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아직까지는 역시 설이다. 승용차가 웅변한다. 섣달그믐이면 한적한 마을의 빈터며 골목골목이 거대한 자연 주차장으로 변모한다. 젊게는 60대, 보통은 70~80대, 많게는 90대인 부모를 뵈러 객지 자녀들이 귀성한 덕이다.
그러나 설답지는 못하다. 고샅길에 때때옷 입은 아이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꼬까옷들의 재잘거림 대신 승용차 소음만 머문다. 그것도 끽해야 만 하루일뿐이다. 정월 초하루, 설날 당일에 해가 설핏하면 벌써 마을 앞 국도가 자동차로 붐빈다. 하룻밤 임시 주차장이 된 마을에서 듬성듬성 차가 빠져 나가는 것이다. 이윽고 설날의 어둠을 맞는 차는 그믐날 밤을 샌 열 대 중에 한 두 대꼴로 남아 있다. 기해년 첫날 밤 마을의 공터와 골목골목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과 적막이 주인일 뿐이다.
상주의 오복동五福洞, 대전의 식장산食臧山과 같이 지리산에는 청학동靑鶴洞이란 이상향이 있다고 전해진다. 민중의 소망이 깃든 이상향인 만큼 실존여부는 차치하고, 청학동이 이상향인 이유는 무엇일까?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이기 때문이다. 곧, 굶주림과 전쟁과 역병이 없는 땅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오이시디(OECD) 국가에서도 앞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이미 실현된 이상향이다. 한데 야반도주하듯 꼬박 하루를 채우지도 못하고 부모 곁을 부랴부랴 떠나는 자녀들을 보내면서 꼬부랑 부모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영국의 세계적인 빈민구호단체 옥스팜Oxfam에 따르면, 세계 최상위 부자 26명이 세계 하위 50% 인구(38억 명)가 가진 것과 맞먹는 부富를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2018년에 매일 25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세계의 최고 부자인 아마존 시이오(Amazon CEO) 제프 베조스Jeff Bezos의 재산은 1120억 달러이다. 그의 재산의 1%, 곧 11억 달러는 인구가 1억이 넘는 에티오피아의 전체 보건예산과 같다. 1980년부터 2016년 사이에, 세계소득증가 1달러 당 세계 하위 50% 인구가 12센트를 차지한 반면, 상위 1%는 27센트를 호주머니에 넣었다.¹⁾
부의 불평등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확실히 국제표준(Global Standard)을 선도한다. 부유한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부의 쏠림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상위 1%가 받는 급여는 하위 30%가 받는 급여 총액과 맞먹는다. 일하지만 저소득인 노동자들이 넷 중 한 명꼴이다. 99% 비중의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이들의 임금은 나머지 1% 대기업의 절반에 그친다. 전체 노동자 세 명 중 한 명이 비정규직인 상황에서 이들의 임금수준은 정규직의 절반이다. 동네에 가게를 열면 3년 내에 망할 가능성이 절반에 이른다.²⁾
한국은행이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1천 달러를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2006년 2만 달러 진입 이래 12년 만이다. 이 수치에는 국민뿐 아니라 기업과 정부도 포함되기에, 국민 개개인의 몫은 60%쯤 된다. 그러므로 3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연 소득이 6천5백만 원 내외로 추정할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가구당 평균소득은 5705만원이다.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연간 소득은 1057만 원이고, 상위 20%인 5분위 가구는 1억3521만 원이다.
3만 달러 시대에 올라섰다는 것은 고도성장 시대가 끝났음 의미한다. 23개 오이시디 국가들이 3만 달러 달성 시 평균경제성장률은 2.5%였다. 우리 경제의 성장률도 추세적으로 하락해 왔다. 노무현 정부 4.5%, 이명박 정부 3.2%, 박근혜 정부 3.0%였다. 2018년은 2.7%이다. 성장의 시대가 끝났는데도 기업계와 일부 보수 세력은 끝없는 팽창을 지향하고 있다. 이들은 생태계 파괴와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야만적 시스템의 지속을 원하는 것이다. 12년 전 2만 달러 시대보다 현재 3만 달러 시대, 서민 가구의 경제사정이 1/3만큼 나아졌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한 성장이란 말인가?
우리 사회의 부의 총량은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경제적 궁핍이란 단어를 떠올릴 이유가 없을 정도로 충분하다. 정당한 부의 분배구조가 문제일 뿐이다. 그 분배구조는 법과 제도로 구체화된다. 그런데 그 법과 제도는 정치가 만든다.
