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피에드포르(이하 생장)의 알베르게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산책하러 나갔다. 거리는 어두웠고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30분가량 왔다 갔다 하다가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식당으로 가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이 있었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오전 8시 반쯤 알베르게를 나왔다. 지금은 비수기에 접어들어 도착지인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는 183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공간이어서 숙소를 잡지 못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료에 나와 있다.
바깥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 인근 가게에서 가방까지 덮는 큰 비옷을 사려고 들어갔다. 그런데 어떤 상황 때문에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피레네산맥을 넘을 건데 비옷 없이 어떻게 하지? 큰일이네’라고 걱정하며 출발했다. 이 루트는 거리가 24.2km이고, 높이가 1,427m이다. 조금 가니 카페가 있어 들어가 산맥을 넘으면서 먹을 간식과 점심거리를 샀다.
여하튼 알베르게에서 직선으로 계속 걷다 보면 길이 오른쪽으로 약간 돌면서 본격적인 산티아고 길에 접어든다. 넓은 포장길이다. 몇 분 더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본격적인 순례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오전 9시 6분이다. 소위 ‘나폴레옹 루트’라고 불리는 길을 걸을 것인지, 좀 더 편한 길인 발카를로스(Valcarlos) 루트를 걸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11~3월에는 나폴레옹 루트는 폐쇄된다. 눈이 많이 쌓여 걸을 수 없다. 이를 무시하고 순례자들이 이 루트를 걷다 종종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이 구간은 180m에서 1,427m까지 계속 올라간다. 또한 이 루트는 갈림길이 많아 길을 잃고 헤매다 사망에까지 이르는 사고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루트는 폐쇄 기간이 아니더라도 눈이 오거나 안개가 많이 낀 날의 경우 이 루트를 피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행하다가 길을 잃었을 경우 아래로만 내려오면 도로를 만나고 마을을 만난다. 하지만 피레네산맥은 우리나라 산과는 지형 자체가 다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피레네산맥의 면적만 해도 30,639ha이다.
필자는 나폴레옹 루트로 택해 걸었다. 우리나라 순례자들의 경우 대개 이 루트를 택해 걷지만 다들 “죽을 것 같았다”고 말한다. 날씨가 맑은 날 그냥 걸어도 고생하는 길이다.
순례길로 접어들면서 배낭의 옆 망(網)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우산을 폈으나 비바람이 워낙 심해 손잡이와 우산의 살을 연결하는 지지대가 금방 부러져버렸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도 ‘죽음의 루트’라고 불리는 길을 비바람 속에서 걷는다는 건 대단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다. 부러진 지지대를 손으로 붙잡고 걸으니 이제 우산의 살이 바람에 망가지고 뒤집어져 버렸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금방 옷이 젖고 배낭에 레인 커버를 덮어씌웠으나, 옆의 틈으로 비가 스며들어 안에 들어 있는 옷 등이 젖어 든다는 걸 느꼈다.
모든 순례자가 큰 비옷을 준비해 배낭까지 덮고 얼굴까지 가려 추위와 비를 막았다. 그런 비옷을 미리 준비해 와 입은 사람은 필자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대부분 생장에 도착해 비옷 등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다. 필자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생장 도착 시간이 저녁 8시 무렵이어서 등산용품을 파는 마트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피레네산맥은 계속된 오르막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산처럼 경사가 급하지 않고 오르막이 지루하리만큼 길게 이어진다. 지리산의 경남 산청군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처럼 힘들더라도 차라리 화끈하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비바람을 막아주는 숲도 없다. 능선이어서 아래에서 몰아쳐 오는 바람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구불구불 고개를 오르면 또 굽이진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양옆으로는 경사진 목축지이다. 비가 퍼붓는 데도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 벌써 지겹다는 생각이 조금씩 생긴다. ‘오리손(ORISSON) 알베르게’가 2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이 알베르게까지 생장에서 보통 8km 거리라고 한다. 여기서 1km를 더 가면 ‘보르다(BORDA) 알베르게’가 있다. 오전 10시 28분이다. 생장에 일찍 도착하는 순례자의 경우 피레네산맥 루트가 너무 힘들어 미리 오리손이나 보르다 알베르게까지 와 자고 일출을 본 후 출발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이 두 곳의 알베르게는 예약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데다 운무가 많이 끼어 먼 거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 비바람에 과연 무사히 산맥을 넘을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계속 들었다. 이 루트를 넘다가 죽은 순례객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필자는 산티아고로 오기 전부터 여러 사이트와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자료를 읽고 나름대로 숙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Buen Camino’앱과 ‘Camino Ninja’ 앱을 깔아 지도 및 길까지 검색했다. 축축한 흙길이 나타났다. 이런 길은 발이 푹푹 빠져서 걷는데 피로감을 더 느낀다. 이제 겨우 1시간 20분가량 걸었다.
