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용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호숫가에서 은퇴 이후의 삶을 보내기 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꿈을 이루지만, 불행하게도 그 삶은 매우 지겹고 불행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적인 지도자로서 존경받고 권력을 갖게 되길 바란다. 일부의 사람들이 이 꿈을 이루지만, 그에게 남겨진 것은 수많은 사건과 빈약한 지지, 비난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의과대학원의 한 친구는 하버드 의학대학원 약학과의 학과장 자리에 오르는 것이 자신이 가장 원하는 바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이혼했고, 자녀들의 사랑을 잃었으며, 심각한 질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를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스님이 어린 제자에게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어린 제자는 거침없이 답했다. “부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자 스님은 어린 제자의 옷깃을 잡고 냇물로 제자를 밀어 넣었다. 얼굴을 물속에 집어넣자 제자는 공포에 떨며 몸부림을 쳤다. 제자의 머리를 물에서 빼주면서 스님은 제자에게 다시 똑같이 물었다. 제자는 “공기요!”라고 외쳤다.¹⁾²⁾
‘그리움’에 매일 때가 있다. 한낮에도 사립문만 닫으면 절간이고, 밤에는 적막강산이 된다. 내 거처가 딱히 한갓져서라기보다는 농사를 짓지 않는 시골사람인 탓이다. 농촌 마을에서 농사일을 하지 않으니, 내왕할 일이 없다. 동네 연만한 분들은 내 정체를 모른다. 도대체 뭘 해먹고 사는지, 혼자서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어찌 견디는지, 다들 의아해 하는 눈치다.
낙향하기 전 대처에서 살았다. 학교에서 호구책을 마련했다. 곧 싫든 좋든 많은 사람과 교유交遊했다. 즐거웠던가? 본래 뚫어져 있던 가슴의 구멍에 찬바람은 여전히 쌩쌩 몰아쳤다. 그 찬바람이 너무 시려 몸 보전하려 태어난 시골 우거寓居로 피신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일상, 하여 사람멀미에 부대낄 일 없는 행복. 무명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데카르트 말을 실감한다. 허나 때론 호프집의 억센 왁자지껄함과 찻집의 가녀린 미소가 문득 그립다. 부여잡고 있는 마음 한 자락 놓치는 찰나, 고孤와 독獨의 쓸쓸함이 자유의 홀가분함을 압도한다. 이 순간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에 매이는 것이다.
새벽 두세 시쯤 눈이 떠졌다. 갈증으로 목이 바싹 타고 몹시 춥다. 찬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어제 저녁 군불을 땔 겨를도 없이 곯아떨어진 것이다. 페트병의 자리끼를 몇 모금 벌컥거리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뜬눈으로 어제의 일을 추적한다.
어제는 날씨가 너무 좋아 더욱 쓸쓸했다. 공연히 그 무엇인가가 그리웠다.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걸었다. 거창하게 자연과의 대화 따위는 내게 가당치 않다. 그냥 낯에 익은 둑길과 산야에 발자국을 찍을 뿐이다. 눈길에는 겨울 초입의 풍광이 잡히지만, 생각은 하늘 저 너머에서 논다. 시간여를 걸으니 면소재지 끝자락의 ‘할매칼국수’가 다리쉼하라고 꼬드긴다. 허출하기도 하다.
재주가 변변찮아 취미가 없다. 당구도 못 치고, 낚시는 생명에 관여하는 일이라 싫고, 바둑은 정직할 수 없어 익히다 말았다. 산행은 많이 했지. 하지만 지금은 무릎을 보호해야 할 나이라 삼간다. 있다면 오로지 술이다. 아주 가까이 있고, 쉽다. 특별한 노력 없이도 즐길 수 있다.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했던가. 마는 안다, 온갖 독 가운데 으뜸(백독지장百毒之長)일 수도 있음을.
칼국수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돼지국밥이 소주에는 안성맞춤이지만, 어쩌랴 꿩 대신 닭이다. 약이 아니라 ‘온갖 시름을 잊게 하는 물건’인 망우물忘憂物로서 마셨다. 그러나 ‘슬프면 술 퍼, 술 퍼면 슬퍼’란 시처럼 술은 쓸쓸함의 길동무이지만, 쓸쓸함을 해소할 권능은 없다. 술김에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고, 서너 시간 동안 서너 병을 마시고, 되짚어 걸어와 그대로 곤드라졌다.
