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왔던 개념이 이제는 틀리다는 인식으로, 틀리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 지금부터는 옳다는 판단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가치의 전도만이 허무주의 도래를 가능하게 해주고,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해준다. 문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가 하는 것이다.

강자에게 허무주의는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약자에게 허무주의는 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가 필요하다. 강한 힘을 가지려는 의지가 있는가? 이것이 진정한 삶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힘은 권력의 다른 말이다. 자기 인생에 주인이 되어 주체적인 권력을 행사할 힘이 있는가?

'아모르 파티'로 제2 전성기를 구가하는 김연자.
'아모르 파티'로 제2 전성기를 구가하는 김연자.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면 누구나 운명을 안고 살아간다. 운명은 자기 삶을 이루는 원리이다. 운명을 거부하면 자기 삶을 거부하는 꼴이 된다.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다. 앞으로도, 후에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 원하지 않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감당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운명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필연적인 것이다.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라! 이것이 니체의 간절한 바람이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다.” 잠자는 시간 빼고 남는 시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 이것이 자기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자기에게로 되돌아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최고 비결이다.²⁾

삶과 죽음이 사람의 이편과 저편일 뿐이듯, 음식물과 배설물도 이쪽과 저쪽일 뿐이다. 이편과 저편, 이쪽과 저쪽은 더 큰 범주에서는 공존하는 실체이다. 사람 뱃속에 분뇨를 가지지 않는 이 없다. 생명현상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음식물을 섭취했으면, 응당 거기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 똥장군을 진다는 것, 참 유의미한 일이다.

시골에도 요새는 환경차를 불러 변소를 치우지, 직접 퍼는 사람은 없다. 지게까지도 거의 없다. 지게 지기에는 연만한 때에 똥장군으로 변소를 퍼야 하는 인생, 참 서글픈 일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들을 허비한 건 아니다. 데모니세das Dämonische³⁾에 씌어 한 길로 달음질쳤을 뿐이다. 책값을 분뇨 값으로 지불하고, 똥장군 지는 시간에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를 들으며 한가로운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냥 ‘생겨 먹은 대로’ 살자. 새 책을 매주 받아본다는 설렘이 어깨를 짓누르는 똥장군의 무게보다, 콧등을 찡그리게 하는 분뇨 향보다 더 큼을 어쩌랴. 아모르 파티!

※1)서산대사의 선시로 알려져 있으나,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는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의 「野雪」이 원전이라고 한다. 2)이동용, 「아모르 파티!」, 『세상을 바꾼 철학자들』(동녘, 2015), 243~253쪽. 3)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어 인간의 의지, 의향, 지성에 관계없이 인간을 어떤 행동으로 몰아가고 타인에게도 강한 영향을 주는 거대한 힘을 뜻한다(철학사전).

<칼럼니스트·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