오전 11시 17분, 오리손 알베르게가 보였다. 여기서 30분가량 더 올라가니 오른 편에 죽은 순례자를 위한 돌무덤(?)이 있었다. 실제 무덤인지, 아니면 순례자가 죽은 지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숙연하면서도 겁이 났다. 필자도 애도하는 마음에서 옆을 살펴 자그마한 돌 하나를 주워 얹어주었다.
뒤따라오던 순례자들이 모두 앞서서 갔다. 저 앞에 가는 순례자가 운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필자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긴 편이지만 걸음이 무척 느리다. 게다가 사진까지 찍으면서 가니 더 느릿할 수밖에 없다. 이제 혼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야 한다. 앞뒤로 아무도 없다. 그러지 않아도 노트북까지 배낭에 넣어 엄청 무거운 데다 비에 젖어 벌써 어깨를 짓누른다. 나폴레옹도 이 산맥을 제대로 넘지 못했다고 하지만, 필자는 ‘지리산 종주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백두대간도 탔는데’라며 스스로 위로하며 걸었다. 안경이 빗물에 젖어 불편해 벗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계속해서 죽은 순례객의 돌무덤이 보였다. 죽은 순례자들은 ‘추위에 또는 길을 잃어 헤매면서 죽음이 다가왔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손톱만 한 작은 돌이라도 주워 얹었다.
900m 높이부터 추위가 심해졌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걷다가 죽을 뻔한 기억이 몇 개 있다. 오래전 실크로드를 걸을 때 당나귀 수레를 전세 내어(?) 사막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모래폭풍이 토네이도처럼 몰아쳐 오니까 수레를 모는 아저씨가 나에게 내리라고 하더니 혼자서 급하게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황당하고 위험천만한 일이 있었다.
또 신문사 기자 시절 6개월 연재 조건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을 취재하러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등으로 갔을 때 백두산 천지를 프롤로그로 쓰기 위해 밤에 얼어붙은 장백폭포를 거슬러 천지(天池)로 가다가 중국 군인들에게 총을 맞을 뻔하기도 하였다. 또 같은 취재를 하러 갔을 때도 총을 맞을 뻔한 기억이 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과 그의 가족 및 후손의 무덤이 있는 육정산(六頂山)의 고분군에 들어가 대조영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빈 무덤 가까이 갔을 때 위쪽 전망대에서 갑자기 필자에게로 총을 난사하였다. 놀라 사진을 찍지도 못하고 엎드려 각개전투하듯 기어서 고분군 밖으로 나와 멀리 대기하고 있는 지프차에 달려가 빠져나온 적이 있다.
또 이집트의 람세스들이 묻혀 있는 ‘왕가의 무덤’에 갔을 때 어느 아저씨가 친절하게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진 몇 장을 찍어주곤 인상을 험하게 쓰더니 “돈을 달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있으니 어디서 왔는지 남자 몇 명이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서 남자 한 명이 칼을 필자의 배에 갖다 대곤 옷 위에 꾹 눌렀다. 그러자 다른 남자들이 필자의 호주머니를 뒤져 있는 돈을 다 가져간 것이다. 너무 놀라 경황이 없었다.
