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98)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21장 교장선생님의 욕심과 의심치매(7)

이득수 승인 2025.01.17 10:56 의견 0
[제자 서상균]

21. 교장선생님의 욕심과 의심치매(7)

목숨보다 더 귀한 단 하나의 아들 우현씨를 찾아 헤매도 아무 성과가 없어 숨만 붙어있지 이미 산목숨이 아닌 것 같은 김해댁이 영주3동 뒤새마을 언덕배기 청석위의 슬레이트집으로 돌아왔지만 무엇 하나 반기는 것 없이 찬바람만 생생 맴돌았다. 방이 세 개나 되어 일찬씨가 기거하던 안방과 아이들이 커 나간 아랫방을 비우고 잘 나가던 시절 뒤새마을에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비싼 침대를 놓고 분홍빛 천에 하얀 레이스를 매단 화려한 커튼을 친 방에 혼자 누우면 길가 집이라 간혹 지나가는 자동차소리 행인들의 발걸음이 뚝 끊기는 밤 10시쯤 이 너른 세상에 혼자 버려졌다는 생각, 망해도 너무 망했다, 이 좋은 세상에 왜 나만, 내 피붙이만 이렇게 처절하게 망하고 고생을 하는지 회한이 밀려왔지만 어디 하나 원망할 데도 없었다.
전화로 울며불며 하소연을 하면 귀찮아도 말대꾸를 하며 동정을 하고 가끔 찾아오거나 용돈을 부쳐주는 친정오빠와 조카, 시동생 백찬씨도 울음바탕이 잦아지자 점점 시큰둥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이미 나이 칠십에 무릎도 허리도 좋지 않고 마음이 허랑해 조그만 일에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잘 놀래고 텔레비전에 슬픈 사연이 나오면 덩달아 눈물이 나는 것은 물론 사슴 한 마리가 사자에게 잡아먹혀도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남 같으면 넉넉한 살림에 착한 자식, 귀여운 손자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느긋이 살 나이에 이 너른 세상천지에 오로지 자신만이 홀로 버려진 것만 같았다. 연속극도 아홉시 뉴스도 다 시들해 저녁 열시 <가요무대>에 집중해보아도 즐거운 노래는 남의 일 같고 슬픈 노래는 억장이 무너져 채널을 돌리고 억지로 눈을 붙여 설핏 잠이 들 때면 꽤액, 기적을 울리며 떠나가는 영암선의 기차소리가 잠을 깨웠다.
(그래 너도 나처럼 잠을 못 이루고 태백산 따뱅이굴을 뱅뱅 돌며 밤새 헐떡이겠지, 그래도 너는 찾아갈 역이 있고 돌아갈 역이 있고 깃발 들고 맞이하는 역무원과 승객들과 환송객이 있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경남하고도 김해군 이북면 명동리 금음부락 천하의 이 맹정자가,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무식쟁이가 고등학교를 나온 농협직원에게 시집간다고 온 동네가 떠들썩하고 나중에 이선생사모님이 되어 뒤새마을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내가, 이 맹정자가 말이다...)
돈이 많아 술 잘 살 때 그 많던 친구가 돈 떨어지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도망간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기라도 한 듯 요즘 김해댁에겐 그렇게 날마다 찾아와 사모님소리를 달고 살던 마을아낙들도 통 찾아오지 않고 고스톱판도 잘 벌어지지 않으니 온 몸에서 담배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꼴에 사내라고 과수댁인 자신을 흘금흘금 쳐다보던, 같잖고 징그러우면서도 결코 싫지 않던 눈빛의 영감들도 일절 발걸음이 없었다. 살림도 빠졌지만 청춘이 지나간 것이었다. 아무리 가꾸어도 주름이 지고 머리가 세고 이빨을 몇 개나 갈아 넣은 목덜미가 쭈글쭈글한 노파에게 여자를 느끼고 눈빛이 몽롱해질 사내는 없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날마다 김해댁을 승용차에 태워 안동으로, 풍기로, 단양 도담삼봉으로, 제천 청풍사로 돌아다니며 술과 밥을 사고 눈을 빛내다 좁은 뒤새바닥에 고약한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 건축업자 김사장도 일절 연락이 없었고 길에서 스쳐도 차에 탄 사내나 쳐다보는 아낙이나 그저 소 닭 보듯이 했다.