춥다. 이불속에서 한껏 웅크려도 방바닥이 내 체온 덕을 보려 한다. 움직여야 한다. 방구들을 덥혀야 한다. 이불을 박찼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역시 오늘도 술 덕을 보는구나, 깨단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실외등을 켜고 군불을 때기 시작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평원을 달리다가 잠시 멈춰 영혼이 따라오길 기다린다는 말이 있다.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독살림을 한다. 그것도 산중 토굴생활처럼 아주 19세기적이다. 난방은 부엌에 군불을 지피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 어제처럼 술 마시고 찬방에서 자고 추워서 잠이 깬 날, 삶의 정직성 곧 삶의 무게를 비로소 절감한다. 소소한 일상인 내 방의 따뜻함, 이마저도 내 노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안온이다. 하물며 일생의 행복, 누가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자신의 ‘시간은행(Time Bank)’³⁾를 운영한다. 시간은행이란 봉사시간을 적립하고,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 때 그 시간만큼 꺼내 쓸 수 있는 제도이다. 시간은행에서는 노동의 존귀와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 의사가 1시간 진료봉사를 해도 1 시간화폐이고, 이웃집 아이를 1시간 돌봐줘도 1 시간화폐이다. 개인들의 능력과 처지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시간만큼은 1일 24시간으로 공평하다. 시간화폐가 가장 공평한 교환의 표준이 아닐까?
나는 ‘행복 빈곤층’은 아니나 가진 것은 적다. 간소하고 단출한 살림이라 필요한 것도 적다. 줄 것도 받을 것도 많지 않다. 그렇다고 생활필수품이 원만히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겨울에는 따뜻한 게 보배다. 땔감이 필요하다. 며칠 전 친구의 트럭과 기계톱으로 친구의 산에서 밤나무 고사목을 베어 한 차 싣고 왔다. 한 달 군불 감으로는 실하다. 3 시간화폐 빚을 졌다.
그제 친구가 감나무 옮겨심기를 했다. 밤나무 사이에 있는 5년생 감나무를 뿌리에 흙이 달린 채로 파내어 감나무 밭에 보식을 한 것이다. 관리의 편의를 위해서이다. 10그루가 채 안 돼, 놉을 대기에는 애매한 일감이다. 그러나 혼자서 감당하긴 벅차다. 내가 가서 도왔다. 3 시간화폐를 지불한 셈이다. 친구는 일 삯을 주려 했다. 땔감은 자기가 그냥 도운 것이고, 감나무 이식은 본격 일이니 삯돈을 줘야 한단다. 고마운 마음은 알지. 나는 웃으며 친구의 호의만 받아들였다.
“우리 나이에 돈벌이는 별 의미가 없고, 발전도 아니다. 어떤 발전으로 의미를 삼을까?” 일하면서 친구가 혼잣말처럼 말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친구는 돈에 대해서 담백한 편이다. 꼭 넉넉해서가 아니라 인생관이 그렇다. 난들 뭐 아는 게 있겠냐만, 짚이는 건 있다.
사회학자 뤼시앵 레비브뤌(Lucien Lévy-Bruhl, 1857~1939)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개인’들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다는 ‘전前 논리적 정신’ 이론으로 유명해졌다. 이 이론은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수용되었다. 그는 1938~1939년 여든이 넘은 나이에 『수고Carnets』라는 자서전에서 자신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이 이론을 가차 없이 반성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고 자기반성을 토대로 향후에 진행할 새로운 연구 계획을 수립했다.⁴⁾
나이 듦이 두뇌를 굳게 해 정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는 없다. ‘이제는 안 돼’ 하며 포기하는 순간, 머리는 정체되고 노쇠하기 시작한다. 의미든 앎이든 깨침이든 쉼 없이 추구하고 싶다. 그 추구 자체가 의미가 아닐까? 나도 여든이 되어, 가장 확신했던 오륙십 대의 ‘세상읽기’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 의식이 계속 발전해야 내일에 오늘의 잘못을 발견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런 ‘열린 넋’이고 싶다. 나아가 그 나이에도 추구를 멈추지 않고 싶다.
방 덥히는 군불로 펄펄 끓는 물을 떠다가 위채 목욕탕에서 세수는 물론 목물까지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정갈하다. 잃어버린 시간 벌충 일념으로 읽기며 자료 정리를 했다. 오전 10시경 아침 겸 점심을 먹으려 서재에서 식당 방으로 올라가니 누군가가 김장배추 한 포기를 투명 비닐에 싸서 상 위에 올려뒀다.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막 담근 김장 김치로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누군가가 내 일생의 서너 시간을 책임져 준 것이다. 그 누군가를 굳이 알려 할 이유는 없다. 할머니들만 있는 삼이웃, 모두에게 1 시간화폐 빚을 진 셈 친다. 우편물을 챙겨주든 무거운 장 보따리를 들어주든, 갚을 일을 꼽아본다. 시간 빚을 지고 갚음 과정에서 생기는 이웃 정은 이자이다.
곰곰 꼽아보니, 둘레에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빚을 많이 졌다. 시간화폐로라도 갚아야지, 하는 생각에 유일한 내 자산인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다.
※1)마이클 포셀, 「인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거지?」, 『최고의 석학들은 어떤 질문을 할까?』(웅진씽크빅, 2014), 318~319쪽. 2)마이클 포셀은 미시간주립대학교 의학과 임상교수로 노화 방지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다. 3)이봉현(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시간은행’ 창안자 칸 교수」, 『한겨레신문』, 2018년 11월 12일. 4)뤼시앵 세브(철학자), 「잘 늙을 수 있는 ‘평등사회’」, 『르몽드 인문학』(문학동네, 2014), 369쪽.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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