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예비역 장성이라는 ‘그들’
국방장관이나 합참 간부를 지낸 전직 장성들이 ‘안보를 걱정하는 예비역 장성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문재인 정부의 안보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이 낸 결의문에는 ‘9·19 남북군사합의’가 “북한의 한반도 공산화 통일에 절대 기여할 수 있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문구까지 나온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공산화’라는 철지난 용어를 사용하며 안보불안을 부추기는지 모르겠다. 이들의 성명엔 예비역 장성 400여 명이 동참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명단은 발표하지 않았다. 왜 숨어서 왜곡·과장으로 점철된 이런 성명을 내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¹⁾
합의 내용의 이해득실을 따져볼 순 있다. 그러나 우리 군이 무장해제 당해서 당장 어떻게 될 것처럼 불안을 부추기는 건 사실 왜곡이다. 최재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월 국방부 국정감사 때 공개한 내용을 보면, 이번 9·19 합의 내용은 과거 정부 때부터 검토해 왔던 것들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군비통제계획’에는 최근 논란이 불거진 군사분계선(MDL)과 북방한계선 주변에 완충구역을 설정하는 방안 등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 군비통제 계획서엔 ‘북한이 소극적일 땐 경제적 지원을 지렛대로 설득한다’는 내용까지 있다고 한다. 2011년이면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바로 이듬해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였던 시기다. 9·19 합의 반대론의 논지를 빌리면, 이건 위험천만한 시점에 군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계획했다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얘기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당시 군비통제 업무를 관장했던 군 장성이 이제 와서 9·19 합의 반대의 선봉에 선 모습에서는 ‘내로남불’말고는 다른 표현을 떠올리기 어렵다.²⁾
#2.사립대 총장들과 서울대 학장들이라는 ‘그들’
1997년 박정희 유신정권은 비판적인 젊은 교육자들이 대학에 발붙이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강사의 교원 지위를 박탈했다. 지난 11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고등교육법 일부개정안(강사법)이 통과되었다. 41년 만에 대학 강사들이 교원 지위를 되찾은 것이다.
개정 강사법은 1년 이상 임용과 매주 6시간 이하의 강의를 원칙으로 했다. 방학 중 임금과 퇴직금이 지급되며, 직장건강보험 가입도 명시했다. 명절 상여금, 휴가비, 대학시설 이용 차별 금지 규정도 있다. 곧 대학 강사들의 신분 보장과 처우 개선을 핵심으로 한다.
지난 11월 23일 사립대 총장들은 “강사법이 강사들의 대량 실직을 낳는다”며 교육부를 성토했다. 서울대 학장들은 11월 19일 국회 통과를 앞둔 강사법을 사실상 반대하는 입장문을 발표하며, “강사법으로 유발되는 재정적 적자는 대학교육의 질 저하”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총장들과 학장들은 강사들의 처우 개선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 강사법을 빌미로 대학은 구조조정을 한다. 강사 수 감축, 졸업이수 학점 축소 및 과목 줄이기, 두 강좌를 한 강좌로 합쳐 초대형 강좌로 만들기, 전임교수 강의 확대 등이다. 그러나 대학들이 강사법 시행 이전에 구조조정을 하는 이유는 비용 문제가 아니다. 새 강사법이 시행돼도 대학 추가부담은 전체 수입의 0.7%~1.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학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강사를 비품처럼 써 온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메시지다”(채효정 경희대 해고강사). “백번 양보해서 대학의 말대로 재정위기에 봉착해 있다면, 그 이유는 평균 월 100만 원을 겨우 받을까 말까한 강사가 아니라, 평균 월 1000만 원을 받는 힘이 막강한 대학 정교수들”이라고 임순광(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은 말한다.³⁾
2017년 기준 전국의 시간강사는 약 7만6000명(전업 4만 명, 비전업 3만6000명)이다. 이들이 학문후속세대 연구자들이다. 이들도 먹고 살 수 있어야 ‘연구’라는 것을 할 게 아닌가. 하지만 한국 지식사회는 연구 자원은 국외 박사와 전임교수들에게 너무나 일방적으로 배분한다. 더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대학생 1인당 교육비는 초등학생이나 중등학생보다 훨씬 적은 기막힌 상황이다.