여하튼 필자는 ‘죽겠나?’ 싶어 걸었다. 낮 12시 6분, 운무가 자욱해 앞이 제대로 분간이 잘되지 않는데 갈림길이 나타났다. 표지판이나 표식이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길과 직진하는 길 둘 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많았다. 겁이 덜컥 났다. ‘아, 여기서 길을 잃으면 나도 죽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무로 사위가 아주 뿌연 상황이었다. 예감으로 오른쪽 길이 맞을 것 같았다. ‘분명 무슨 표식이 있을 거다. 아니면 힘들더라도 되돌아 와 직진 길로 가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걸었다. 길을 꺾어 조금 가니 돌에 자그마한 표식이 나타났다. ‘앞으로도 이런 갈림길이 더러 있을 것이다. 주변을 잘 살피고 걸어야겠다’라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운무가 많이 끼어 작은 표식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1,000m나 되는 피레네산맥에서 비바람이 심한 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겁이 났을 것이다.
이어 질퍽한 능선이 이어졌다. 5분 더 가니 또 돌무덤이 비를 맞고 있었다. 벌써 몇 개의 돌무덤인지 모르겠다. 낮 12시 31분, 1,095m였다. 추위에 몸살기가 있고 머리에 열이 났다. 여기서는 되돌아갈 수도 없다. 계속 가야만 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은 낮아지고 비바람은 거셌다. 가방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져 양쪽 어깨가 너무 아프고 다리에 쥐가 내렸다. 아까부터 양쪽 장딴지에 경련이 일어나더니, 지금은 흔히 말하는 촛대뼈 양쪽 근육으로 경련이 와 아팠다. 발목도 심하게 아팠다. 양말뿐 아니라 신발도 다 젖어 축축하고 무거웠다.
계속 아무도 없이 혼자 걸었다. 문득 ‘하느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현재 무종교이다. 가톨릭 쪽에 제법 오랫동안 기웃거린 적은 있으나 세례는 받지 않았다. 한 종교에 묶이는 게 편치 않아서였다. ‘이 길은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할 때 넘던 산맥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 전에 종교적인 길이지 않은가?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걸었다고 하는 길이며, 전 세계의 수많은 가톨릭교도가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중세부터 걸었다고 하는 길이다. 그러면 그들의 영성이 이 길 위에 녹아져 있을 것이다.’
다른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길의 중간쯤 또는 그 이상의 길을 걸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든다던데, 필자는 1일 차 걸음부터 들었다. ‘어쨌든 무사히 넘어야 한다’라는 일념밖에 없었다. 프랑스 바욘역의 카페에서 아들 둘에게 쓴 엽서도 아직 부치지 못한 상태 아닌가? 저녁에 생장에 도착해 아침에 출발하다 보니 생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힘들 때마다 아들 둘을 생각하며 순간순간 견뎌왔다. 지금은 둘 다 결혼까지 한 상태지만 ‘자식은 언제나 자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3분 정도 더 가니 마치 큰 똥 무더기 같이 생긴 바위에 흰색과 빨간색이 표식돼 있었다. 피레네산맥 구간에는 이 표식이 많았다. 폴란드 국기를 연상시키는 이 표식은 순례길 표시라기보다는 유럽 트레일 표시라고 한다. 이 트레일 표식이 여러 방향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순례길 표식이 같이 표시되어 있다. 순례길 표식을 따라가면 된다.
오후 1시 38분, 커다란 돌무덤이 있다. 옆에 표식이 있다. 여태 오던 길을 버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을 택해 걸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물웅덩이 같은 길이다. 3분 정도 질퍽거리며 걸어가니 철(鐵)로 테두리를 한 비석 같은 게 나타났다. 한기가 심하고 1분이라도 빨리 론세스발레스의 알베르게에 도착해야 하므로 비석같이 생긴 바위 아래에 적혀 있는 글을 볼 겨를도 없이 지나쳤다.
