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교장선생님의 욕심과 의심치매(6)
그래도 마침내 휴대폰을 바꾸고 말았다. 스마트폰을 쓰면 세상이 달라진다더니 정말 편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산우회에 나가 다른 친구처럼 밝고 훤한 액정을 들여다보며 전 같으면 일일이 손으로 이름을 쳐 찾던 전화번호를 손가락으로 주르르 밀어서 찾는 재미도 좋았지만 전체로 밝고 훤해 졸지에 원시인이 문명세계에 진입한 것 같았다.
“아이구, 우리 아빠 세련되셨네!”
슬비씨가 신이 나서
“아빠, 이건 전화처럼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카카오 톡이야.”
하고 설명했지만
“너무 복잡하게 사용하면 머리가 산만해 작품을 못 해.”
하고
“자, 우선 니가 내게 전화해 봐. 전화번호가 뜨나 보자.”
하니 과연 전화번호와 이름이 뜨는 지라
“됐다. 인자 골치 아픈 영감쟁이 전화 안 받을 수 있겠구나.”
하고 잠이 들었다가 한밤중에 휴대폰이 울리자 박찬동이란 교장선생이름을 확인하고 씩 웃으며 우선 집전화의 코드를 뽑고 아내 영순씨의 전화를 찾아 전원을 끈 뒤
“아나 콩콩!”
혀를 쏙 내밀며 자신의 전화기 전원을 꺼버렸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걱정거리하나가 지워진다는 것, 특히 언제 밀어닥칠지 모르는 찝찝한 불안하나가 해소된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그 편안함, 굳이 편안함이라 할 것도 없이 평범한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새삼스러웠다. 밤중에 전화 받을 걱정이 없으니 잠도 잘 오고 6시에 일어나 9시까지 세 시간 글을 쓰는 일에도 집중이 잘 되어 하루 5,6쪽을 쓰던 것이 7,8쪽이 넘어가기도 했다. 또 원동교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일도 집중도가 높아져 자연 승률이 올라가니 왕선생이 왜 이리 손때가 매워졌나며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외간에 싸울 일이 없어 좋은 것이었다. 그렇게 편안한 나날이 흘러 어느 듯 구정이 다가와 영순씨가 그 바쁜 틈에도 서울아들 식구가 오면 먹일 과일과 과자, 우유제품과 생선을 가득히 사오고 설날저녁에 가족회식을 할 LA갈비를 사와 재기 시작하면서
“보소. 제발 당신 방 좀 치우소. 그렇게 귀신 나올 것 같은 방에 며느리가 들락거리면 미안하지도 않소?”
“...”
“보소. 내 말 안 들리요? 사람 말이 말 같잖나?”
“에이, 좀 조용해. 작업 끝나고 예기해.”
한창 컴퓨터에 열중하던 열찬씨가 손을 내젓자
“좌우간 오늘까지 당신 책상하고 서가정리 안 하면 너불거리는 서류나 책은 몽땅 쓰레기장으로 보낼 테니 그리 아소.”
하고 혀를 끌끌 차더니
“아이구, 숨 가빠라!”
근 세 시간 글을 쓰고 얼굴이 새빨개져 소파에 널브러진 남편을 보며
“누가 그 힘든 일을 하라고 시켰나? 아무리 제 좋은 취미라지만 저렇게 힘든 일을 왜 하는 건지...”
또 혀를 차더니 물걸레와 마른 타월을 들고 들어가 책상과 프린트기, 서가까지 깨끗이 정리하고
“내일 아이들 올 때까지 좀 깨끗이 쓰소. 또 아이들 있는 날은 그 작업 좀 중단하고.”
“알았어.”
하고 모처럼의 일요일아침을 느긋이 즐기며 오전 10시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는데 휴대폰이 울려 액정을 들여다보던 열찬씨가
“누구지? 아는 직원들 중에 누가 전화번호를 바꾼 건가?”
남부민동1동장시절 같이 천마산산토끼복원사업을 하던 담당자 안선화씨, 나중에 결혼식 주례를 쓰며 선화공주가 시집가는 날이라며 신부가족과 하객들의 눈물을 뺀 그 안선화씨를 비롯하여 퇴직 후에도 형제처럼 지내는 초가집회의 정병진, 박기도, 이재식동장을 비롯한 후배들이 명절 때마다 적자 않은 선물을 택배로 보내고 전화를 하는 지라 무심코 전화를 받는데
“봐라! 이 국장, 니가 전화번호를 바꾸면 내가 모를 줄 알고? 남의 거름이나 훔쳐가는 사람이 전화번호를 바꾼다고 해결이 되나 지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잔뜩 성이 난 교장선생이 목소리라
“아이구, 교장선생님!”
