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학론’의 임종국과 무라카미 하루키 (중)우리는 무수한 빗방울 중 한 방울에 불과하다

조송원 승인 2019.06.03 23:55 | 최종 수정 2019.06.04 00:04 의견 0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과 ‘종군위안부’, 100여 년이 지난 현재의 내 삶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대한 국민의 후예로서 마땅히 조국의 역사에 내 삶이 조건 지워진다는 것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사실이 내 생명의 탄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면, 역사는 역사책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과 함께 직접적으로 호흡을 하게 된다. 일제의 침탈과 ‘종군위안부’, 이것으로 인해 내 생명은 이 땅에 탄생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생으로 58년 개띠인 나보다 9년 연상이다. 크게 보아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큰 차이는 내가 식민지 피해자임에 반해 그는 식민국 가해자란 사실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역사를 공유한다. 역사를 공유해야 피해든 가해든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나의 탄생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공통분모로 한다는 자각에 적이 놀랄 수밖에 없다. 『문예춘수文藝春秋』 6월호에 <고양이를 버리다>란, 그의 뿌리에 대한 기고문을 읽으면서 느낀 감상이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1936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졸업할 때까지 4년간 징병유예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행정수속을 밟지 않아 20세에 징병되었다. 1938년 8월 1일이다. 제16연대 특무2등병으로 상해로 보내졌다. 주로 경비, 보급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추격전과 공략작전에도 참가했다.

전쟁터의 상황은 심각했다. 보급품이 오지 않아 식량과 탄약이 부족했고, 군복도 넝마가 되었고, 비위생적인 환경이라 콜레라를 비롯한 역병이 만연했다. 아버지의 부대는 기본적으로 전선의 전투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안전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총검만 휴대한 채로 배후에 돌아다니는 적에게 습격을 당해, 심대한 피해를 입은 적이 많았다. 아버지 부대는 1939년 8월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1년간의 병역을 마치고, 복학했다. 당시 현역병의 병역기간은 2년인데, 어떻게 1년으로 병역을 마쳤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하루키 아버지는 1941년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징집된다. 제53사단이다. 이 부대는 전쟁 말기인 1944년에 버마로 파견되어, 여러 전투에 참가하고, 영연방군을 상대로 수행된 이라와디 전투에서 거의 괴멸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의외의 전개로 하루키 아버지는 소집되어 겨우 2개월 후에 소집해제된다. 실로 진주만기습공격의 8일 전이다. 만약 개전 이후였다면 이런 관대한 조치는 턱도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한 상관의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거였다.

상관이 불러서 ‘자네는 교토제국대학에서 배우는 몸으로, 병사로서보다는 학문에 힘쓰는 쪽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 될 것이다’고 하며 군무軍務를 벗어나게 해줬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상관의 재량으로 할 수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조사해 보니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교토대학 <생도일람>을 살펴보니, 아버지가 교토대학 문학부에 입학한 것은 1944년 10월이었고, 47년 9월에 졸업했다. 1941년 소집해제되고 나서 교토대학에 입학까지의 기간, 23세부터 26세까지의 3년간, 아버지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 하루키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소집해제를 받고 떠난 직후에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16사단은 수송선을 타고 필리핀 전투로 가게 되었다. 필리핀 등 여러 전투로 인해, 당초 1만 8000명을 헤아리던 제16사단의 생존자는 겨우 5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옥쇄다.

아버지가 ‘목숨을 구했다’고 말한 것은 아마 제53사단이 일원으로서 전쟁말기에, 비참하기 짝이 없는 버마 전선에 보내지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러나 바탄이나 레이테 전투에서 시체가 된, 제16사단의 옛 동료 병사의 일도 역시 아버지의 머릿속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으로, 만약 아버지가 다른 운명의 길을 걸어서, 이전에 소속되어 있던 제16사단 병사와 함께 필리핀으로 보내졌다면, 어딘가의 전장戰場에서 틀림없이 전사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물론 나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1947년 교토대학문학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나이도 들었고 결혼하여 내가 태어나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국어교사로 취직했다. 어머니도 국어교사였다. 어머니는 결혼을 염두에 둔 사람(음악교사였다)이 있었지만, 그 사람은 전쟁에서 사망하여 버렸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쟁은 어머니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렇지만 이 덕분으로 - 덕분이랄 수 있을까? -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의 선친은 1916년생이다. 1940년 24세 때 일본 어느 탄광으로 징용되어 4년 간 고된 강제노역 후 해방 1년 전 1944년 28세 때 귀국하였다. 이미 결혼적령기를 넘겼으므로 귀국 직후부터 결혼을 서둘렀다.

어머니는 1927년생이다. 아버지가 귀국한 무렵의 1944년에는 일제의 ‘종군위안부’ 모집이 고향에서도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에게는 아직 ‘악마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외할아버지는 16세의 딸을 오로지 ‘모집’에 벗어나기 위해 수단으로 서둘러 혼처를 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의해 하루키가 이 세상에 탄생하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필자 또한 침략전쟁과 그 여파인 ‘종군위안부’ 탓이든, 덕분이든 간에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조송원

이런 하루키 개인의 존재 원인이었던 침략전쟁과 역사를 하루키는 어떻게 해석하고, 그 의미를 어떻게 내면화하고 있는 것일까?

내(하루키)가 이 개인적인 문장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단 하나의 당연한 사실이다. 그것은, 이 ‘나’라는 사람은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자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조용히 앉아 이 사실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실은 이것은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해져 간다. 우리는 결국, 우연이란 것이 우연히 낳았다는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서 간주하고 살아가야 할 뿐인 것이 아닐까?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광대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수많은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불과하다. 각자 고유성은 있지만 교환 가능한 하나의 빗방울이다. 그러나 이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한 방울의 빗물에도 역사가 있고, 그것을 계승하여 간다는 빗물 한 방울의 책무가 있다. 우리를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어딘가에 완전히 흡수되어,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치환되어 사라져 버릴지라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치환되어 가기 때문에 역사와 그 역사를 계승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곧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村上春樹(무라카미 하루키), 「猫を棄てる」, 『文藝春秋』(2019년 6월호), 249~262쪽. **앞의 책, 267쪽.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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