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선기가 완연하다. 어둑새벽에 방문을 열면 찬기가 훅 느껴진다. 시절을 이기는 더위가 어디 있으랴! 머지않아 몸을 옹송그리게 하는 추위에 지난 무더위가 그립게도 되겠지. 그러고 보니 더위가 멈춘다는 처서가 지난 지도 한참이구나. 더위의 마지막과 풀과 나무 생장의 멈춤은 때를 같이 한다. 바야흐로 선영을 돌볼 때인 것이다.
때에 맞춰, 벌초하러 온다는 문자를 받았다. 부산 사는 장손이자 장조카에게서다. 집안에 두로 문자 사발통문을 띄웠다고 했다.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그래도 장손의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고맙다. 선영이 있는 고향에 거주하는 피붙이는 나 혼자뿐이다. 숙제 의식을 가지면서도 감히 나설 엄두를 못낸 게 벌초다. 직계라 봉분의 수효와 묘역이 만만찮다. 예초기를 다룰 수 있다면 그나마 요량을 대 볼 것이나, 기계치器械癡라 언감생심이었다.
제일 먼저 찾은 12대 할아버지 묘역에는 잡초가 우거져 봉분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매년 성묘를 하는데도 이 지경이다. 조상의 음택을 침범한 잡초를 탓하기에 앞서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찬탄이 나온다. 누가 돌보기는커녕 매년 허리가 동강나도 또 저렇게 꿋꿋이 자라 오른다. 그에 비하면 정말이지 인간은 온실 속 화초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어쩜 잡초들은 독립운동가인지도 모른다. 본시 자기 땅을 인간이 침탈한 것이지 않은가. 장조카는 예초기로 굉음을 울리면서 잡초를 척척 베어 넘기고 있다. 다른 조카들은 베어진 풀 더미를 낫으로 한 아름씩 안아 치우고, 깔쿠리(갈퀴)로 지스러기를 그러모아 치우는 등, 씩씩하게 묘역을 정리하고 있다.
내 할 일을 찾으니 대여섯 걸음 상거의 감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더 가지가 뻗으면 봉분을 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작년에도 가지를 베려다 그만 뒀다. 수령으로 보아 12대조가 심은 나무는 아닐지언정 조상들이 당신들의 무덤가에 ‘유실수를 심은 뜻’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대개 산소 주변에는 과일나무를 심는 법이다. 여기에는 예출어정禮出於情, 정출어근情出於近, 곧 예는 정에서 나오고, 정은 가까운 데서 나온다는 생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혈족이라 할지라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면 정이 생기지 않고, 정이 없으면 예(공경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조상을 모시는 데 고인의 얼굴을 아느냐 모르냐가 하나의 기준이 된다. 할아버지까지는 얼굴을 안다지만, 증조 고조 그 윗대로 올라가면 한 번 뵌 적도 없는데 그 자손 녀석이 알뜰히 돌볼 까닭이 있겠는가. 그래서 산소 근처에 유실수를 심어놓는다. 그 열매를 따먹으러나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왔으면 설마 거기 있는 조상의 산소 한 번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가까이하게 해서 정을 쌓고, 정이 쌓이다 보면 예도 나올 것임을 믿었던 것이다.¹⁾
선산에는 내 6대조부터 11대조까지의 산소가 모여 있다. 아버지 대에서 대대적인 산역을 한 모양이다. 예초기 한 대만 가져온 게 후회스러울 정도로 묘역이 넓다. 10여 년 전처럼 낫으로 벤다면 족히 솜씨 좋은 장정의 사흘 일감은 된다. 우리 조상들은 왜 이처럼 가신이의 흔적에 공을 들였을까?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않을 정도로 합리주의자였다. 하여 음택을 숭앙하는 관습은 전통적인 풍수사상에 기댄 것이다.
풍수사상이 일문, 일족이나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기복신앙적인 잡술로 전락한 부정적인 면이 많다. ‘산소 발복發福’을 믿어 조선시대에는 산송(山訟.묘지에 관한 송사)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면 타락한 풍수사상이 말하는 산소 발복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일까?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이다.