열찬씨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자 옆에 앉은 영순씨의 얼굴도 벌개지는데
“대목에 잘 지내십니까? 건강은 좋으시고요?”
간신히 인사말을 찾아내는데
“남의 건강 걱정하느니 남의 거름을 안 훔쳐가야지?”
“허허, 교장선생님, 제가 훔쳐갈 이유도 없지만 거름이 꼭 필요하면 제가 몇 포대 드린다니까요.”
하는 순간
“도둑이 지 말 저리니까 지 입으로 준다는 거지. 이국장 그 사람 겉만 멀쩡하지 완전히 도동놈이구먼. 속이 시꺼먼 이까복쟁이야!”
사모의 비수처럼 예리한 목소리가 튀어나오며 새파라동동 심술이 넘쳐 저승꽃처럼 심청궂은 표정이 떠올라 숨이 턱 막히는데
“거름도동놈이 남의 땅 도둑질은 왜 안 하겠노? 우리 밭이 문중 땅인지 동네 땅인지 지가 와 물어보는데?”
의심암귀, 저 어두운 명계(冥界)의 까마귀처럼 한없이 음산하고 불길한 공포로 날개를 펄럭이며 엄습하는데
“대목 밑인데 오늘은 예까지만 하지요. 마침 제가 한창 소설을 쓰는 중이라 바쁘기도 하고...”
“왕년에 한두 번 글 안 써본 사람이 어딨노? 어데 가국장만 글 쓴다는 법이 있나?”
하면서도 교장선생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은데
“이 국장은 설날 전에 거름 물어주고 그 황 서방인가 나발인가 하는 동서는 당장 밭을 비우라카소!”
또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죄송합니다. 먼저 끊습니다.”
하고 전원(電源)을 끄는데 자기전화의 전원을 끈 영순씨가 재빨리 집전화의 스위치를 뽑았다.
“이렇게 마냥 불안에 떨 것이 아니라.”
오후 두시. 늦은 점심을 먹고 치우던 영순씨가 열찬씨와 눈을 맞추더니
“그래도 한번 부딪쳐나 봅시다. 매번 찾아보던 명절을 안 가볼 수도 없고.”
하면서 미리 슬비에게서 받아둔 만두 도시락 네 개와 김치와 쇠고기 왕만두 각 10개, 두 노인네가 먹을 찐빵 네 개를 포장하더니
“아무래도 이것만 가지고는 아쉽지. 몽땅 딸네집 물건이니까 꼭 계중 술 가지고 지 얼굴 내는 것 같기도 하고.”
하더니 다용도실에 가서 과일상자를 뒤져 주먹보다 큰 한라봉 귤 다섯 개를 들고 와 포장하는데
“아따, 그 한라봉 참 크고 탐스럽기도 해라. 어데서 나왔노?”
“와? 권옥남이라고 안 있소? 옛날 여직원 중에서 치과의사한테 시집간 사람.”
“그래. 내가 처음 사무관이 되어 동장부임을 할 때 축하 화환을 준 아가씬데 나중에 제 아버지어머니가 같이 근무할 때 죽어서 내가 두 번이나 문상을 가고 장지에 따라간 일을 평생 못 잊는다는 선화친구 권옥남이 말이군.”
“당신이 그래도 인덕이 없지는 않아. 가끔 너무 믿어 배신을 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치코치도 없고 어떤 꿍심도 없는 당신의 그 순수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기 지금 욕이가? 칭찬이가?”