총장이나 학장들은 한국 지식사회를 대표한다. 이들이 학문후속세대의 연구 기반 조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기업화 전략’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다. 한국의 학문 앞날은 어찌되건, 그들만의 세상이 온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3.판사라는 ‘그들’
쿠데타와 학살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취임 인사차 찾아간 이영섭 대법원장에게 김재규 내란음모 사건을 거론하면서 ‘국사범에게 소수의견이 가당키나 하냐’고 쏘아붙였다. 대법원을 날려버리자는 장군들을 자기가 말렸다고 겁박했다. 다른 자리에선 “그때 대법원 판사들 집을 다 알아두었다”고 협박했고, 실제 소수의견을 주도한 양병호 대법원 판사는 보안사 서빙고분신에 끌려가 고문까지 당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대법관의 명칭을 대법원 판사로 바꿨다. 판사이나 대법원에 근무할 뿐이란 뜻이니 격을 낮춘 셈이다. 1971년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군인 등의 국가배상책임을 면제한 국가배상법 조항을 위헌 판결하자 이듬해 10월 유신헌법에선 대법원의 위헌 법률 심판권마저 빼앗아 헌법위원회에 넘겨 버렸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듬해 헌법이 개정되면서 ‘대법관’ 명칭도 복권됐다. 국민들이 민주화 투쟁으로 ‘대법관’의 위상을 찾아줬으나 그 이름을 다시 추락시킨 건 그들 자신이었다.⁴⁾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해 법원행정처장 출신의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해 직권남용 등 혐의로 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수사와 기소도 만만찮을 전망이다. 임종헌-두 대법관-양승태로 올라가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사법농단의 실체적 진실이 실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판사라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사법농단이란 부당한 지시에도 그 어떤 판사도 거부하지 않았다. 고작 승진 누락 등에 대한 불안감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과거 정권의 호위무사로 활약할 때의 한 판사의 민낯을 보자.
법원 직원인 김아무개 씨는 지난달 30일 법원 내부통신망(코트넷) 게시판에 글을 올려 “김태규(51·사법연수원 58기) 판사는 ‘박근혜 의혹 제기 유인물’을 뿌린 박성수 씨를 8개월 간 감옥에 가두었죠. ‘정모 씨와 어떤 관계였는가?’를 묻는 전단지 몇 장 때문에 엄청나게 가혹한 처벌을 했다”며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정치적 판결은 결국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경북 청도군 삼평리 송전탑 건설에 반대한 시민운동가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한 김 부장판사의 판결도 비판했다. 김 씨는 “놀라운 것은 이 사건조차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되었다는 것”이라며 “두 가지 사건은 박근혜 정권의 호위무사요 전형적인 정치 판사였다는 비판을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⁵⁾
#4.재벌 기업이라는 ‘그들’
지난 6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기준 영리법인 기업체 행정통계 잠정결과’에 따르면, 전체 기업 수의 0.2%에 불과한 ‘재벌 기업’이 기업 영업이익의 41%를 차지했다. 재벌기업의 영업이익은 한해 전보다 54.8%가 늘어 118조 6300억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체 기업의 지난해 종사자 수가 2016년보다 2.3% 증가한 것에 반해 재벌기업은 되레 0.1% 감소했다. 국내 전체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고, 고용 인원은 88%가 종소기업에서 일한다.
그동안 재벌기업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고용을 늘려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용과 직결된 시설투자는 주로 국외에서 하고, 국내에선 비용절감을 위해 인력 구조조정을 한다. 더하여 재벌 기업의 납품단가 횡포, 기술 탈취, 일감 몰아주기 등 부당행위를 하는 ‘그들’이다.
2017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1위이고, 수출규모는 세계 6위이다. 그러나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2017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중 29위이다.
우리나라는 ‘그들’만의 세상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영원’이란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병원균은 햇볕에 드러나는 순간 죽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민낯이 백주 천하에 까발려졌다. 이 자체로 역사의 진전이다. 인간은 인정받기를 원하는 존재다. 이 말을 뒤집으면 정당치 못한 특권을 인정하지도 않는 존재란 뜻도 된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長江後浪推前浪) 법이다.
※1)사설, 「안보불안 부추기는 예비역 장성들의 시대착오적 행태」, 『한겨레신문』, 2018년 11월 24일. 2)박병수, 「9·19 군사합의와 ‘내로남불’」』, 『한겨레신문』, 2018년 12월 5일. 3)정민경, 「비품보다 못한 삶 바꾸려 했더니」, 『미디어오늘』, 2018년 11월 28일. 4)김이택, 「‘대법관’ 대 ‘대법원 판사’」, 『한겨레신문』, 2018년 12월 6일. 5)김민경, 「“김태규 부장판사, 박근혜 호위무사」, 『한겨레신문』, 2018년 12월 4일.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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