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간으로 17일 오후 8시 20분 생장 피드포르(SAINT-JEAN-PIED-PORT)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ALBERGUE)였다. 도착하니 자그마한 식당 테이블 3개에 순례객들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정된 룸에 가니 2층으로 된 철(鐵)침대 5개에 한 자리를 빼곤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필자의 침대는 입구 문에서 룸으로 들어서면 두 번째에 있는 침대였다. 1층엔 다른 순례객이 누워 있었고, 필자의 자리는 2층이었다.
얼른 씻고 커피를 한 잔 마시러 식당으로 왔다. 이 숙소에 샤워시설은 화장실 내에 하나밖에 없었다. 화장실 문이 닫히지 않은 데다 좁은 공간의 바닥에 물이 빠지지 않아 씻는 둥 마는 둥 몸에 물만 적시고 얼른 나온 것이다. 테이블에 앉아 가지고 온 노트북을 켰다.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5일 아침에 경남 하동군 화개면 목압마을에 있는 집에서 나와 화개장터 인근 화개버스터미널에서 오전 9시 55분에 출발하는 서울 남부터미널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해 여의도에 있는 은행에 가 볼일을 본 후 인근 카페에서 3시간 넘게 노트북으로 글을 썼다. 그런 후 저녁 7시 30분에 옆 식당에서 큰아들 조현일(35) 내외와 작은아들 조현진(32) 내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함께 산티아고에 동행한 남곡(南谷) 여기성(余己星·76) 선생님도 참석했다. 저녁 식사 후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여 선생님 댁에서 함께 잤다. 이튿날 아침 8시까지는 공항에 가야 해, 같이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 후 이튿날인 16일 오전 10시 10분에 인천공항 1터미널에서 파리 드골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 프랑스 시간으로 16일 오후 6시 10분께에 드골공항 1터미널에 도착했다. 프랑스가 한국보다 5시간 늦다. 한국시간으로는 17일 오후 1시 10분께 도착했으니 15시간이 걸린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부친 배낭을 찾은 후 바욘(Bayonne)으로 가는 심야버스를 타려고 3터미널쪽으로 갔다. 그곳에서 버스 운전기사와 관리 요원에게 “바욘 가는 버스 어디서 탑니까?”라고 물어봐도 모두 “잘 모르겠습니다”고 했다. 그리하여 필자가 인터넷에 들어가 저녁 8시 30분에 파리에서 바욘으로 출발하는 ‘플릭스버스(FlixBus)’ 표를 2장 예매했다. 원래 ‘BlaBlaCar(블라블라카)’ 표를 예매하려고 했는데 인증이 잘 되지 않아 플릭스버스를 예매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파리 ‘CDG 공항’에서 출발하는 표를 예매해야 하는데, 출발지에 CDG공항이 없고 ‘파리’가 화면에 떠 출발지를 ‘파리’로 한 것이다. 이때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스터미널에서 파리에서 박사 공부를 한다는 한국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니 “출발지가 ‘파리’가 아니고 ‘CDG공항’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해 취소하려고 하니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출발 10분 전인 8시 20분이 되었다. 15분 전에 취소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지난 것이다. 결국 여 선생님과 필자의 표를 아깝게도 날려버렸다. 그 박사 과정생이 도와주어 2시간 가까이 핸드폰을 붙잡고 씨름한 끝에 밤 10시 10분(현지 시간)에 바욘으로 출발하는 플릭스버스를 예매했다. 이건 가격이 더 비싸 두 사람에 194유로였다. 타는 곳 ‘G’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우리나라 버스보다 높고 길었다. 오르내리는 계단 옆에 화장실이 있었다.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가운데 버스는 두 번 쉬고 계속 달렸다. 버스가 바욘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다음날인 17일 낮 12시 20분께였다. 장장 14시간 동안 버스를 탔던 것이다. 바욘으로 오는 동안 도로가로 불어난 강물이 황토색으로 출렁거리며 흘렀다. 소박하고 예쁜 소도시를 지나기도 했다. 동쪽인 한국과 달리 프랑스는 서쪽이어서 해가 오전 8시 반쯤에 떴다. 한국보다 2시간가량 늦게 떴다.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탓에 해는 뜬 것 같으나 어두웠다. 드디어 버스는 바욘역을 조금 지나 정차했다. 내린 곳에서 바욘역까지는 5분가량 도로를 따라 되돌아와야 했다.
바욘역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표를 구입하니, 오후 5시 13분에 출발하는 것이었다. 대합실에서 한국에서 이틀 먼저 프랑스로 와 파리를 구경하고 온 노상천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와 생장으로 가는 같은 기차를 탄다고 했다.