개인의 좋은 삶은 좋은 사회를 전제한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주체는 정치다. 정치의 질로 한 사회의 질이 결정된다.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서민들의 삶은 팍팍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 부자나 강자를 대변할 수 있고, 서민이나 약자를 대변할 수도 있다. 어떤 정치냐에 따라 좋아지는 대상이 달라진다.
정치를 통해 보통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권력을 잡은 후 시장의 불평등을 시정할 수 있다. 정치가 시장에 개입해 기성의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하니 시장이나 시장의 강자들이 얼마나 정치를 싫어할지는 자명하다. 정치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정치인을 부자나 기업이 얼마나 좋아하고 우대할지도 역시 자명하다. 힘센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는 부당하고 억울하다. 때문에 그들은 정치를 위축시키고,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반정치(anti-politics)를 신조로 삼게 된다.³⁾
「저는 알아야만 했습니다. 아들이 왜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이 잘못된 건지 꼭 알아야만 했고,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공공기관인 한국서부발전, 정부와 정치인, 대기업 등 기득권 세력은 구조적으로 비정규직을 만들었고, 최소한의 인건비로 최대한의 이윤을 뽑으려고 아무 안전시설 없이 비정규직을 다치고 죽게 만들었고, 사람이 죽어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허술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김용균 어머니’ 김미숙 씨가 『한겨레신문』(2019년 2월 1일자)에 기고한 글 중의 일부이다.
지난달 31일 9년 만에 복직한 쌍용자동차 노동자 김정욱 씨는 복직 뒤 첫 월급으로 85만1543원을 손에 쥐었다. 경찰이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당시 장비 등 피해를 입었다고 노동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손배) 소송을 내며 가압류한 금액 중 일부인 91만 원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현재 쌍용자동차 노동자 39명에게 3억9000만 원의 임금 및 퇴직금 가압류가 걸려 있다. 더 큰 공포는 손배가 확정돼 집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경찰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낸 손해소송에서 인정된 금액이 11억6760만 원이었다. 지연이자가 붙어 15억 원이 되었고, 다시 매년 20%씩 지연이자가 붙어 현재 손배 금액은 20억 원이 넘는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 연구팀이 사회역학조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손배·가압류를 당한 남성 노동자의 30.9%가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 봤고, 실제 자실을 시도한 비율은 3%였다고 한다. 일반 남성에 견줘 각각 23.8배, 30배나 높다. 지난해 6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김주중 씨의 자살은 손배·가압류에 따른 경제적 고통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도 같은 이유로 분신했고, 같은 해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위원장도 손배 철회를 요구하며 크레인 농성을 하다 목숨을 끊었다. 이전 조사대상 233명 중 75%는 10억 원이 넘는 손배 금액을 지고 있다고 한다.⁴⁾
왜 이런 일이 개명 천지에 발생한 것일까? 노동조합법이 ‘합법 파업’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정하고 있는 탓이다. 노동자의 생존권에 직접 영향을 주는 민영화나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 등을 놓고 벌이는 파업도 모두 불법이자 손해 배상의 대상이 된다. 결국 법의 문제이다.
20세기 초 스웨덴은 세계 조선업계의 선두였다. 그러나 세계 조선산업의 중심이 바뀌고 스웨덴 조선업계의 중심이던 코쿰스가 파산했다. 조선소 노동자들도 해고노동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튼튼한 사회안전망 덕에 생계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직장은 떠났지만 주거, 교육 등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장기간 준비 끝에 새로운 직업을 구해 삶이 전환되기도 했다.
법과 제도는 우리 삶을 규정한다. 그 법과 제도를 정치가 만든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정치의 주체는 너와 나이다. 정월 초하룻날 밤, 고즈넉한 시골 골방에서 부의 불평등과 김용균과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스웨덴 노동자와 법과 제도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결국 정치 문제이구나! 다만, 그 정치는 정치인의 몫이 아니라 ‘나’의 책무인데, 과연 나는 어떤 정치행위를 하는가? 밤이 깊어 새벽으로 향한다.
※1)「Wealth inequality fueling global anger: Oxfam」, 『The Korea Herald』, 2019년 1월 22일. 2)이태수(꽃동네대학교 교수), 「경제는 포용적일 수 없는 것인가」, 『한겨레신문』, 2018년 12월 19일. 3)이철희(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민주정치, ‘더 나은 해법’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 『인물과 사상』(2019년 2월호), 147~148쪽. 4)사설, 「‘죽음의 덫’ 노동자 손배·가압류, 입법으로 풀어라」, 『한겨레신문』, 2019년 1월 26일.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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