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체제의 기원 : 인민 위의 계급, 계급 위의 국가
저자 : 김재웅(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 연구교수)
서평자 : 조수룡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문학 박사)[sr_cho@hanmail.net]
계급적 기준에 따른 인간 개개인의 분류와 관리를 요구한 이 급진적 사조는 북한 지역민들의 삶과 자아실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계급성분에 좌우된 사회적 지위의 수직 이동과 재화의 접근 기회, 급진적 계급정책이 낳은 새로운 행동양식·가치체계·문화현상 등은 북한 지역민들의 삶을 규정하는 요인들이 되었다. (10p.)
북한 사회주의의 유년기를 그린 세밀화
한때 ‘주사파’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1990년대 초 가톨릭 신부 출신의 한 대학 총장이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운동세력이라는 의미일 것인데, 이 세력보다는 그 용어의 파괴력이 대단했다. 이제 ‘주사파’라는 세력의 실체는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그 사이 ‘종북(從北)’이라는 더 강력한 단어가 등장했다. 주체사상을 몰라도 북한을 칭찬하거나, 동정하거나, 궁금해하기만 해도 ‘불온세력’이 될 수 있다. 이는 북한이 대단히 위협적인 적이라는 공포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 후 ‘혐북(嫌北)’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는데, 이 단어 속에 있는 북한이라는 나라는 후진적이고, 사람들은 굶주리며, 주변국을 속이려 들고, 폭정을 자행하는 이른바 ‘불량국가(rogue state)’이다. 냉전 해체 이후 새로운 ‘악’을 찾기 위해 미국이 만든 이 프레임을 남한 사람들 또한 받아들여, 북한에 대한 공포의 감정 위에 혐오를 덧칠한 것이다.
남한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과거 ‘자유세계’에서 구소련 등 사회주의권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3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지칭한 것과 같은 인식은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 사회주의는 비효율과 빈곤의 경제 체제, 감시와 공포에 기반한 정치 체제였다. 이해보다 고정관념이 앞섰던 과거 사회주의권 연구는 근본적으로 냉전이라는 조건에 기인한 것이지만, 이외에도 자료 접근에 대한 제약이 한몫 거들었다.
내부 자료를 접할 수 없었던 연구자들은 자화자찬 일색의 공개된 자료를 통해 사회주의 세계의 실상을 넘겨짚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간의 북한사 연구가 정치와 경제 분야에 집중된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정치·경제적 문제는 공표된 자료만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적 변동, 의식의 변화와 같은 문제는 내정을 보다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날것의 자료 없이는 설명이 곤란하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도전적인 시도이다. 저자는 600쪽에 가까운 방대한 저술을 통해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형성을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1948~49년 시기 북한에 유입된 이른바 ‘후기 인민민주주의론’의 영향으로 계급투쟁이 강화되고 사회주의 정치 문화가 자리 잡는 사회 전반의 급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사에 관한 사회·문화적 접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를 북한 체제 형성과 직결시킨 것은 이전에 없던 시도이다.
저자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 민간 상업과 농업에 대한 억압적 정책, 계급투쟁의 강화와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보급 등을 통해 이미 이 시기 북한에는 사회주의적 사회 구조와 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었음을 밝혔다. 한국전쟁 전 시기 북한 자료의 ‘보고(寶庫)’로 일컬어지는 미군 노획문서와 북한 주둔 소련군이 남긴 보고서를 전면적으로 활용하여, 당시 인민의 생활상과 의식 변화를 들여다본 성과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기원은 1948~49년에 있었던 북한의 사회적 격변" 새로운 주장
한편 이 책은 북한 체제론에 관한 새로운 논쟁을 제기한다. 기존에 알려진 통념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 구조가 1950~60년대를 거치며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 1958~61년 사회주의 개조의 완성, 1967년의 갑산파 숙청 등이 주요 계기로 지목된다. 그런데 저자는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기원이 1948~49년에 있었던 북한의 사회적 격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한국전쟁이 남북한의 사회 체제가 분화된 결정적 계기였으며, 전쟁 전 시기는 인민민주주의와 통일전선으로 대변되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정책이 적용된 시기였다는 기존 해석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북한 체제의 기원」이라는 야심 찬 제목은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북한 체제 형성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시도이다.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여 딱딱한 주제를 다룬 것에 비해 책은 상당히 흥미롭게 읽히는 편이다. 노획문서에 포함된 개인 자서전과 이력서를 활용하여 알려지지 않았던 ‘보통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문학적 역사 쓰기를 추구한 저자의 노력 때문일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유년기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이지만, “‘북한 체제’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북한 체제가 단지 스탈린체제의 오래된 화석일 뿐이라고 보는 것일까? 저자의 향후 연구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금주의 서평은 국회도서관의 승인을 받아 전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www.nane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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