그렇게 암울한 시간이 흘러가던 중 희한한 반전이 하나 찾아왔다. 철도부지가 일부 들어간 뒤새마을 언덕배기 청석위의 집이 철로가 확장되면서 수용이 된 것이었다. 집을 산지 30년이 훨씬 넘도록 집값이 올라가기는커녕 도로 내려가는 소도시의 달동네, 그마저 하나둘 도로가를 지키던 이발소와 구멍가게까지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는 마을, 늙은이들이 죽고 나면 다시는 자식도 들어오지 않고 팔리지도 않아 그대로 폐가가 되어 마을전체를 쓰레기장으로 화한 판국에 수용자 몇이 철도청에 찾아가 항의를 함으로써 공시지가는 물론 시가의 두 배가 넘는 거금으로 팔린 것이었다. 졸지에 2억 가까운 큰돈을 쥔 김해댁은 우선 다달이 비싼 이자를 물어야했던 우현씨가 남기고간 은행 빚 3천만 원을 갚고 지은 지 30년이 넘은 수원의 연립주택도 손볼 곳을 손보고 도배를 다시 하고 상미의 대학등록금등 급한데 쓰게 2천만 원을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평생의 골칫거리, 찔뚝없는 할머니 명촌댁과 기거해도 말 한마디 없이 할머니를 챙기며 참 착하게 자랐는데도 무슨 팔자가 그리 기박한지 죄 많고 탈 많은 어미인 자신을 닮았는지 몸을 다쳐 간호사 일을 못 하고 겨우 병원서무로 지내다 뜻밖에도 집안 좋고 인물 좋은 양서방을 만났는데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그 부잣집막둥이는 아이 둘만 안기고는 혼자 천지강산을 떠돌다 마침내 한쪽 눈이 완전 실명되고 남은 눈도 거의 안 보이는 반 봉사가 되어 더 갈 데가 없자 음성나환자촌 꽃마을에 소속된 병원의 행정을 보며 어렵게 남매를 키우는 현숙씨에게 다시 돌아와 아무 일도 못 하고 그냥 숨만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딸네 집에는 하나의 희망이 있었는데 아이 둘이 다 제 외할아버지를 닮았는지 공부를 잘 해 성적걱정을 하거나 학원 보낼 일도 없이 잘 자라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녀시절 간호사로 어렵게 번 돈을 여러 번 제 오라비 우현씨가 결혼을 하네 사업을 하네, 가져다 쓰고 다시 갚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려 거금 3천만 원을 주었다.
김해댁은 비로소 마음의 빚을 갚은 셈이었지만 숙현씨에게도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였다. 이제 두 눈이 다 완전 실명되어 죽은 듯 엎드려 있던 남편 양서방이 그 돈으로 작은 안마시술소라도 차릴 심산으로 안마기술을 배우러 나선 것이었다.
그러고도 남은 일 억여 원 중 8천만 원을 들여 뒤새마을 입구의 제법 깨끗한 단층짜리 양옥을 샀다. 이번은 오목하고 양지바른 언덕배기의 참한 집이였고 지은 지 10년 밖에 지나지 않아 특별히 손볼 곳도 없었다. 그 집 역시 한 때 제법 큰돈을 들여 뒤새마을에서는 잘 짓는다고 지은 집인데 영감이 죽고 혼자 남은 할멈의 기력이 쇠진해 아들이 서울로 모셔가면서 헐값으로 급매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김해댁이 집이 수용되어 보상금을 받아 새 집을 사고 형편이 나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옛날의 아낙들이 하나둘 이선생사모님을 부르며 새집으로 찾아들어 다시 고스톱판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제 옛날처럼 함부로 인심을 퍽퍽 쓰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원래부터 내가 내다 하고 뻐기는 걸 좋아하는 김해댁은 가끔 돼지고기를 사다 김치찌게를 끓이고 소주 한두 병을 사다 술밥을 먹이니 다시 땟물이 꼬질꼬질한 영감들도 찾아들고 건축업 김사장도 시장을 보러가는 김해댁 앞에 속도를 늦추며 차장을 열고
“사모님, 요새 형편 폈다면서 우리 언제 밥이나 먹을까?”
