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회담 관련 뉴스를 보도하는 러시아 보도전문 채널 RT. 출처 : 유튜브
초楚 장왕莊王이 신하들에게 술을 내려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신하들이 모두 취하였을 때 마침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 이때 어둠을 틈타 왕후의 옷소매를 잡아끄는 자가 있었다. 왕후는 그의 갓끈을 당겨 끊어버리고는 임금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지금 촛불이 꺼지자 첩의 옷을 잡아당기는 자가 있습니다. 첩이 그의 갓끈을 끊어 놓았으니, 원컨대 불을 밝히시거든 갓끈 끊어진 자를 살펴주십시오.”
이 말에 왕은 “그쳐라!”라고 말하고, 곧바로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나와 술을 마시는 자 중에 갓끈을 끊지 아니한 자는 이 술자리를 즐겁게 여기지 않는 자라 여길 것이다.” 이에 갓끈이 온전한 자는 아무도 없었고, 왕후에게 갓끈을 끊긴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왕은 신하들과 함께 계속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아무 일 없이 잔치를 끝낼 수 있었다.
뒤에 오吳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싸움이 벌어졌을 때, 어떤 자가 항상 앞서 나가며 다섯 번 싸움에 모두 접전하더니 상대의 진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적을 물리쳐 드디어 적장의 머리를 잘라 바쳤다. 왕이 괴이히 여겨 물었다.
“나는 일찍이 그대에게 특이하게 잘해 준 것도 없는데 그대는 어찌 나에게 이렇게 후하게 대하는고?”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가 바로 지난 번 궁전에서 갓끈이 끊겼던 자입니다.”¹⁾
(북-미 대화와 '한국적 보수'의 종말㊤에 이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일 국가 전략의 핵심 축을 ‘핵’에서 ‘경제’로 바꾼다고 공식 선포했다. 중요한 전략적 방향 전환이다. 2013년 3월 31일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채택한 ‘핵·경제 병진노선’을 공식 종료한다는 선언이다.
“이제 우리에게 그 어떤 핵시험과 중장거리, 대륙간탄도로켓트 시험발사도 필요 없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부 핵시험장도 자기 사명을 끝마치었다”는 김 위원장의 지침에 따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와 21일부터 핵실험과 대륙간타도미사일 시험발사 중지 조처를 취했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는 시선이 국제사회 일부에서 여전한 가운데 나온 ‘선제적 신뢰구축 조처’로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조선중앙통신>이 21일 이런 내용을 보도한 직후에 “모두를 위한 진전”이자 “매우 좋은 뉴스”라며 “우리의 정상회담을 고대한다”고 환영했다.²⁾
북한이 국제사회의 가혹한 경제 제재에 버틸 수 없어 핵을 포기하고 경제를 선택했을까?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는 북한이 결코 국제사회의 제재에 의해 우왕좌왕한 것이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의 로드맵에 따라 움직여왔다고 주장했다. 지난해의 ‘미친 듯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도, 올해의 대화 공세도 모두 그 로드맵에서 생성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로드맵은 바로 ‘완제품’으로서의 핵·미사일로 미국과 포괄적인 빅딜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³⁾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는 믿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이 갈구하는 것은 북한의 경제 도약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권좌에 오른 후 첫 연설(2012년 4월)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자신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밝혔다. 외부 관찰자들에게 이 말은 ‘만성적 빈곤’을 유산으로 넘겨받은 경험 없는 어린 지도자의 치기어린 허장성세쯤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핵·미사일 도발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김정은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는 다른 쪽에서 이 메시지의 실현을 위해 움직이며 전통적인 북한 지도자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용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측면을 보였으며, 목표의 실현 가능성에 집중하며 부여한 과제의 이행 여부를 점검하는 실천형 리더십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약속한 ‘인민의 부귀영화’를 향해 북한 경제를 바꾸었다. 경제를 개방하고 국제표준을 좇으면서 북한 경제의 구조와 체질을 변화시켜 왔다.