걸을수록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점점 걸음이 느려졌다. 오후 1시 51분, 현대식 느낌이 나는 노란색의 둥근 표식이 나타났다. 표식에 생장에서 15km를 걸어온 것으로 돼 있다. 아직 9km를 더 가야 한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기적이다. 육체는 이미 지쳐 무력한데 정신력으로 육체를 끌고 온 느낌이다. 진흙탕에 발목까지 신발이 빠져들었다. 오후 2시 13분, 1,275m에 이르렀다. 앞은 잘 보이지 않는 데 길옆에 무슨 움직임이 있다.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곰일까?’ 그런데 ‘스틱이라는 무기가 있지 않은가?’ 스틱을 들고 ‘찔러 총’ 하기 전 자세로 든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로 필자가 서 있는 앞 길가에서 양들이 소리 없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높은 곳에 그냥 방목해 놓은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오후 2시 17분, 로랑드(ROLAND)라고 적힌, 물이 나오는 수도(水道)에 도착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물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아침에 출발할 때 선식을 조금 먹은 게 전부였다. 생장에서 출발하면서 빵집에 들어가 산 그다지 길지 않은 바게트 한 개가 있었다. 그런데 어깨가 너무 아파 잠시 배낭을 잠시 벗었는데, 그 순간 옆 시내에 빠져버렸다. 주우니 벌써 개울물과 빗물에 젖어 뭉개져 버렸다. 그리하여 물도 없는 데다 바게트까지 잃어버려 여기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빈속으로 온 것이다. 물을 마시고 출발하니 더 추워 물에 빠진 생쥐처럼 몸이 더욱 벌벌 떨렸다. 물이 아주 차가웠는데, 그걸 많이 마셔서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고통스러웠다.
오후 2시 29분, 또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 길로 표식이 있는데 오른쪽 길의 돌에도 직진 표식이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오른쪽의 방향 표식은 남자 한 명이 번쩍 들면 들 수 있는 돌에 노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데, 누군가 그곳에 일부러 갖다 놓은 것처럼 보였다. 좀 더 확실해 보이는 왼쪽 길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덜덜 떨면서 한참을 걸어가니 운무 속에 자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일반 가정집은 아니고 돌로 지은 자그마한 피난처 같아 보였다. 너무나 반가웠다. ‘이곳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잔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웬 남자였다. “추우니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들어가니 담요가 깔려 있고 아래쪽에서 시커먼 개가 한 마리 나오는 걸 보니, 이 남자는 여기서 하룻밤을 잔 것 같았다. ‘이 추운데 어떻게 여기에서 잤을까?’ 싶어 보니 화로에 불을 지핀 흔적이 있었다. 프랑스 사람인 그 남자 역시 “너무 춥습니다. 너무 춥습니다”라는 말만 연달아 했다. 그 역시 순례자로 보였다. 그는 “론세스바예스까지는 6km정도 더 가야합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길이지만 정말 지루한 길이 이어진다. 대피소에서 나오니 또 갈림길이다. 아래쪽 길로 들어섰다가 아닌 것 같아 되돌아와 윗길로 걸었다. 표식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돌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능하면 핸드폰을 비에 젖게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진 찍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비에 노출되었다. 빗물이 들어갔는지 핸드폰이 꺼져버렸다. 빨리 숙소에 도착하여 말리고 물기를 닦아 켜지도록 해야 했다. 배낭에 든 노트북도 걱정이었다.
대략 30분쯤 걸어가니 철(鐵)로 만든 무슨 작품 같은 게 서 있었다. 뒷면을 보니 전체 피레네산맥에서 현재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고, 응급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제는 핸드폰도 작동되지 않아 만약에 필자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꼼짝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할 상황이었다. 다행히 여기부터는 본격적인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이어서 반갑기는 하지만 돌길인 데다 바윗길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다리는 풀린 상태였다. 피레네산맥에 오르는 길은 대체로 평탄한 길이지만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 편이었다. 문제는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었다. 사람 한 명 없으니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무슨 길이 이렇게도 긴 걸까? 예전에 지리산 대원사에서 산행을 시작해 천왕봉에 올랐다가 칠선계곡으로 내려가던 생각이 났다.
