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75)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9장 물만골의 으뜸 농부(2)

이득수 승인 2024.08.03 09:41 의견 0
[그림=서상균 화백]

설이 지나니 대목 뒤끝이라 장사가 별로라던 영서 네는 곧 이어 2월말 입학철이라 또 사람들 손끝이 오그라든다고 걱정이었다. 장사하는 딸네 집을 생각하면 이래저래 맘이 안 편치만 일단 현서를 신평동의 사돈에게 맡기고 영순씨와 열찬씨는 부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오랜만에 아이들에서 벗어난 영순씨는 모처럼 같이 여행하며 이야기도 좀 나누고 맥주라도 한 잔 하려는 열찬씨의 기대를 저버리고 영순씨는 자리에 앉자말자 내처 잠만 잤다. 그 동안 아이를 보느라 힘이 들고 앉은뱅이 앉아 용쓴다고 나가보지도 못 한 가게의 장사가 되느니 안 되느니 늘 신경을 썼으니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열차가 대전을 지나서야 겨우 눈을 뜬 영순씨와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고 마중 나온 정석씨 내외와 같이 택시를 타자

“아이구, 내 새끼 그 사이에 또 큰 것 같네.”

영순씨가 택시 안에서 아이를 안고 어르는 사이

“집이 어데라 캤노? 니 신혼 때 홍제동인가 어디서 살던 아파트하고 학교댕길 때 장충족발골목 옆 원룸이 생각나네.”

“예. 서대문 근방 냉천동이라고 인창고등학교 앞입니다.”

“그래. 냉천동이라 카이 옛날 연산동시절 동료 김승호씨가 생각나네. 서울 냉천동서 자랐다는데 나 보고 늘 언양촌놈이라고 놀렸지. 부산에 정규직을 버리고 서울의 임시직으로 돌아가서 평생 차드사로 늙어간다고 하더군. 부산에 계속 있었으면 서기관은 아니더라도 사무관은 되고도 남았을 텐데.”

하는 사이 택시가 인창고등학교정문에 닿아 차에서 내리면서

“보자, 인창이라면 야군가 배군가 제법 유명한 팀이 있었는데.”

“예. 대신, 휘문 등 명문사립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축구, 야구 등의 운동부가 다 있는데 그 중 배구가 제일 유명해서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많답니다. 지금 국가대표센터 신영석선수도 있고요.”

하면서 승용차 너덧 대를 댄 주차장을 지나 2층 계단을 오르자 현관 앞에 좁은 통로가 있는 길쭉한 구조의 거실이 나오고 그 안쪽에 방 두개와 부엌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구조가 너무나 산만하고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 그런지 도무지 깔끔한 맛이 없었다.

“잘 해놓고 사네.”

하면서 영순씨가 이것, 저것을 치우며 청소를 하다시피 하고 식탁에 앉자

“아버님 입맛에 맞을는지요?”

하면서 며느리가 상보를 벗기는데 전과 나물 파김치 사이로 고막무침도 보이고 구운 생선도 한 마리 있었다. 아들이 소주를 한잔 따라 주어 열찬씨가 기분좋게 마시는데

“어째 술안주가 집을 것이 없네.”

주방의 상미씨가 못 듣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영순씨가 생선 한 점을 발라 주었다. 무엇이나 푸짐하게 장만하는 영순씨와 달리 상차림 자체가 넉넉한 느낌도 없고 술안주가 될 만한 생선회나 육고기가 없는 것이 시아버지의 밥상으로 많이 아쉽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우리 며느리가 아이 보면서 이만큼 차린 것만 해도 장하지.”

열찬씨가 흐뭇한 척 잔을 드는데

“아이고, 귀한 손님 오셨네. 안녕하셨어요?”

며느리의 어머니가 들어오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전라도 남원 출신이라 말씨가 서울사람이랑 다름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수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며

“우리 상미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차린 것은 없어도 많이 먹으라는 투로 이야기를 하자

“먹은 것도 없이 배부르다는 말이 있잖아요?”

영순씨의 말투에서 어딘가 묘한 뉘앙스가 풍겼다. 말은 않지만 안사돈이 상을 본 것이 분명한데 모처럼 바깥사돈을 맞는 것으로 좀 아쉽다는 느낌, 결혼식을 앞두고 혼수가 아쉬워도 너무 아쉬워 아까운 아들만 빼앗긴다고 장탄식을 하던 그 앙금이 아직도 남은 모양이었다. 조금 있다가

“아이구, 사돈 오셨습니까?”

바깥사돈 박문규씨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고생하셨지요? 멀리서 오시느라?”

손을 잡고 술을 따르는 게 친절하고도 진실했다. 결혼식을 치르고 돌아와 자리에 눕는데 전화가 와서

“저 박문균데요.”

알듯 말 듯한 목소리의 전화가 와서 한참 더듬던 열찬씨가

“박문규씨라? 우리가 헤어진 지 한 20년이 되었는데 그래 소식을 들었던 모양이지?”

서구청 감사계장시절 이웃 기획계의 직원을 떠올리는데

“저 그게 아니라 상미 아버지 박문귭니다. 사돈.”

“예에?”

“혼수도 변변찮은데 또 이렇게 답례 금을 다 주시고.”

“아, 예. 뭐 약소합니다만.”