하며 집을 나와 바로 복천동 교장선생집을 향했다. 동래구청앞에서 진입해도 되지만 옛날 영신이처제가 살던 명장동 방향이 눈에 익다고 해서 명장동과 복천동이 이어지는 시싯골과 인생문을 지나 거대한 고분군이 덩실한 고분군 맞은 편에 차를 세우고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낮은 슬레이트집이 다닥다닥한 달동네의 골목길을 접어들며 열찬씨는 그 옛날 세 째 누님 금찬씨가 고향사람이라고 좋은데 취직시켜준다며 식모살이한 돈 3만원을 다 뺏어가고 밀가루 풀대 죽으로 연명했던 그 마을이라 싶어 가슴이 찡한데
“명색 교장선생에 아들 셋이 다 교수에 의사에 세무사의 전문직업인인데 참 징하게도 못 사네. 아니 부모를 이런 데 처박아놓고 자기들은 잠이 오나?”
길눈이 밝은 영순씨가 조심스레 낯익은 대문을 찾고 열찬씨는 지난 가을 시든 꽃이 그대로 말라가는 국화대궁이 하나를 발견하고
“여보, 이 집인 것 같애. 자주 빛 키 큰 국화가 피었던 집.”
하며 새삼 참으로 험악한 몰골, 방금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슬레이트 집, 대문도 담장도 없는 현관문을 쓰윽 밀며
“교장선생님 계세요?”
불러도 한참이나 대답이 없더니
“누구? 우리 이국장이 오셨는가?”
저 안쪽의 방에서 콜록거리며 나오는데
“웬 기침은 요? 감기 걸렸어요?”
“날새가 추워 옥상에 물탱크가 얼어터지는 바람에 온 방안이 침수가 되어 설을 거꾸로 쐬겠다.”
“아이구, 조심하셔야지요. 여기서 제사나 지내겠나?”
“제사는 원래 큰 아들, 문현동의 박교수집에서 지내는데 방에 물이 샌다고 집에 와본 며느리가 인제 이 집은 팔거나 비우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는 바람에 우리 내외가 시껍잔치를 했지. 이 나이에 새삼 자식 집에 우째 얹혀 산단 말이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거름 도동놈이 우리 집엔 와 왔노? 문중답 넘보다가 안 되니까 인자 넘의 하꼬방 넘보러 왔나?”
새파라동동하게 녹슨 목소리, 그러나 비수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의 사모가 나타나더니
“가소! 일 없소!”
영순씨가 내미는 만두가 든 비닐봉투를 밀어내자
“와 이라노? 먼길 온 성의를 봐서라도.”
교장선생이 재빨리 만두봉투와 과일상자를 받아 넣더니
“우짜노? 온 집안이 물바다가 되어 어데 들어와 앉아라는 말도 못 하고?”
이제 받을 것 다 받았으니 가보라는 눈치였다.
“그럼 명절 잘 쐬시고요. 해동하면 밭에서 만나지요.”
열찬씨와 영순씨가 인사를 하고 골목길을 벗어나 자동차를 향하는데
“이까짓 만두 몇 개 주고 남의 땅 넘보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고, 택도 없다!”
사모의 목소리가 따라오는 것이었다.
“요즘도 저러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우짜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게 말이야. 내 없는 사람들이 하꼬방에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교장선생이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꼴은 처음 보네.”
“다 사정이 있겠지. 내 지난번에 듣기로 자기는 아이 셋을 교수로 만들고 의사를 만들고 세무사를 만들 때까지 얼마 안 되는 교사의 수입으로 간신히 버텨 와서 정작 그들이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할 때에는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었고 사립학교 교장선생으로 퇴직하며 연금대신 일시불로 받은 퇴직금이 1억 5천정도 되었는데 대학교 전임강사인 큰 아들은 아직 연립주택에 살며 머리 좋은 두 아들 공부시키느라 힘이 들고 부부의사인 둘째 아들도 울산에 병원을 지을 땅을 사느라고 무리를 해 빚이진 판이고 세 째는 아직 대학생이라 3,4천만 원씩을 떼어주고 겨우 4천만 원 남는 걸 우체국에 정기예금을 넣어 생활한다고 했어.”
“아니, 겨우 4천만 원의 이자가 얼마나 된다고?”
“한 달에 몇 십만 원은 되는가 봐. 거기에다 대학교수인 큰 아들의 며느리가 한 달에 한번 씩 와서 전기세, 수도세 같은 공공요금을 물고 쌀, 연탄 같은 기본 생활비일부를 주고 간다고 하더군.”
“어디 밥만 먹고 사나?”