하고 눈을 찡긋했다. 사람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김해댁은 집에 사람이 끓기 시작하자 같이 밥을 먹고 화투장을 던지며 금방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금방 표정이 밝아지며 농담도 던지고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다시 정성들여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밤 10시가 넘도록 놀던 사람들이 돌아가면 <가요무대>를 틀어놓고 금방 잠이 들어 아침에 깨니 혼자 전전긍긍 밤을 샐 일도 없었다. 밥맛도 혈색도 다 돌아오고 가끔 절에도 다니며 비로소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지가 가면 어딜 가겠노? 설마 때가 되면 처자식을 찾아오고 이 어미를 찾아오겠지. 그 때 이집을 팔아 수원에 괜찮은 아파트라도 사고 저들끼리 재미있게 살면 나는 죽어도 그 뿐이지. 암 뭐 이렇게 살다 가면 되는 거지...)
칠십에 능참봉이라더니 진짜 나이 칠십이 되어 비로소 철이 들고 마음이 편해져 느긋하게 지내는데 그 손바닥만 한 평온도 지닐 형편이 못 되는지 또 다시 사단이 터졌다. 어느 날 뒤새마을 새집으로 예순 남짓의 스님하나가 찾아온 것이었다.
“혹시 보살님이 가우현씨 모친 되시는지요?”
집 앞에 목탁소리를 서너 번 내어 사람을 나오게 하고 이내 목탁치기를 멈추고 묻는데
“예. 스님. 지가 우현이에밉니다. 우리 우현이.”
하면서 금방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해지며
“우리 우현히 잘 있는가요? 살아있는가요?”
혹시라도 끔찍한 소식을 가져왔을까 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예. 잘 지냅니다. 비로소 마음을 잡고 용맹정진 수행중이라 곧 머리를 깎고 부처님께 귀의할 것입니다.”
“그, 그 말은 인제 스님이 되어 절에 산단 말입니까?”
“그렇지요. 속세의 인연을 끊고 불법의 나라에서 산다는 말이지요.”
“그럼, 다시 집에는 안 온단 말인데, 이 어미가 얼굴을 못 본단 말인데...”
것 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한참이나 흐느끼는데
“그래도 불제자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님과 가족들에게 기별이라도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라고 저를 보내서 말입니다. 다시는 서로 찾지도 만날 지도 말자며 어머니에겐 고맙고 송구하고 아내와 자식에겐 그저 미안하고 할 말이 없다고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이렇게 완전히 인연이 끝나는 것인가요? 어미가 죽거나 아이들 결혼식이 있어도요?”
“그렇겠지요.”
“안 됩니다. 스님 지가 스님을 따라 우리 현이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어서 같이 가십시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현이 얼굴을 봐야겠심더.”
김해댁이 스님의 손을 부여잡고 늘어지자
“보살님, 진정하시고 이 손 좀 놓으시지요. 이는 다 먼 옛날 부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운명이라 더는...”
“안 됩니다, 아, 안 됩니다. 현아, 이 무심한 자식아, 현아, 현아!”
아예 목을 놓고 꺼이꺼이 우는지라 견디다 못한 스님이
“보살님, 저 잠깐만 이 손을 놓아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아드님 대신 저의 전화번호라도 적어드리지요.”
하여 간신히 손목이 풀려나자 바랑에서 수첩을 꺼내 뭐라고 적고 종이 한 장을 북 찢어주는데 전화번호가 낯선 것으로 보아 스님의 전화번호인 것 같았다.
“아무리 급하고 중한 일이 있어도 다시 속세의 인연으로 하산하지 않는 것이 불제자의 도리인데 그래도 제게 이 번호로 자녀결혼이나 뭐 특별한 일이 있어 전화를 하시면 당자가 가든 말든 제가 일단 전해는 드리지요.”
하고 합장을 하는데
“고맙습니다. 스님.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더운 밥 지어 공양을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해안에 돌아가려면 길이 바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목탁소리를 서너 번 울리면서 스님은 돌아섰다.
(나무관세음보살...)
눈물이 흥건한 김해댁이 대문을 잠그고 방에 들어가 사람이 없는 집처럼 텔레비전까지 끄고 침대에 누워
“현아, 현아! 이 무심한 자식아!”
하염없이 오열하는데
“사모님, 이선생사모님!”
고스톱을 치려고 찾아오던 아낙들이
“이상하네. 아까 대문 밖에서 스님이랑 뭐라고 이야기를 하던데 스님하고 같이 갔나?”
“아닌데. 스님은 혼자 가던데...”
“그 참 이상하네.”