필자는 여 선생님과 역 바로 옆에 있는 ‘KTRAIL’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밥도 먹기로 했다. 비가 많이 내려 다른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가기는 불편했다. 점심 겸 저녁으로 이것저것 시켜 먹으며 여 선생님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이 일주일에 한 번꼴로 지리산을 타면서 “산티아고에 갑시다”라고 합의를 봤던 것이다. 여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로 ‘요한’이라는 세례명이 있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산티아고 길을 완주하려고 관련 책을 사보고, 여러 편의 산티아고 주제의 영화를 보면서 버킷리스트로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출발하기 사흘 전인 지난 13일 남곡 선생님이 불일폭포를 다녀오시곤 “심장이 이상하다”며, 병원으로 갔다. 먼저 하동 중앙의원에 가니 “큰 병원에 가 보시라”라고 해 광양서울병원에 갔다. 그곳에 가니 다시 ‘큰 병원에 가 보시라’고 해 순천의 성가오로병원에 갔다. 그 병원에서도 “큰 병원에 가 정밀검사를 받아 보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 시간에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병원을 나섰다.
여 선생님은 하동중앙의원에 차를 세워둔 채 119구급차를 타고 다녔다. 그리하여 필자가 밤 9시 반쯤 순천까지 여 선생님을 모시러 갔다. 하동으로 돌아오는 필자의 차 안에서 여 선생님은 “저도 산티아고에 꼭 가고 싶었는데,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지금 상태에서는 꿈도 꾸지 마시라고 해 포기를 했습니다. 혼자 다녀오십시오”라고 했다.
다음 날인 14일 여 선생님은 서울의 모 병원에 가 진찰을 해보니 의사 선생님이 “괜찮습니다. 산티아고 잘 다녀오세요”라고 해 “다시 산티아고에 가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리하여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산티아고(Santiago)가 무슨 뜻인지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스페인어로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제자(베드로·요한·야고보) 중 한 분인 야고보를 일컫는다. 야고보를 라틴어 표기인 Iacobus에서 유래한 ‘이아고(Iago)’라 하였는데, 앞에 성인을 뜻하는 ‘산토(Santo)’가 붙으면서 ‘산토 이아고(Santo Iago)’, 이것이 변하여 산트 이아고(Sant Iago), 산티아고가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걸을 ‘산티아고 순례길’(Santiago de Compostela·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은 800km로, 스페인어로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즉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유럽 각지에서 출발한 길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부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향한다.
여하튼 여 선생님과 식사를 하면서 커피를 마시다 옆 바욘 역 구내 매점에 가 바욘의 전경을 담은 엽서 2장을 샀다. 카페에 앉아 큰아들 내외와 작은아들 내외에게 각각 한 장씩 썼다. 아들 둘에게 엽서를 써 보내는 건 필자의 오랜 습관이다. 엽서를 써 매점에 가니 한국으로 보낼 적절한 우표가 없다고 했다. 거기서 우표를 붙여 인근 우체통에 넣으면 되는데 말이다. 할 수 없이 생장에 가 보내야 될 것 같았다.
여 선생님과 카페에서 나와 역대합실에 좀 앉아 있다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객차는 두 량으로, 마침 승객들이 다 앉을 수 있었다. 30분 정도 갔을까? 기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승무원이 전화를 받고 왔다 갔다 하더니 “지금 비가 많이 내린 탓에 철로에 문제가 생겨 아마 운행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기차가 정차한 곳은 CAMBO-LES-BAINS라는 조그마한 역이었다. 여기서 내려 버스로 생장까지 가실 분은 내리시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30분가량 기차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승무원이 다시 “기차에서 모두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버스를 불렀습니다. 밖에 나가 기다려 버스가 오면 타고 가십시오.”라고 했다.
바깥에는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20분가량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버스를 타고 생장까지 40분을 달렸다. 기차를 타고 갔으면 놓칠 뻔했던 산골의 아름다운 마을 풍광들을 차창으로 보았다. 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산골마을의 주택들, 그리고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 급하게 흐르는 계곡 등을 눈에 담았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겠지만, 필자 역시 지리산 산골에 살아 이곳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버스를 타고 산골투어(?)를 하지 않았으면 억울할 뻔했다.
버스는 생장역 앞에 정차했다. 생장역에서 순례자 사무실로 갔다. 그곳에서 순례에 대한 유의사항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2유로를 내고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성의껏 돈통에 돈을 넣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조개껍질을 한 개 얻어 배낭에 매달았다. 첫 순례 도장을 여기서 받았다. 앞으로 들리게 될 알베르게에서 순례 확인 도장을 받게 된다.
사무실 직원의 소개로 사무실 위쪽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알베르게의 출입구 문에 번호가 붙어 있는데, 우리가 묶는 알베르게는 55번이었다. ‘알베르게’란 스페인어로 숙박소이다. 카미노에서의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이 이용하는 전용숙소를 의미한다. 한 룸에 놓인 여러 개의 2층 침대에서 다른 순례객들과 잠을 잔다. ‘카미노(CAMINO)’는 스페인어로 ‘길’이란 뜻이다. 예전에는 키메라(Chimera)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상표 문제 때문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식당 식탁에 앉아 브라질에서 온 잰(JANE·30)이라는 청년을 만났다. 키가 커 인물이 좋은 데다 성격이 아주 시원시원하고 아무에게나 말을 잘 붙였다.
많이 피곤하지만 밤 늦게 급하게 산티아고 순례의 프롤로그를 쓴다. 프롤로그에서 다 못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연재하는 글 속에 녹여낼 생각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