북한은 다른 저개발 국가에 볼 수 없는 특별한 경제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첫째,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과 최소 11년제 의무교육을 마친 근면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우수성은 개성공단의 경험과 중국 기업에 고용되어 보여준 높은 노동생산성으로 입증되었다. 둘째, 경공업 기술력도 예사롭지 않다. 셋째, 북한은 저개발국가에서 상상조차 어려운 수만 명의 정보기술(IT) 고급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외부의 자원과 기술이 이 특별한 자원들과 결합한다면 북한 경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비약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김정은도 이를 잘 알기에 경제를 개방하고 도처에 경제개발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강도 경제제재를 받는 한 자신의 유토피아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김정은의 유토피아가 하루 세 끼 ‘인민’이 굶지 않는 정도였다면, 그는 비핵화에 응하지 않고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 베트남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고도성장을 거듭하는 북한을 꿈꾼다. 여기서 다행히 그가 북한이 경제제재에서 벗어나고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정상국가로 거듭나야 유토피아를 향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⁴⁾ 그러므로 미국과 외교관계 수립의 전제 조건인 비핵화는 이미 김정은의 로드맵에 들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11월 중간선거의 의미는 크다. 중간선거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은 교착 상태인 이란 핵이 아니라 유화 국면인 북한 핵에서 성과를 내려 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핵의 ‘포괄적 일괄타결’은 합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의사를 확고히 천명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체제의 안정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처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핵의 수출 중단과 더불어 수소폭탄을 이용한 탄두 소형화, 그리고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ICBM 개발을 중단시키는 것이다.⁵⁾
북-미 정상회담은 순항을 낙관해도 된다. 왜냐하면 20일 김정은 위원장의 ‘선제적 신뢰구축’ 조처로 트럼프의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곧, 무엇보다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 고도화가 일단 중지되었다.
김 위원장의 선제적 신뢰구축 조처에 대해 트럼프는 이례적으로 트위터를 두 번이나 올렸다. 북한의 그 조처를 자신의 제안에 북한이 동의한 것처럼 썼다. 북한의 조처를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 싶어 하는 속내가 보인다. 동시에 정상회담을 성공시키고 싶다는 강한 열망의 방증으로도 읽힐 수 있다. 바야흐로 북-미 관계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화해의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다.
‘한국적 보수’의 속은 지금 시커멓게 타고 있을 것이다. 친미·숭미·종미하던 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수용한 것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가관이게도 김 위원장이 ‘선제적 신뢰구축’ 조처를 취하고 트럼프가 화답하는 모양새에 할 말을 잊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태숙은 한국 보수주의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⁶⁾ 한국 보수주의의 장래, 즉 기존체제의 보수론이 힘을 얻을 수 있느냐의 여부는 북한의 위협을 계속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헌팅턴처럼 대담하다면, 기존체제에 대한 새로운 위협세력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가능성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헌팅턴은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붕괴하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새로운 위협으로 무슬림을 찾아냈다. 북한은 이제 위협 세력이라기보다는 유용한 경제 파트너로 부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국적 보수’는 그들을 정당화할 어떤 새로운 위협을 찾아낼 수 있을까? 더 두고 봐야 할 볼거리이지만, 현재의 ‘한국적 보수’의 종말의 시계는 이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1)한영 찬撰/임동석 역주, 「갓끈을 끊어라」, 『한시외전2』(동서문화사, 2013), 768~769쪽. 2)이제훈, 「김정은, 핵실험 멈추고 경제 택했다」, 『한겨레신문』, 2018년 4월 23일. 3)진징이(베이징대 교수), 「북핵 타결의 천시지리인화」, 『한겨레신문』, 2018년 3월 26일. 4)이종석(전 통일부 장관,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와 ‘강남경제개발구’」, 『한겨레신문』, 2018년 3월 26일. 5)남문희, 「‘한반도 운전자’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시사IN』, 2018년 4월 24일(VOL.553). 6)에드먼드 버크/이태숙 옮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2008),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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