정말 정신력만으로 걸었다. 육체적으로만 걸었다면 벌써 쓰러져 어떻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다 났다. 그러지 않아도 머릿속에 엉켜있는 생각들이 많은데, 아침에 받은 충격으로 인해 길을 걷는 내내 머리와 가슴을 짓눌러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바윗길을 걸을 때 발이 들리지 않았다. 피레네산맥을 넘어오면서 세상에 있는 길이란 종류는 다 걸었던 것 같다. 평탄한 길, 진흙탕 길, 돌길, 부드러운 흙길, 마치 늪처럼 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질퍽한 길을 걸었다.
마침내 론세스바예스건물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 죽음의 길이라고 불리는 피레네산맥을 정말 위험하게 넘어왔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건물이 보이자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어 길옆에 풀썩 주저앉아 울었다. ‘아, 돌아가신 어머님이랑 조상님들이 또 나를 도와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비종교인인 내가 시험을 이겨낸 것일까?’라는 생각도 얼핏 스쳤다. 필자가 프랑스 파리로 출발한 다음 날이 어머님 기일이었다. 어찌하다 보니 일정이 그렇게 잡혀 바꿀 수도 없었다. 다행히도 남동생이 필자의 집 아래쪽인 화개버스터미널 옆에서 카페를 하고 있어, 그가 거주하고 있는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장남이 어머님 제사도 지내지 않고 여행을 떠나온 게 옛날 같으면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동생에게 미안했다.
비는 이제 거의 그쳤다. 겨우 힘을 내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스틱을 짧게 잡고 엉금엉금 걸어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오른쪽에 레스토랑 건물이 있고 바로 도로였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되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알베르게라고 쓰인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이 꺼진 상태여서 위치 확인이 되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일단 아래로 걸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다시 되돌아 레스토랑 건물 쪽으로 왔다.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많으나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서성거리며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아래 도로로 걸었다. 위쪽으로 건물이 있는데 알베르게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아래로 가는 도로 길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레스토랑 건물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한기가 심한 채 그 건물 앞에 벌벌 떨면서 한참 서 있으니 마침 앞쪽에 차가 한 대 섰다. 4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리길래 다가가 “알베르게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니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이 레스토랑 뒤쪽에 성당이 있는데, 그 안쪽으로 계속 가서 오른쪽으로 가세요”라고 했다. 그때에야 ‘아, 여기가 그 성당 알베르게구나’라는 생각이 났다. 사전 정보를 조회할 때 사진으로 봤던 곳이다. 그런데 레스토랑 건물 앞에서만 도로 쪽을 봤으므로 건물 뒤쪽에 있는 성당을 미처 보지 못했다.
성당 안쪽으로 들어가 여쭤보니 알베르게가 맞았다. 안으로 들어가 등록했다. 아직 여분의 방이 많다고 했다. 배정받은 2층의 213번 공간으로 들어갔다. 입구 문은 없었다. 새로 리모델링을 해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너무 허기져 헤매면서 본 레스토랑으로 갔다. 시간을 보니 오후 6시 반쯤 되었다. 레스토랑의 바(BAR)에서 설탕을 넣은 뜨거운 커피를 한잔 마시기 위함이었다. 필자는 당뇨가 심한 편이어서 저혈당이 오면 안 되었다. 피레네산맥을 넘어오면서도 그게 걱정이었다.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를 한잔 마시고, 그곳에서 파는 초콜릿을 사 먹어 당분을 보충했다.
그런 후 바로 숙소로 돌아와 옷을 벗고 누었다. 론세스바예스에는 순례자들의 숙소가 이곳밖에 없었다. 모든 게 다 젖었다. 배낭 속에 든 걸 꺼낼 힘이 없었다. 침낭을 깔았다. 침낭도 많이 젖어 있었다. 그대로 침낭 속으로 들어가니 온몸이 아프고 한기가 들어 몸살기가 심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운 채 핸드폰을 들어 물기를 털고 닦은 후 머리맡의 콘센트에 충전기를 꽃았다. 핸드폰의 배터리처럼 증발해버린 체력과 정신력이 다시 충전되기를 바랐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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