하면서 다들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하루 종일 눈물을 질금거리다 가슴을 두드리다 선잠이 들었는데 문득 휴대폰이 울리자
“그래 애미다. 현아, 우리 현아, 어서 말해봐라.”
방에 불을 켜며 소리치는데
“아닙니다. 어머니. 저 상인이에밉니더.”
“...?”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 방안이었고 시계는 벌써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니가 이 깊은 밤에 우짠 일고?”
안 그래도 낮에 스님을 만난 일을 이야기하려다 뭔가 집히는 게 있어 숨을 죽이는데
“어머니, 방금 상인이 아버지가 전화를 했는데요.”
“그래, 어서 말해 봐라.”
역시 예감이 들어맞았다. 아마 내일 머리를 깎고 정식 불제자가 되는 모양으로 속세의 마지막 전화를 제 처에게 한 모양이었다. 며느리의 말에 의하면 좀 전에 전화가 와서
“여보세요?”
“...”
대답은 없지만 저쪽의 숨소리에 남편의 체취가 풍기는 것을 절감한 상미어미가
“여보세요. 상미아빠, 어서 이야기 좀 하이소.”
“...”
“당신 빚도 다 갚았고 아이들도 잘 크고 아무 탈 없심니더. 어서 무슨 말 좀 하이소.”
“그래. 내다 잘 있었나?”
“예. 제야 뭐. 당신은 요?” “잘 있다. 엄마 하고 아이들은?”
“다 잘 있심더. 참 영주 집이 수용 되서 보상금으로 빚도 다 갚고 수원 집도 고치고 시누이도 한 3천만 원을 주고 영주에 어머니 새집도 사고 우리 집은 다 좋심더.”
“그건 내하고 관계없고.”
“예? 집에 돌아오소. 아무도 어떤 말도 안 할 깁니다. 그냥 아이아버지로 있어만 주소.”
“미안하다. 이제 늦었다.”
“괜찮심더. 돌아오소.”
“엄마한테고 당신하한고 죄를 많이 지었다. 아이들한테도 면목이 없고.”
“...”
“인자 다시는 전화를 안 할 끼다. 당신도 내 소식을 묻지도 말고 전화를 할 생각도 말아라.”
“뭐라고요? 상미가 시집가고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안 오실 거요?”
“안 간다. 연락도 하지마라.”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었다. 아까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어도 전원이 꺼졌다고 했다.
“간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은 남고. 우짜겠노? 남은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예. 어머니.”
“자거라. 나도 잘란다.”
“...”
그렇게 끝이 났다는 것이었다.

“내가 미쳤제?”
“와?”
“그렇게 미워죽겠던 형님이 또 저렇게 힘들게 되니 자꾸 불쌍해서 말이야.”
“성격이 좋은 거야? 무른 거야? 아니면 성낼 줄도 모르는 바보야?”
“모르겠어. 생각하면 할수록 이가 갈리지만 그렇지만 지금 사는 모습이 불쌍한 걸 어쩌나?”
“하긴 대대로 눈물과 회한으로 살아오면서 마지막엔 늘 용서로 끝나는 조선의 여인들이 다 그렇지. 이제 당신도 60줄에 들어서니 전형적인 조선의 어머니가 되어가는군.”
“무슨 소리. 당신은 나보다 더 하더군. 당신의 시집에 구질구질 눈물을 짜내는 시도 많지만 연속극을 보다가도 울고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울고 오카방고에 암사자가 죽었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이?”
“물론 나도 조선의 어머니가 낳은 사람이고 조선의 여인들과 사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난 눈물을 흘릴 때는 흘리더라도 미워할 때는 미워하잖아? 당신이 형님한테 그러듯이 한 평생을 원망하다가 슬그머니 용서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야.”
“알고 보면 시숙도 불행한 사람이지. 한 평생 가난하고 힘들었던 환경, 고학을 하면서 밥을 굶고 위장병에 정신분열까지 앓은 과거와 너무나 단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에 묻혀 살았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엔 내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아무리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도 그렇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사람, 그 고독한 천재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으니까 말이야.”
