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힘이 세다

조송원 승인 2018.07.05 16:29 | 최종 수정 2018.07.06 11:22 의견 0

나이 듦의 기준은 무엇일까? 근력보다는 머리를 쓰는 ‘뇌력腦力’이 우위를 차지하는 세태인 만큼 생물학적 나이는 절대적 기준일 수 없다. 나이가 잣대 역할을 못한다면 무엇으로 나이 듦을 잴 수 있을까? ‘헤어짐’이다.

수 삼년 전 고등학교 총동창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80대의 대선배가 축사를 하면서 자신도 이제 늙었다는 것을 고백하며 울먹임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직 고뿔로 고생한 적도 없고, 사업체를 운영하는 데 힘이 부친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하여 자신은 늘 정정한 소나무인 줄 알았다. 한데 해마다 동창회에 참석해 보면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씩 보이지 않게 된다. 올해도 빈자리가 채운 자리보다 많다. 곧 나도 저 빈자리의 주인이려니, 생각하니 늙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대선배의 회한은 여느 축사보다 감동적이었다.

“11시에 운명하셨다.” 형의 전화를 받았다. 믿기지 않는다. 머리로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청천벽력이었다. 영정을 고이 챙겨 40km 상거의 진주 모 병원 영안실로 가기 위해 시골집 사립문을 나섰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는지 동네 젊은 할머니(70대)들이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모친의 부음을 전했다.

“착하게 사시더니 가실 때도 참 고생 안 하시고 잘 가시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한 번 찾아나 뵐 걸······.” 잘 가셨다고? 그런가? 끝끝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해 본다.

어제 그러니까 엄마가 운명하시기 전 정확히 25시간 전에 엄마와 함께 형과 내가 고향 제법 큰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간만에 등심살도 구웠다. 엄마는 형이 얹어주는 고기는 마다하고 젓가락으로 푸성귀만 깨작거렸다. “이제 일할 염은 내지 마셔요. 연세를 생각하셔야지요. 기력이 한 달 전만 영 못합니다. 이제 시골집은 잊어버리셔요. 그냥 제 집에서 그냥 편히 쉬세요.” 안타까워하는 형의 근심에도 엄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옷가지를 챙기려고 온 참이었다. 엄마는 당신이 반평생 살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골집과 대처 아파트인 형네 집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러다가 올 여름은 시골집에서 지내겠다며 옷가지며 생활용품을 옮겨둔 터였다. 1927년생인 엄마는 허리만 기역자였을 뿐, 청력도 시력도 정신도 온전했다. 낮 동안은 나는 서재인 아래채에서 책을 읽고, 엄마는 텃밭에서 잡초 뽑고 고추, 토마토 등을 심고 잠시 동네 사랑방에서 젊은 할머니들과 어울렸다. 밤에는 나는 서재에서 글을 쓰고 엄마는 위채 안방에서 ‘옛날이야기 책’과 성경을 읽었다. TV를 새삼 마련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끼니 밥상은 엄마가 차렸다.

존재확인이었을까? 엄마는 텃밭 가꿈을 더없이 즐거워했다. 손수 마련한 시골집 건사에 몸수고까지 했다. 그러나 편하고 참한 며느리에게 봉양 받는 아파트 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시골집에서 여름을 나려한 이유를, 아무도 몰라도 나는 안다. 물론 일하는 즐거움도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인간은 ‘보람’ 없이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더하여 인간은 재미가 없으면 살 수 없는 호모 루덴스Homo Rudens이기도 하다. 하여 이미 또래들이 없어 젊은 할머니들과의 한담도 분명 삶의 원기였을 터이다. 그러나 그게 이유의 전부였을까?

몇 해 전 신도들에게 생불生佛로 칭송받는 한 승려가 교통사고 사망했다. 신도들은 한사코 교통사고를 숨겼다. 자기들이 섬기는 생불은 고작 교통사고 사망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고래로 고승들은 좌탈입망坐脫立亡을 했으니, 그 비슷하게라도 입적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앉은 채로, 선 채로 껍데기 육신을 벗어나는 도력道力쯤은 보여줘야 그간 생불로 추앙한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삶과 죽음을 쥐락펴락하는 게 도가 아니다. 삶과 죽음을 주무르는 것은, 도가 아니라 신비조화를 헛되이 바라는 망상가의 덫일 뿐이다. 특히 죽음은 지식이나 이론이나 생전의 업적과는 무관한 엄중한 삶의 결과이다.

