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뿌리를 말하다
현재의 어제 이름이 과거이고, 내일의 이름이 미래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이름만 달리할 뿐 한 몸이다. 같은 몸에 시간의 흔적이 다를 뿐이다. 시간에는 비약이 없다. 무심히 흐를 뿐이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시간을 창조주로 이용한다. 바야흐로 ‘기억 전쟁’으로 이 땅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과거 ‘있던 그대로’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다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의 밑바탕은 사실史實에 근거해야 한다. 과거를 정직하게 응시한 바탕에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 부정의不正義 덕으로 이익을 본 사람들이 ‘기억’을 방자하게 조작한다. 시간을 창조주로 부리는 것이다. 있던 일도 없던 일로 둔갑시키고, 없던 일도 새로 만들어 낸다. 그러나 시간이나 기억이 조작의 대상이 될 만큼 만만한 존재는 결코 아니다.
일본의 월간지 『文藝春秋문예춘추』 6월호에 무라카미 하루키(1949년생)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뿌리에 대한 글을 실었다. 잘 알다시피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은 전 세계에서 430만 부나 팔렸다. 지금 일본의 한 세대를 풍미하는 작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두터운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고양이를 버리다>, 하루키의 이 기고문 하나만 읽어도 그의 내면이 상당히 깊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히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번역하여 독자제현과 그 깊음을 같이 나누고 싶지만 27쪽이나 되는 분량이어서 엄두를 낼 수가 없다. 다만, 그가 과거 특히 아버지와 관련된 흑역사를 어떻게 대면하는지에 관해서는 지식인의 전범典範을 보는 것 같아 우선 발췌,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과거를 대면하는 전범은 또 있다. ‘친일문학론’의 임종국 선생(이하 호칭 생략)이다. 친일 청산의 신기원을 열어준 『친일문학론』은 초판이 1966년에 나왔다. 그러나 친일파 연구의 고전이 된 이 저서의 중요성에 비해 임종국의 삶은 피폐했다. 친일파가 지배했던 학계의 풍토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저자는 금기를 깬 대가로 그 후반생을 궁핍과 외로움 속에서 병마와 싸우면서 지내야만 했다. 『친일인명사전』도 임종국의 공이 팔 할이다.
과거(적폐)청산은 ‘미래지향’이라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도 좋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청산淸算, 말 그대로 ‘깨끗한 계산’이야말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전제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가감 없이 인정과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면서 지난 과오를 반성할 때만 깨끗이 씻어지는 것이다. 금박지로 오물을 감싼다고 해서 그 오물이 금덩이기 되는 것은 아니다. 부스럼은 치료해야 할 대상이지 살이 되기를 마냥 기다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번 글은 천생 세 편으로 나눠야겠다. 임종국과 하루키는 자신들 부친의 흑역사에 대해 어떻게 대면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다음으로 하루키의 깊은 내면을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간략하나마 추려보고, 마지막으로 친일청산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가 더 크며 미래에서도 대단한 함의를 지닌다는 것, 등이다.
천도교청년당으로 하여금 우리는 시국에 감하여 “헌신보국 희생적 각오로써 시국에 당할 것”(결의문 제1조, 『매일신보』 1937.7.21.)을 결의(7.19)케 하여 1937년 9월 4일~27일 백중빈白重彬 임문호林文虎 김병제金秉濟로써 초산, 회령, 함흥 외 35개 처를 순회 강연케 하는 한편, 천도교종리원으로 하여금 “비타산적으로 내선일체의 정신을 발휘하고 거국일치의 백력魄力을 고양하자.”는 등의 삐라를 발행(1937.8)하게 했던 것이다.*
위의 임문호는 임종국의 부친이다. 천도교 시국대처부 총무와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이사를 역임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임종국의 아버지의 친일행적에 대해 대단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일행적도 빼지 않고 기록했다. 저간의 사정은 어땠을까? 정운현의 『임종국 평전』에 잘 나타나 있다.
