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나라의 악광이 하남 태수에 재임할 때의 일이다. 악광에게는 친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그 친구는 악광에게 자주 놀러와 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동안 친구의 발걸음이 뜸해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악광은 몸소 친구에게 찾아가 보니 얼굴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요사이 어째서 놀러 오지 않나”고 물었더니, 친구가 “전에 자네와 술을 마실 때 내 잔 속에 뱀이 보이지 않겠나. 그렇지만 자네가 무안해 할지 몰라 할 수 없이 그냥 마신 후 몸이 별로 좋지 않네”라고 대답하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악광은 지난 번 술을 마신 그곳으로 가 보았다. 그 방의 벽에는 뱀이 그려진 활이 걸려 있었다. 비로소 악광은 친구가 이야기한 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친구의 술잔에 활에 그려진 뱀이 비추어진 것이었다. 이후 악광은 친구를 다시 초대해 같은 장소에서 술자리를 같이 하였다. 친구에게 술을 따른 다음 “무엇이 보이지 않나”라고 물었다. 친구는 머뭇거리면서 술을 마신 다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뱀이 보이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악광은 그냥 웃으면서 “자네 술잔 속에 비친 뱀은 저 벽에 걸린 활에 그려진 뱀의 그림자이네”라고 말해 주었다. 악광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그제서야 마음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배중사영杯中蛇影·두산백과>
강아지가 없어졌다. 개줄까지 보이지 않는다. 더럭 강아지 덩치보다 큰 도둑고양이 서너 마리가 어슬렁거린 게 떠오른다. 그놈들에게 짖지도 않던 강아지가 당한 것인가?
후배가 대가족이 살던 너른 집터에 혼자 있는 선배가 허허로워 보였던지, 빈 공간을 좀 채우라고 사료 한 포와 같이 데려다준 강아지였다. 이 놈은 도통 짖지를 않았다. 눈길을 맞추면 흠칫 놀라며 피한다. 후배의 성품으로 봐 결코 강아지를 학대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정을 붙이려 다가가도 아예 범접에 기겁을 한다.
눈길은 피하고 손길도 싫어하니, 아침에 사료 주고 물통 씻어 채워주고, 똥만 치울 뿐이다. 동물을 별스레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개념은 없다. 다만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생명이니 존중해 줄 뿐이다.
비가 왔다. 개집이 부실해서 비가 들이치면 젖을까봐 본채와 동떨어진 헛간에다 매어놓았다. 뒷날은 갰다. 다시 개집으로 옮겨 줘야지 하다가 그냥 두었다. 날씨가 끄무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가보니 없어진 것이다. 분명 도둑고양이들한테 당한 것이리라.
난 지 석 달이나 되었을까, 이 강아지가 3년 이상 묵은 제 덩치보다 큰 도둑고양이 서너 마리를 어찌 당하리오. 발버둥 치다가 드디어 목에 이빨이 꽂히고,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나의 주의 태만과 부작위로 인해 한 고귀한 생명을 비명에 가게 한 것을 아닐까? 그렇다면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도둑고양이를 곡괭이로 때려잡아야 하나? 자연의 질서는 뭔가? 흔히들 인간과 자연을 대립시키지만, 기실은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개입함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일 뿐이다.
장자가 죽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싶다고 했다. 이에 장자가 말했다. “내게는 하늘과 땅이 안팎 널이요, 해와 달이 한 쌍 옥이요, 별과 별자리가 둥근 구슬 이지러진 구슬이요, 온갖 것이 다 장례 선물이다. 내 장례를 위해 이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져 모자라는 것이 없거늘 이에 무엇을 더 한다는 말인가?”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먹을까봐 두렵습니다.” 장자가 대답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 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다 주어 한쪽 편만 들려 하는가?”*
나 또한 차안의 마지막의 풍경을 그려본다. 장자처럼 호연치는 못할지언정 애착할 게 적으니 그만큼 하직도 수월하리라. 윤회의 주체가 사라지니 다음 생을 걱정할 것은 못 되고, 신神의 문제는 ‘인간의 역사’와 <신에 대한 신념의 정당화 문제>의 다음과 같은 철학적 논증으로 결말을 봤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 존재가 이용할 수 없는 증거를 통해 증명될지 모르나, 이 장에서 논의된 증거를 기초로 할 때, 합리적인 존재로서 우리가 내려야 할 결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또 그는 창조될 수도 죽을 수도 없기 때문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를 부린다(我使我). 내가 나를 부리지 못하면 남이 나를 ‘물들여’ 부린다(我不使亦使我). 묵자의 이 말을 몹시 좋아한다. 일부 사람들처럼 타인의 삶을 기준 삼아 물들어(동화되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삶이 더욱 안전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제 길 제 발로 걸으며 쓴 맛 단 맛을 감칠맛으로 여기고 장딴지에 힘을 주는 것, 호쾌하지 않은가.
한 친구가 더 늙으면 갈 데는 한 군데뿐이라는 말을 했다. 자슥, 그걸 누가 모르나, 땅속이지. 또 한 친구가 빈정거렸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단다. 요양원. 우리 모두 웃었다.
정녕 웃을 일인가? 나는 얼른 웃음을 거두었다. 독립독행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책도 없는 방에서 타인과 연명을 목적으로 지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래, 무장이 전장에서 스러짐이 무슨 흉이 되리오. 평생 글 읽기로 작정한 사람이 책을 빼내다 책장이 넘어져 책에 깔려 절명함이 ‘답지’ 않겠는가!
오후에 마당에서 볕을 쬐고 있는데 예의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어온다. 눈이 마주쳤다. 아 저놈이구나. 잡히는 대로 주워든 작대기를 휘두르며 내달렸다. 저놈도 냅다 도망질을 친다. 헛간을 지나 묵정밭으로 내달린다. 돌멩이가 어디 없나, 살피며 뒤따랐다. 그 순간, 깨갱. 강아지가 놀라 도망치려고 버르적거리고 있다. 개줄이 몇 년 째 묵혀둔 밭의 울쑥불쑥 자란 잡목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명색이 진돗개 잡종이라고 했던가. 고양이한테는 당하지 않는 모양이다. 덕분에 레테의 강을 건너는 상념에 젖을 수 있었다. 개집에 데려다 다시 매고 물통을 깨끗이 씻어 물을 채우고, 사료를 넘치도록 한 대야 퍼놓았다. 움츠리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을 맞추려 용을 썼다. 그래도 쳐다보지를 않는다. 그래, 아직은 신뢰할 수 없겠지. 네가 인간에 대한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 매일매일 쓰다듬어 주마. 언젠가는 마음을 열겠지. 덧정이 붙으려면 세월만이 약이 아니겠는가.
※*장자/오강남 풀이, 『장자』(현암사, 2002), 415쪽. **레러 외 2인/류의근 역, 『철학의 문제와 논증』(형설출판사, 1990), 446쪽.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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