“둘째 의사아들이 병원비나 약값 등 의료비를 부담하고 세무사인 셋째가 올 때마다 잡비를 좀 주고 가는데 요즘엔 셋째가 사실상 가장 큰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래 짠물인가? 교장선생도 교장선생이지만 사모는 더 짠물, 아니 당신 말로 가죽꼴기도, 약봉다리도 아닌 진주 자린고비인 것만 같아. 이건 뭐 단순히 제 것 아끼는 짠물이 아니라 옆에 가면 찬바람이 쌩쌩 난다니까.”
“그건 단순히 짠 것, 내 것만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 나보다 뭘 더 많이 가진 사람이나 잘 나가는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 내가 부자가 되고 내가 잘 나가야 되는데 왜 남이 그런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 그러니까 욕심에 심술까지 똥끝에 찬 사람, 말하자면 심청궂은 사람이란 거지.”
“그런데 당신 언제 한 번 교장선생이 저렇게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꼭 자식 때문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잖아?”
“그렇지. 내가 내 눈으로 본 일은 아니지만 금정구청 박씨, 그러니까 들어오는 입구에 움막 짓고 여름철이면 거의 거기서 살다시피 하는 박씨가 같은 집안사람인데 원래 성격이 남하고 잘 안 어울리는 외통수라 문중사람들하고도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옛날에는 꽤나 잘 살았는데 박교장 대학 다닐 때가 대학교를 상아탑이 아닌 우골탑(牛骨塔)이라고 소 팔고 논밭 팔아 공부시키던 시절이었지만 학교가 국립인데다 집과 가까워 그렇게 큰돈이 든 건 아니고 오히려 교사가 되어 결혼을 한 후로 논밭이 조금씩 줄어들었다고 하더군.”
“왜? 당시의 교사면 월급도 많고 거기다 동래토박이였을 텐데.”
“술도 좀 마시고 늦게 들어오거나 안 들어와서 부인이 위에 아들 둘을 데리고 자주 찾으러 다녔는데 그게 술집이나 과부집이 아니라 <화닥데기>판이라더군.”
“<화닥데기>라니?”
“초상집 같은 데서 노름 좀 하는 사람들이 하는 <알로 구삥>이라고 다섯 장으로 끗발을 재는 노름인데 교장선생이 욕심도 많고 집착도 강하고 승부욕이 보통이 아니었다는군.”
“그래? 단돈 10원도 아까워서 벌벌 뜨는 사람이 그런 간이 있어?”
“그 정도는 약과지. 새벽녘엔 꼭 판돈을 다 걸고 <섯다>를 했다더군. <섯다>는 두 장으로 끗발을 겨루는 게임으로 장땡에서 망통까지 단순하면서도 확고한 승부라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최고경지의 노름이지.”
“그렇구나. <섯다>판에서 제대로 서지 못 하고 무너진 것이로구나.”
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구, 뒷맛도 참 찜찜하네. 지 것 주고 뺨 맞는다 카디마는 내 만두 갖다 주고 그렇게 욕을 먹고 돌아오다니...”
옷을 갈아입던 영순씨가
“암만 그래도 그렇지. 부모를 그런 쓰레기장 같은 곳에 처박아놓고 우째 잠이 올꼬? 특히 대학교수부인이나 되는 맏며느리가 말이야?”
영순씨가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그건 그렇지 않는가봐. 내 느낌에 세 아들들 중 가끔 보는 셋째는 부모에 비해 덩치도 크고 말투나 행동거지도 시원시원해 도랑에서 용이 난 격이고 위에 두 아들은 아비를 닮아 머리가 좋아 나름대로 제가 속한 사회에서 전문가가 되고 상위층이 되었지만 그리 너름새가 좋은 사람들은 아닌가봐. 아무리 제 자식들 공부시키고 제 병원 키우기에 힘이 들어도 늙은 부모, 특히 심장이 약해 걸음도 잘 못 걷는 부모에게 그럴 수는 없지. 최소한 평지에 소형아파트나 단독주택은 마련해주어 시장이나 병원에 쉽게 오갈 수 있게는 해야지.”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내가 교장선생이 하는 자식이야기를 유심히 들어보니 자식들은 복천동 집을 팔고 작은 집을 마련해주겠다고, 심지어 큰 며느리는 같이 살자고 하는데 노인들이 응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왜?”
“신식 며느리하고 사는 것이 만만하지가 않았겠지. 아들이나 며느리는 둘째 치더라도 그 심청궂은 성질로 손자손녀들이랑 어울리는 자체도 힘들고 또.”
