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100냥에 이웃 900냥

조송원 승인 2019.07.15 02:32 | 최종 수정 2019.07.15 03:38 의견 0

한 스님이 어린 제자에게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어린 제자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부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자 스님은 어린 제자의 옷깃을 잡고 냇물로 밀어 넣었다. 얼굴까지 물속에 집어넣자 제자는 공포에 떨며 몸부림을 쳤다. 제자의 머리를 물에서 빼주면서 스님은 제자에게 다시 똑같이 물었다. 제자는 “공기요!”라고 외쳤다.

연일 여름 땡볕이 좋다. 맑은 뙤약볕이 습기를 날려버려 기온만 높을 뿐 쾌청하다. 바람이 없어도 나무그늘만으로 좋은 쉼터가 된다. 가슴골에 땀이 흐르지 않으면, 여름답지 못하다. 후터분히 물쿠는 날보다야 따가운 볕살이 여름 제 맛이 아니겠는가.

안 하던 일로 옷장에서 양복을 꺼내 볕기를 쐬었다. 누기를 가셔야지, 싶었다. 별 입을 일이 없어 몇 년을 묵혀두었다. 널다보니 춘추양복 상의 등짝을 좀이 쏠았다. 이런! 몇 년 전 큰 마음먹고 장만한, 아끼는 양복이었다. 하의는 멀쩡하다. 어찌해 볼 도리는 없는 것일까?

읍내 가는 버스는 아직 오지 않는다. 버스 시각에 맞춰 기다리기 싫어 여느 날 같으면 자전거를 탔다. 20여리 길, 운동하기 딱 알맞은 거리다. 그러나 오늘은 양복을 쟁여 넣은 가방이 있다. 짐이 있으면 자전거 타기가 불편하다. 동네 사람들이 한둘 버스 정류소로 나온다. 일흔 초반이 가장 젊다. 나는 숫제 청춘 축에 든다. 대개 그들은 기다리는 데 이골인 난 사람들이다. 때 아니게 정류소는 ‘반상회 토론’ 비슷한 걸 하게 된다. ‘전기세’, ‘수도세’, 휴대폰 요금이 이야기 거리로 올려졌다.

“그래도 요즘은 노령수당이 나오니 좀은 괜찮지요?” 비싸니 싸니, 옳니 궂니 하며 갑론을설하는 말 밥상에 내가 숟가락을 하나 얹었다. 내친 김에 ‘문재인 케어’ 등 복지정책의 진전에 대해 ‘도움말’을 주고도 싶었다. 하나 웬걸, 정말이지 내가 상상도 해보지 못한 뒷집 할배의 호언을 듣고는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제 돈으로 주는 줄 아나? 다 국민 세금 떼서 주는 기라. 젊은 놈들한테 세금을 막 떼니, 내 아들놈도 못 살것다고 하데.” 할매도 거들었다. “테레비 보니까, 세금 억수로 떼 묵는 부자들도 많던데, 내 아들만 와 세금을 떼는지. 야튼 세상이 썩었어.”

출처 : 픽사베이

말의 맥락이고 자시고 따질 게 아니다. 믿기지가 않는다. 이들이 눈인사 하고 지내는 이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차라리 강 건너 낯선 사람들이라면 덜 황당했을 것이다. 이들과 의사소통을 바랄 수 있을까. 물론 안다. 이들은 박정희를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 박정희 시대에서 세월이 정지해 버린 사람들이다. 역시 인간은 정신적인 동물이다. 세월이 몸에는 흔적을 남기지만, 머릿속에서는 멈춘다. 세월 아랑곳없이 한때 박힌 생각은 더욱 여물어지기만 한다. 이렇게 철저히 정신적인 인간을 경외해야 하나, 무시해야 하나?

“이 양복, 버려야 돼. 오래 되어서 맞는 옷감이 없어. 그냥 버려라.” 읍내의 옷 수선 집. 친구의 친구라 면식 정도는 있다. 행여나 살려보려고 일부러 안면이 있는 이곳을 뙤약볕 마다않고 발품 팔아 찾아왔다. 냉갈령에 정나미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누가 버릴 줄 모르랴. ‘아깝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일 공감능력도 없단 말인가. 아마 자네를 다시 볼 날은 없으리라. 남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 어이 상종하랴.

