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12) 만능열쇠, 고진하
손현숙
승인
2023.12.16 08:40 | 최종 수정 2023.12.1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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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열쇠
고진하
뒤란으로
자꾸 돌아가게 되는 건
돌담 옆에 핀 해바라기 때문이다
한 그루에
열 송이도 넘게 피었다
오늘처럼 찌뿌둥 흐린 날은
열 송이가
만능열쇠 같다
그 열쇠라면
못 열게 없을 것 같다
부재하는 하느님도
일식(日蝕)에 든
캄캄 세상도
못 열게 없을 것 같다
한 그루에
열 송이도 넘게 피었다
고진하 시집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을 읽었다. ‘문연’ 2023.
돌담 옆에 핀 해바라기는 시인을 자꾸 불러들이고. 시인은 또 한 그루에 열 송이도 넘게 핀 꽃 송아리에 마음 설렌다. 돈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그렇다고 떡으로 바꿔먹을 금덩어리도 아닌, 돌담 옆에 핀 해바라기. 그 장엄 앞에 시인은 제 온 마음을 건다. 저 꽃송아리만 있으면 세상의 무엇도 다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하다. 세상에, 한 그루에 열 송이도 넘게 피었다고 장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런 시인 앞에서 돈 자랑해 봤자 말짱 꽝, 이다. 자본의 논리는 그저 부질없을 뿐. 시인의 당호가 ‘불편당’이듯 검소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시작하는 시인의 이번 생은 사람의 ‘영’을 닦는 일. 만물근동, 너나 나나 개구리나 고라니나 봄철 불편당의 처마 아래 집을 짓는 제비들까지도 시인의 눈에는 귀한 손님이다. 참, 진짜 손님 대접하듯 배고픈 고라니에게 먹이를 나눠주는 시인의 아내는 사실 시인보다 더 시인인 것을. 불편당을 가로지르는 저 걸음의 주인들이 아름답다.
◇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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