수행에 철저한 스님이든 글줄 제대로 읽은 선비든 삶의 끝을 안다.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밥값을 할 처지가 못 되는 육신에다 정신까지 혼미해져 가는 때를 안다. 그러면 그들은 일정한 시점을 정해 물과 곡기를 끊는다. 그리하여 며칠 내로 육신의 한계를 조용히 벗어날 뿐이다.

점심을 마치고 엄마는 형의 차 뒷좌석이 앉았다. 차창을 내리고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마는 잡은 손에 힘을 주려 안간힘을 썼다. 안쓰러워 내 손을 살그머니 뺐다. 차가 스르르 미끄러져 나간다. 희미하게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엄마는 손을 흔들었다. 힘이 없어 보였고 웬일인지 울컥 눈물이 나왔다. 먼 데 가는 이별도 아닌데 말이다.

그날 밤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제 더는 네 밥을 챙겨줄 수 없겠다며 전에 없던 서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92살 먹은 엄마가 혼자 사는 환갑 아들의 끼니를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형 집에서 한 달 정도 요양을 하시고 기력을 회복하여 다시 시골집에 오셔야지요. 그래서 엄마가 심어 논 고추도 토마토도 따서 먹어야지요. 할머니가 외로우실까 봐 손자가 보내온 TV도 보고 한 달 전처럼 같이 옛날 노래도 부릅시다. 그래, 알았다고만 대답하는 말에 영 확신의 기미는 없었다.

아름다우면 충실하지 못하고, 충실하면 아름답지 못하다. 번역가들이 흔히 쓰는 푸념이다. 이에 빗대면, 삶을 좀 알려 책만 보니 돈을 벌 수 없고, 돈을 벌려 하니 삶을 알 수가 없다. 용심用心으로 몇 줄 읽었으나 삶도 알지 못하고, 책값 대기에도 변변치 못한 벌이의 나, 셋째 아들이 엄마 생명 줄의 마지막 지푸라기가 아니었을까?

만남이 일상이라면 젊은이다. 일상이 헤어짐이라면 분명 나이가 들었다는 표지이다. 나는 비로소 나이 들었음을 내 자신이 인정한다. 엄마와 영별했으므로. 언젠가 나도 가야 할 때가 있겠지. 헤어짐까지 없을 때, 아마 그때가 내가 가야 할 때이리라.

음택陰宅은 동네 뒤편 밭을 미리 마련해 뒀다. 한데 형은 공원묘원에 모시자고 했다. 교통편이 나빠 후손들이 돌보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래서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했던가. 먼 뒷날까지 고려한 원려에 고개가 숙여진다. 묘지명이 필요하다. 신문기자로서 필명筆名이 있는 동생이 나를 쳐다본다. 예우 차원이다. ‘엄혹한 삶, 슬기롭게 사신 분, 여기 잠들다(1927~2018).’ 형에게 보였다. 형은 기독교 신자다. 형이 다듬었다. ‘엄혹한 삶, 슬기롭게 헤치시고, 진리 속에 여기 잠들다(1927~2018).’ 그냥 묻힌 게 아니라 부활의 희망에 ‘진리 속’에 잠드셨다고 위로하고픈 형의 심정이 와 닿아 형의 손을 꽉 잡았다.

2016년 가을 큰아들과 함께 간 북천 코스모스 축제에서.
2016년 가을 큰아들과 함께 간 하동 북천 코스모스 축제에서 필자 어머니.

어머니시여! 가시는 날까지 눈에 밟혔던 환갑인 셋째, 끼니 제대로 챙겨 먹습니다. 적게 먹으나마 밥값은 하고 삽니다. 근심 다 내려놓고 편히 주무십시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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