“또?”
“살던 집을 팔고 나오기가 아까운 거지. 아이들 공부도 공부지만 섯다판에서 눈에 불을 켜고 덤비다 빈털터리가 되어 조상으로 부터 물러 받은 마지막 부동산을 처분해 마련한 그 금쪽같은 판잣집이 그저 주어도 싫다는 식으로 거의 똥값으로 부르는데 그만 속이 뒤집힌 거지.”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도 맏며느리가 사람하나는 진국인 모양이지. 한 달에 한 번 본가에 와서 공공요금을 내고 양식과 기본반찬을 구입하고 집안과 부엌을 청소하고 셋이 같이 점심까지 먹고 가는데 아주 조신하고 예의가 발라 역시 여자는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으로 보아 있는 집 딸에 배운 여자인 모양이지. 집이 낡아 자주 수도가 막히고 보일러가 탈이 나도 어련히 알아서 점검하고 고쳐줄 뿐 아니라 지난번에는 교장선생이 정신이 없어 휴대폰을 다섯 개나 구입해서 전화요금통지가 다섯 장이나 나와 놀라 대리점으로 찾아와 정리를 하고 요금을 다 물고 갔는데도 시아버지에겐 말 한마디도 않고 대리점 주인이 아무리 말려도 정신이 흐릿해져 당장 새 휴대폰을 개통하지 않으면 숨이 넘어갈 것 같이 하는 교장선생을 감당을 못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사과해도 그건 자기 시아버지의 잘못이라고 눈 한 번 흘기지 않고 그냥 갔다더군. 참 양반이지.”
“그렇구나. 그 며느리가 그런 돈 걱정, 자잘한 일 걱정보다는 시어머니 심청에 마음고생이 보통이 아니겠네.”
그 때였다. 집 전화벨이 울려
“정석이가 추풍령을 넘었는 갑다. 당신도 같이 갈라면 준비하이소.”
하고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하던 영순씨의 표정이 확 바뀌면서 열찬씨에게 손짓을 해 부르더니
“교장선생님이야.”
하면서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이미 숨을 헐떡거리며
“내가 이 까짓 만두 몇 개에 넘어갈 줄 알고, 이 국장, 당신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심한 사람이네!”
소리치는 교장선생에게
“왜 그러시는데요? 교장선생님, 방금 서로 명절 잘 보내라고 인사했잖아요?”
하는데
“국장도 국장이지만 그 동새라는 황씬가 황샌가가 더 지랄이지. 젊은 기 인사성도 없어 지 난당으로 설치는 기 말이야.”
사모의 말에 이어
“내 두 말 안 하겠는데 황서방인가 그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은 설 씨고 당장 밭을 빼고 지 삽가래랑 몽땅 철수시켜!”
이번엔 공격목표를 바꾸는데
“아니, 도둑을 쫓아도 나갈 구멍을 보고 쫓는다는데 제 말만 듣고 교장선생님 밭에 올라온 우리 황서방을 불시에 나가라고 하면 우짭니까?”
안 그래도 처음 열찬씨의 밭에 재미사마 한두 번 따라온 영신씨가
“언니 니는 참 좋겠다. 묵고 살 걱정 없겠다, 자식 잘 됐겠다, 이래 소일꺼리 좋겠다.”
부러워하더니
“주말마다 진주 엄마집까지 가기도 그렇고 형님, 저도 이 골짝에 쪼매는 땅하나 구해주면 안 됩니까? 대도시에서 이래 공기가 존 곳도 드물지만 형님이랑 막걸리도 한 잔 하고...”
황서방까지 나서는 판이라 처음 교장선생의 밭 귀퉁이 소나무그늘 땅을 얻어 기존의 정씨문중 땅과 같이 부치다 이듬해 박성학씨가 부치던 땅까지 밭이 늘어나자
“여보, 동새하고 처제가 그래 쌓으니 우리 부치던 밭을 체제 줄까?”
열찬씨 말에
“몰라. 당신 알아서 하소.”
“아니, 당신 동생, 당신 제분데 당신이 반가워서 ‘그리 합시다.’ 라고 해야지.”
“나는 마 모르겠소. 나중에 당신이 이렇고 저렇고 말 안 할라카면 알아서 하이소.”
