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들어있는 단체사진을 처음 찾았을 때, 눈이 누구를 맨 먼저 찾아가는가? 자신이다. 목숨을 바쳐 사랑한다는 애인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어서 자기중심의 세계를 만든다. 이런 이기적인 심리구조는 언어 표현에도 반영된다. 곧, 시간이나 공간에 관한 한 쌍의 단어를 열거할 때, 화자에게 더 가까운 것을 먼저 들고 더 먼 것을 나중에 든다. 언어학에서 이를 ‘나 먼저’원리(‘me first’ principl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저기(here and there), 조만간(早晩間, sooner or later), 국내외(國內外,home and abroad), 이만저만, now and then(가끔), 此日彼日 등이다. 예외가 없는 규칙은 없다. 다만 you and I의 경우는 상대방을 앞세우려는 경어법 또는 공손어법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습득 과정 중의 미국 어린아이는 늘 me and you라고 한다.¹⁾
언어의 일차적인 목적은 언중 간의 의사소통에 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며 창조물이 발명, 혹은 발견된다. 이에 따라 이전에 없던 단어나 용어를 만들어 내게 된다. 언어의 한계 상 새 언어가 지시하는 현상이나 창조물과 100%로 합치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목적하는 현상이나 창조물을 새 언어는 가능한 한 최대 근사치를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언중 간의 의사소통에 간극이 최소화된다.
그러나 일부러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언어 권력이 존재한다. 미학적 목적이 아닌 이상 언어(용어)는 명확함을 추구한다. 한데 이 언어 권력들은 새 용어의 의미를 애써 모호하게 하고, 악질의 현상을 악의적으로 왜곡, 미화한다. 판·검사나 고급 관료들이 퇴직 후 부당히 누리는 대우는 ‘전관특혜’일 뿐이지 어찌 ‘전관예우’란 말인가. 신용카드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크레디트 카드나 신용카드라 하면, 뭔가 있어 보인다. 기실은 빚내 쓰도록 하는 물건이 아닌가. 그러므로 ‘외상카드’나 ‘외상딱지’가 더 적확한 말이 아닐까?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대개 정치 언어는 에둘러 말하기, 논점 회피,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기 등으로 이루어진다. 무방비 상태의 마을이 폭격을 당해서 주민들이 낯선 곳으로 내몰리고, 가축들이 기총소사에 몰살당하고, 불을 뿜는 총탄이 삶의 보금자리를 불태우는 상황이 ‘평정’이라고 불린다. 수많은 농부들이 농토를 빼앗긴 채 보따리를 이고 지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피난길에서 헤매는 상황이 ‘인구 이동’ 또는 ‘국경 수정’이라고 불린다.”
노동시장에 적용되는 ‘유연성’이란 개념을 보자. 리처트 셰넷(Richard Sennett)은 “마치 유연성이 사람들에게 인생의 자유를 보다 많이 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자본주의에서 억압의 냄새를 없애는 또 다른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²⁾
민영화인가, 사유화인가? 국가 및 공공단체가 특정기업에 대해 갖는 법적 소유권을 주식매각 등이 방법으로 개인이나 개인기업에 이전하는 용어로서 어떤 게 더 사실에 가까울까?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정태인은 「Rethinking Capitalism」을 번역하면서 ‘privatization’은 사유화, 또는 사영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 뜻에 가깝지만 이미 ‘민영화’라는 말이 굳어졌으므로 민영화로 번역한다고 했다.³⁾ 이윤과 더불어 공익을 담보해야 하는 국영기업이 오로지 이윤만 추구하는 사기업으로 전환된다. 알기 쉽게 그냥 사유화이다. 민영화란 모호한 용어를 개발한 뜻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참 아리송한 경제 용어 중에 ‘차관’이란 말이 있다. 빌릴 借자에 정성 款자를 쓴다. ‘정성을 빌린다?’ 간명하게 말해, 외국에서 돈을 빌려오는 것이다. ‘차관 도입’은 ‘외국에서 빚을 냄’일 뿐인 것이다. 영어로는 단순히 ‘a loan’이다.
악질적으로 왜곡된 가슴 아픈 용어가 있다. 1990년경까지 수십 년 동안 사용된 정신대挺身隊가 바로 그것이다. ‘정신挺身’이란 ‘어떤 일에 앞장서서 나아감’을 뜻한다. 그러므로 ‘정신’이란 천황 폐하를 위해, 일제에 진충보국하기 위해, 우리의 꽃다운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의 성 노리개 된다는 것이고, 그 소녀들의 무리가 정신대란 뜻이 된다. 일본인이 만든 이 치욕적인 용어를 우리는 반성 없이 몇 십 년간 사용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요즘은 일본군 성노예와 일본군 ‘위안부’란 용어가 겸용된다. 본질을 잘 드러내는 용어로서는 ‘성노예’가 맞다. 영어로도 보통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로 쓴다. 그러나 성노예란 단어의 어감이 끔찍하다. 자칫 피해 할머니들에게 2차 피해도 우려 된다. 다만, 일본의 인권 유린의 만행을 두고두고 잊지 않기 위해서는 이 용어를 써야 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에서 위안부(comfort women)는 범죄를 축소하는 완곡한 표현이다. 그러나 피해 할머니들의 2차 피해에 마음이 쓰인다면 차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용어이다. 주의할 점은 범죄의 주체가 일본군이라는 것과 이것이 역사적 용어라는 것을 꼭 밝히기 위해 작은따옴표를 붙여 표기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반영한다. 또한 사람의 생각이 언어에 갇히는 경우도 있다. 생각과 언어는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 군사독재 정권을 넘어 민주화 시대에는 민주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를 민주화하지 않으면, 언어가 민주화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언어 적폐의 1호는 ‘대통령大統領’이다. 일본에서 들여온, 일본의 봉건적 세계관이 반영된 용어이다. ‘회의의 주재자’ 정도의 president를 ‘크게 거느리고 다스리는 사람’인 대통령으로 옮긴 것은 일본 신문이다. 민주시대에 주권자는 국민이므로,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일 뿐, ‘크게 다스리고 거느릴’ 사람일 수 없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지식이 모자라, 지혜가 미치지 못해, 적실한 용어를 만들어 낼 수 없어 부끄럽고 안타깝다.
※1)김진우, 『언어』(탑출판사, 1985), 338쪽. 2)강준만, 『인물과 사상』(2018년 11월호), 67쪽. 3)마이클 제이콥스 외/정태인 옮김,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2017), 218쪽.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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