친구를 찾아간다든지, 일을 만들지 않으면 읍내에서 볼 일은 끝났다. 버스는 50분 후에나 있다. 걷자. 2시간이면 족하다. 생각할 게 많다. 생각하는 데 걷는 것만큼 좋은 수단도 없다. 땡볕이 문제이랴, 속이 더운데. 땀에 범벅이 되면, 30분만 걸으면 걷는 그 자체가 즐겁다. 경험으로 안다. 가방을 둘러메고 천천히 걸었다. 머릿속은 살걸음 속도로 회전한다.

땀을 쏟아내서인지 몸은 가볍다. 샤워의 시원함을 미리 그려보며 삽짝 길에 들어서니 이장이 내 집에서 나온다. “형님, 물을 많이 쓰셨네요. 수도 요금이 많이 나왔습니다.” 막 상수도 검침을 하고 나오는 참인 모양이었다. “와, 한 3만 원 나왔나?” “73,600원입니다.” 놀랐다. 동네 가구 평균 15,000원 정도다. 살펴보니 계산엔 틀림이 없다. 기본요금 4,000원. 사용량 232톤. 톤당 요금이 300원. 상반기 6개월 요금이다. 작년에는 20,000원 내외였다.

계량기보호통은 열고 계량기를 확인했다. 물을 쓰고 있지 않는데도 표시기가 돌아간다. 누수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고쳐야지 별 수 있나. 한데 이장의 한마디가 딱 뇌리에 꽂힌다. “두식이 형님도 작년에 누수가 생겨 요금을 30만 원이나 냈습니다.” 이장의 어투는 딱 옷수선 집 친구를 빼쏘았다.

두식이 형은 내외가 중증장애인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장애인 수당으로 살림을 근근이 꾸려간다. 두식이 형은 절뚝거리며 시장을 돌아다니며 좀약이나 고무줄 등을 팔아 생계에 보탬이 되는 경제활동을 한다. 그런 이웃에게 누수로 샌 물값을 전부 받았다고? 이게 이웃이고 동네이고 고향인가! 내가 동네일에 너무 무관심했구나.

친구에게 전화를 해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다. 이 친구는 인근 면에 살지만 이장을 4년 이상 한 걸로 알고 있다. “우리 동네 같으면, 그런 딱한 이웃한테 동네 평균 요금 이상은 안 받아. 그것 안 받아도 상수도 유지, 보수하는 비용은 충분해. 누 동네는 그 요금 다 받아서 어디에 쓴다더노?”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동네일을 알 턱이 있나. 모임이란 모임에는 죄다 남의 일인 양 등한시하고 참석한 적이 없다. “네도 이제 동네 회의에는 좀 참석하고 그래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안방일도 몰라서야 공부하는 사람 어디에 쓰것나. 두식이 형 같은 일이 안타깝다면 말이다.”

100냥 주고 집 사고, 900냥 주고 이웃 산다는 옛말이 있다. 우리 삶에서 이웃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 개인 행복은 개인의 노력만큼, 건전한 사회를 전제한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개인의 행복 추구는 ‘이기적 삶’일 뿐이다. 문제는 좋은 이웃을 얻기 위해서는 ‘900냥’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이되 최소한 ‘참여하는 관객’이어야 민주시민에 값한다. 문득 짚이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진나라 초기에 노장학老壯學을 숭상하여 죽림에 모여 청담을 일삼던 일곱 명의 선비가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왕융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몹시 인색하여, 자기 집에 자두(오얏나무)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 씨를 얻어 심을까 걱정하여, 자두를 먹고 나면 반드시 송곳으로 씨를 뚫어 버렸다고 한다. 죽림칠현, 허명일 뿐이다.

동네일을 멀리한 나나, 인색한 왕융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제 늦게나마 동네 회의에는 빠짐없이 참석해야 할까 보다.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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