“사실은 나도 그래. 형수가 너무 욕심을 부려 시동생들한테 땅 한 조각 안 떼어주고 심지어 생가마저도 몰래 팔아 제사지내러 오는 날, 그 사실을 알고 파젯날 눈물을 흘리며 떠나던 날 동생과 나는 박테기콩나무 하나와 돌감나무하나씩을 캐 바께스에 생가 터의 흙과 함께 담아 언젠가 내 집을 사서 심으리라 맹세했지만 저나 나나 여기저기 셋방을 옮겨 다니며 한번 심어보지도 못 하고 죽여 버리고 생가의 흙도 사라지고.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도 형님, 형수의 얼굴이 떠오를 때 분하고 이가 갈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지난 번 형님이 돌아가실 때도 그렇고 이번에 형수가 저렇게 마음 아픈 일을 당하니 어쩐지 마음이 짠 한 걸 피할 수가 없어.”
“그건 내가 더 알지. 우리 두 사람 중에 마음이 더 여린 사람은 당신이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길도 멀고 나이가 든 내가 수원에 가서 아버지어머니 제사를 못 모시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서울에 있는 정석이식구가 바로 부산에 내려와 아무도 제사에 참석하지 못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무슨 소리? 당신은 아주바님 살아계실 때부터 진장산소에 가는 담당이었잖아? 젊고 운전을 하는 울산 대름은 영주의 제사 참석담당이고.”
“아무리 그렇지만 서울에서 수원제사를 마다하고 바로 부산으로 내려온다는 것이.”
“심각할 것 없어요. 전에 부터 내려오던 담당이기도 하지만 죽은 조상제사를 지내려고 살은 조상을 못 만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또 현실적으로도 서울, 부산까지 열서너 시간 걸리는 거리를 미리 5,6시간 걸릴 때 와야지. 수원제사를 지내고 내려오다간 부산까지 오지도 못 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판이 아니요? 그만 잊어버려요.”
“하긴. 그래도 올해는 형수가 몹시 힘들다니까 마음이 언짢아서 그렇지. 그런데 울산 동생은 수원으로 출발했는지 모르겠네?”
“아마 갔겠지. 지금쯤은 수원에 거의 도착했겠지.”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햄잉교?”
거두절미 한 마디로 조지는 투가 백찬씨였다. “그래 와? 지금 수원 가고 있나?”
“아임더.”
“와? 무슨 일 있나? 현대자동차는 휴가도 보너스도 다 넉넉하다고 방송되던데.”
“그 기 아이라 아침에 내가 영주에 전화를 해 보니 형수가 바람이 왔담니더.”
“뭐 바람이 왔어?”
깜짝 놀라면서도 하마터면 ‘바람이 났어?’로 반문할 번 한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래 풍이 왔단 말이가? 중풍이?”
비로소 이거 참, 큰일이구나 싶어 눈앞이 캄캄한데
“예, 자고 일어나 한쪽 볼이 싸늘한 느낌이라 거울을 보니 입이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눈이 찌그러지고...”
“그래서?”
“놀라서 병원에 가니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었다면서 한 며칠 푹 쉬라고 해서 쉬었는데 눈하고 입은 거의 다 돌아왔는데 발음이 잘 안 되어 말이 어둔해서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말입니다.”
“그만하기 다행이네. 제사도 못 가겠네. 그 기 아니라 니나 내나 영주로 한 번 가봐야 되는 것 아니야?”
“아임니더. 안 그래도 나도 수원에 가는 길에 영주부터 들러서 갈라고 했는데.”
“그래서?”
“영주 형수가 대름, 니 눈이 나빠 장거리운전하기도 힘들고 또 아이들이 커서 차도 복잡하고 그러면서...”
“그래서?”
“영주형수가 한사코 오지 말라고 안 하능교? 내 몸보다도 수원의 우현이네도 지금 정신이 없고 대름 니도 눈이 그렇다카이 마 안 와도 된다고 자꾸 우기는 바람에.”
“그래에?”
열찬씨가 푸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전화소리를 듣던 영순씨가 그새 영주로 전화를 해 봤는지
“영주형님이 질질 울어쌓아서 큰일이네. 목소리 약하고 혀짜래기소리가 되어 알아듣기 힘들고...”
“그래도 문병은 한번 간다카지?”
“못난 꼴 보이기 싫다고 한사코 못 오라카네요.”
“그 판에 인물이 중요하나? 그 놈의 자존심하나는 참, 아이구 기가 막히네.”
“자기도 기가 차서 그렇겠지요. 형님 속 편하게 아부지제사때 만나서 봉투나 하나 줍시다.”
“그라든지.”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