산소자리잡기 지술地術인 음택풍수는 동기감응론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동기감응이란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해가 땅에 묻혀 받은 그 땅의 지기地氣가 자식에게 전달된다는 믿음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는 자식에게 자신의 기를 전해 줄 수 있는가 하는 동기감응의 논리는 『금낭경錦囊經』에 비유로만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²⁾
눈은 게으르고 손발은 부지런하다. 그 넓은 잡초 밭이 깨끗한 공원으로 변모했다. 조카들 땀범벅의 덕분이다. 봉분 수대로 잔을 채우고, 절한 후 무덤 주변에 흩뜨렸다. 남은 술로 조카들에 조금씩 돌려 음복을 하게 했다. 조상의 음덕을 바라서가 아니라 땀 흘린 보람의 시간을 갖게 한 것이다.
최창조가 말하듯, 어차피 100년이 넘어 지기를 전해줄 뼈도 남아 있지 않고, 땅과 격리된 아파트에 사니 지기를 받을 일도 없다. 그러나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케 한 조상을 위해 땀범벅 몸수고를 했다. 발복과 상관없이 자신의 뿌리에 대한 기본 의무를 온몸으로 다하고 숙연히 산소 앞에 섰다. 조상의 가피가 아니라도 자신들 마음속의 후덕한 기운을 쐬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동네 아버지 산소로 왔다. 묘역을 넓으나 숲속이라 잡풀이 듬성하고, 어린 아카시아 나무 몇 그루가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다. 낫으로도 잠깐이면 끝낼 수 있다. 그래도 예초기를 사용했다. 장조카의 예초기를 멈추고 봉분만이라도 직접 낫으로 풀을 베어 낼까, 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뒀다. 어차피 ‘만들어진 전통’이다.
영국 왕실이야말로 현존하는 군주정 가운데 가장 화려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TV 방송들은 엘리자베스 2세가 고색창연한 마차를 타고 의회 개원을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향하는 모습을 중계하면서 한결같이 ‘천 년의 전통’을 되뇐다. 이를 보는 국민들은 새삼 왕실과 국가에 대한 존경심을 확인하곤 한다. 그러나 이처럼 거창한 왕실의례의 대부분이 천 년의 전통이 아니라, 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아마 허망해질 것이다.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각양각색의 격자무늬 천으로 만든 킬트가 태곳적부터 입던 옷이 아니라 18,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우리를 경악케 한다(중략).
홉스봄 교수는 이처럼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오랜 전통’의 허상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rituals),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전통의 창조’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문제는 그런 발명된 전통들이 역사와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시기 유럽에서 전통의 창조가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³⁾
10여 년 전 누구나 낫으로 벌초를 할 무렵에 예초기가 나왔다. 그 당시에는 예초기를 농사용으로만 쓸 뿐, 성묘하는 데는 사용하길 꺼렸다. 얼마쯤 지나자 묘역은 예초기로, 봉분은 낫으로 벌초를 했다. 좀 더 지나자 봉분도 윗부분만 남기고 예초기를 썼다. 이제는 낫은 예초기로 벤 풀을 치우는 데만 사용할 뿐, 예초기로 봉분의 벌초를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벌초해 주는 것만으로도 조상들은 감지덕지해야 할 판국이다.
지금 50~60대도 ‘국민학교’라 하지 않고 초등학교라 한다. 가을을 코스모스의 계절이라 한다. 9월 27일부터 하동 북천에는 코스모스 축제가 열린다. 전국적으로 꽤 유명한 축제로 자리 잡았다. 2007년에 시작했으니 10년 남짓 되었다. 이 코스모스도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신귀화식물新歸化植物이다.
아버지 산소를 끝으로 벌초는 끝이 났다. 모두들 햇볕에 얼굴이 벌그레해지고, 더러는 손발에 생채기가 나도 마음은 가벼웠다. 참석한 형제들, 조카들이 고맙다. 모두가 서로를 번갈아 보며 고마운 마음을 담아 웃었다. 현재로서는 아마 벌초의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 뿌리에 대한 상념을 자신들의 내부에서 들으며, 피붙이끼리 만나 우애와 친족의 정을 더 끈끈히 하는 것.
벌초는 끝났지만, 벌초 행사는 끝나지 않았다. 18홀만큼이나 19홀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각자 개인 짐을 챙겼다. 이리저리 편한 대로 짝을 맞춰 차를 타고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선영에서 멀어질수록 조상님들의 미소가 더욱 뚜렷해지는 기분 좋은 환상에 절로 입가에는 웃음기가 번졌다.
※1)홍일식,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정신세계사, 1996), 171쪽. 2)최창조, 『땅의 논리, 인간의 논리』(민음사, 1993), 119쪽. 3)에릭 홉스봄/박지향·장문석 옮김, 『만들어진 전통』(휴머니스트, 2004),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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