“아니올시다. 너무나 과분합니다. 다음 뵈면 꼭 인사할 게요.”

예단 비 2천만 원을 받아 천만 원을 도로 돌려보낸 뒤 정말로 감사하다고 고마운 정이 뚝뚝 흐르는 전화가 오더니 이번에도 며느리가 조상 앞에 올리는 상 음식을 보낸 데 대한 답례로 돈 백만 원을 보낸 데 대한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집에 돌아와 상 음식을 열어보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아이구야! 전라도가 음식하나는 잘 한다는데 어째 상음식이 이 모양인가? 안사돈이 손이 작은가?”

영순씨가 한숨을 푹푹 쉬었던 것이었다. 열찬씨와 다섯 살 아래인 박문규씨는 사람이 착하고 신실해 열찬씨를 대하는 것이 마치 사촌형제나 되는 것처럼 공손하고 진실했다. 마치 형제처럼 다정히 술을 마시는데 비해서 옆에서 차를 마시는 두 안사돈은 저녁 내내 팽팽하게 기 싸움을 펼치는 것만 같았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영서랑 가화랑 우당탕탕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생에게 제 부모를 뺏기기나 한 듯이 현서를 보기가 소 닭 보듯 하던 영서가 사촌 가화에게 얼마나 친절한 지 그냥 동생과 놀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옛날 어머니 명촌댁이 말로 그야말로 홅고 빠는 형상이었다. 토요일이라 쉬는 날이라 천천히 걸어 독립문을 구경하고 서대문형무소도 멀찍이 바라보며 천천히 걸아 다니며 한 나절을 보내고 아직 솜씨가 없는 며느리가 안쓰러워 골목 앞 식당이라고 들어간 게 마침 고기를 구워 파는 식당이었다. 영순씨가 간단히 삼겹살이나 구워먹고 된장찌개로 끼니를 때우자는 말에

“그래도 모처럼 서울나들이고 며느리대접인데...”

가격표를 흘낏흘낏 쳐다보며 쇠고기갈비 5인분을 시켰다. 주택가의 식당이라 그런지 많이 비싸지는 않아 10만 원이면 고기값은 될 것 같았다. 영순씨가 저녁에 가화 돌잔치를 하면서 비싼 한정식을 먹을 테니까 3인분만 시키자고 했지만 일단 음식의 양이 적어보이면 배가 부르거나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다시 입에 대지 않는 영순씨를 생각해서 넉넉히 시킨 셈이었다. 노릇하게 고기가 익어 먼저 맛을 본 영서가

“가화야 먹어봐라. 서울소고기 참 맛있다.”

하면서 짧게 찢어 입에 넣어주고 아이가 또 오물거리며 먹는 것이 보기 좋아 기분이 좋아진 열찬씨가

“자 먹자. 우리 며느리도 많이 먹고.”

하며 소주를 부어 어른 넷이 건배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리며

“아이구, 사돈어른 어디계십니까? 제가 점심이라도 대접하려고 보니 집에 안 계셔서.”

“아, 예. 아이들이랑 독립문을 둘러보고 바람 쐬고 오는 길에 마침 집앞 식당인데 잘 됐네. 이리로 오시지요.”

즉석에서 초청하자 영순씨와 상미씨가 동시에 긴장이 되어 눈꼬리가 올라가는데

“예. 당연히 제가 대접해야지요.”

하던 사돈이 채 5분도 안 되어 들이닥치며

“아이구, 사돈어른!”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해 자리에 앉히는데

“안녕하세요?”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안사돈도 배시시 웃으며 옆에 앉았다.

“자, 사돈도 오셨으니 고기 3인분만 더!”

“예. 사돈어른 천천히 넉넉히 드십시오. 늘 이렇게 한번 모신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밤에 상미엄마랑 자면서 오늘 돌잔치가 끝나고 어디로 모실지 노래방도 하나 예약하자고 했습니다.”

“아이구, 고맙습니다. 오늘은 우리 가화를 봐준다고 고생이 많은 사돈 두 분께 제가 대접을 해야지요.”

“아닙니다. 저는 아직 직장에 다니고 돈도 벌고 또 나이가 젊어 당연히 대접해야 되고...”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는 사이에 영서와 상미씨가 부지런히 고기를 먹고 사부인도 슬쩍슬쩍 집으며 소주도 권하는 대로 서너 잔이나 마셨다. 성격이 밝고 활달한데다 특히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해 오늘 저녁엔 형님 같은 사돈과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며 사돈이 잔뜩 신이 났다. 고기를 추가로 3인분 더 시키고 된장찌개와 밥을 먹다 문득 영순씨가

“참, 사장어른식사는?”

막내딸인 안사돈이 모시는 며느리의 외할머니를 챙기는데

“장모님은 나오면서 식사 챙겨드리고 왔어요. 몸이 불편해서 밖에 잘 나오시려고도 않고요.”

하며 밥을 먹는데 맞은편의 영순씨가 탁자 밑으로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신용카드가 꽂힌 휴대폰을 탁자 밑으로 밀어주자 화장실을 가는 척 영순씨가 일어섰다. 바로 옆에서 슬쩍 쳐다보던 안사돈이 밭사돈에게 눈짓을 하자

“아이구, 사돈!”

밭사돈이 황급히 일어났지만 영순씨가 이미 계산을 마친 뒤였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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