종국이 부친 임문호의 친일행적을 『친일문학론』에 싣게 된 경위를 알아보자. 이에 대해서는 경화의 증언이 있다(순화도 같은 증언을 했다).(순화, 경화는 임종국의 여동생-필자)
“1966년 1월쯤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빠가 그때 코트를 입고 있었으니까요.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면서 헌 신문을 뒤지다 보니 학병 지원 연설(이건 경화의 착각이거나 종국이 잘못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위에서 보듯 임문호의 지역 순회강연은 ‘학병 권유’가 아니라 중일전쟁 직후 시국 관련 내용이다. 학병 권유는 1943년 말부터 1944년 1월 10일 이전에 행해졌다. 혹시 임문호가 학병 권유 연설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을 나간 아버지의 기사가 났습니다. 오빠는 그 글을 쓰다말고 집(당시 종국은 하월곡동에, 다른 가족들은 송천동에 거주함)에 와서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친일 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학병 지원 연설한 게 나왔는데,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는데···’ 하자 아버지께서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고 하셨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제국주의 일본군이었던 아버지의 경험을 어떻게 추체험하는 것일까?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기고문에서 그 부분을 읽어보자.***
한번은 아버지가 나에게 털어놓듯이, 자신이 소속된 부대가 포로로 잡힌 중국군 병사를 처형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경위에서, 어떤 기분으로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꽤 오래된 일이어서 전후 사정은 불확실하고, 기억은 고립되어 있다. 나는 당시 아직 소학교 저학년이었다. 아버지는 그 때의 처형 모습을 담담히 말했다. 중국군 병사는 자신이 살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다만 눈을 지그시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참수되었다. 실로 우러러볼 만한 태도였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버지는 참살된 그 중국군 병사에 대한 경의敬意를, 아마 죽을 때까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같은 부대의 동료 병사가 처형을 집행하는 것을 다만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더욱 깊게 관여한 것인지, 그 사정은 알 수가 없다. 내 기억이 혼탁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본래 애매하게 말한 것인지,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일은 아버지의 마음속에 - 병사이면서 승려였던 아버지의 영혼에 -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 당시 중국대륙에서는 살인행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초년병과 보충병에게 명령하여 포로로 잡힌 중국군 병사를 처형하게 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요시다 유타카(吉田裕)가 쓴 『일본군병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후지타 시게루(藤田茂)는, 1938년 말부터 39년에 걸쳐서 기병제28연대장으로서 연대의 장교 전원에게, ‘병사를 전쟁터에 익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살인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바꿔 말하면 담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에는 포로를 사용하면 좋다. 4월에는 초년병이 보충될 예정이므로, 가능한 한 빨리 이 기회를 만들어 초년병을 전쟁터에 익숙하게 하여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은 총살보다 칼로 죽이는 것이 효과적이다’라고 훈시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무저항 상태의 포로를 살해하는 것은, 물론 국제법에 위반되는 비인도적인 행위지만, 당시의 일본군에게는 당연한 발상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포로를 돌볼 여유가 당시 일본군 전투부대에는 없었다. 1938년부터 39년까지는 마침 아버지가 초년병으로서 중국대륙에 보내진 시기이다. 이러한 행위를 하급병사들에게 강제되었다고 하여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처형의 대부분은 총검으로 찔러 죽였던 모양이지만, 그 때의 살해에는 군도軍刀가 사용되었다, 고 아버지가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아버지의 회상은, 군도로써 사람의 머리를 베어 떨어뜨리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것도 없이 어린 내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하나의 광경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의사체험으로서. 바꿔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랫동안 무겁게 짓눌러 온 것을, 현대적 용어를 빌리면 트라우마(trauma)를, 자식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연결은 이러한 것이고, 또 역사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것이다. 그 본질은 <인계引繼>라고 하는 행위, 혹은 의식儀式의 가운데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눈을 돌리고 싶은 것일지라도, 사람은 그것을 스스로의 일부로서 넘겨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의 체험에 관해서 말한 적이 거의 없다. 자기 손으로 직접 처형을 했든, 혹은 다만 목격만 했든, 생각해내고 싶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만은 설령 쌍방(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속에 상처가 되어 남는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피를 나눈 자식인 나에게 말하여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곧 ‘중편’으로 이어집니다.)
※*임종국 저/이건제 교주, 『친일문학론』((주)민연, 2016), 32쪽. **정운현, 『임종국 평전』(시대의창, 2006), 366쪽. ***村上春樹(むらかみはるき), 「猫を棄てる」, 『文藝春秋』 2019년 6월호, 252~254쪽.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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