“저런? 약아빠진 사람? 지 동생 일에도 지는 빠지고 나만 몽땅 책임을 미루는 사람...”
그런 게 눈치하나로 살아가는 도시인의 기본자세 당시 유행하던 <까도남>, <까도녀> 즉 까칠한 도시남녀의 성향인가 싶어 혀를 차면서도 결국 동서를 끌어들인 것이 지난 번 마늘 뽑던 날이나 거름 실어 올리던 날처럼 즐거운 일 보다는 늘 신경 쓰이고 마뜩찮은 일만 생기는 판이었다.
“내가 뭐라 캤소? 내 동생, 니 동생 할 것 없이 사람 붙이면 귀찮고 골치 아픈 일만 생긴다고 안 했소?”
하마 동대구역을 지났겠다며 도시고속도로에 차를 올리며 영순씨가 남의 일처럼 한마디를 던지자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노? 우리 집 시가 7남매, 당신 집 처가 5남매에 대해서 진학, 취업, 결혼은 물론 제사나 집안행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나는 모른다고 발뺌 한 번 한 적 있나?”
“그래서 말이요. 당신이 없는 집 맏딸 내게 장개 와서 밑에 네 처남, 처제 명절마다 용돈 주고 학교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세상물정 어두운 실향민 우리 아버지 진갑잔치 치르고 초상치고 우리 엄마 따독거리고 하나도 소홀함 없이 잘 하는 만큼 나도 우째 보면 경우도 없고 거칠기만 한 시집식구 네 시누이에 불 칼 같은 시숙에 욕심이 당신말로 욕심이 하늘똥짜바리를 찌른다는 손위동서에 소나무죽은 귀신처럼 말 한마디 없는 시동생과 민우엄마까지 하느라고 하긴 했는데 이제 나도 아들딸 다 여의고 손자까지 본 나이에 새삼 내 형제 일로 신경을 쓴 것이 속이 상해서 그렇지.”
“그래도 우짤끼고? 형제간 일인데.”
“그러니까 처음에 물망골에 받아들이지를 말아야지.”
“뭐라카노? 당신동생이라 받았지? 어데 처제가 남이가?”
“그래도 그 때 내가 잘 생각해보라 캤잖아?”
“그게 그러면 잘 생각해서 받아들이라는 말이지 모르는 척 하라는 말이었나?”
“그게 꼭 사관지 능금인지 손으로 찍어줘야 아나? 환갑진갑 다 지난 사람이 제 알아서 판단하란 말이지.”
“참 도시 사람들은 골 아파. 그 때 내가 안 된다고 했으면 당신이 좋아했겠어? 울산에 친동생 다르고 부산에 처가식구 다르다고 섭섭했겠지. 2년 동안이나 잘 지내다가 일이 터지니 또 책임은 나한테 넘기고?”
“...”
자동차가 부산역에 닿았다.
“할머니!”
제 어미의 손을 놓고 쪼르르 달려와 영순씨에게 안긴 가화의 뺨을 쓸어주며
“가화야!”
열찬씨가 들여다보자
“할아버지!”
아이가 방긋 웃었다. 아들과 며느리와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 다시 도시고속을 달리는데
“엄마, 아부지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두 사람이 흠칫 놀라는데
“두 분이 평소처럼 통 말을 안네요.”
하는 아들을 보며
“서울사람 눈치가 귀신이네. 사실 너거 아부지 재미로 농사짓는 구서동 밭 때문에 좀 싸웠다.”
“취미로 하는 일인데 대충대충 하이소.”
“그렇지만 너거 아부지가 어데 그런 사람이가 한번 빠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 때까지 절대로 안 물러나는 사람인데 거기다 괜히 너거 반여동 이모까지 끌어들여서.”
하고 영순씨가 그간의 경과를 이야기하자
“아부지, 어데 주말농장 같은 조그만 거로 그냥 소일이나 하시지요.”
하는데
“너거 아부지 욕심이 어데 그 손바닥만 한 거로 양이 차나? 돈만 있으면 한 4,5백 평 밭을 사도 능히 삽질을 할 사람이야. 무식이 용감하다고 뚝심하나는 천하장사가 되서 말이야.”
“예. 아직은 제가 아버지 주말농장 사드릴 형편은 아니고...”
“야가 무슨 소리 하노? 우리는 마 너거 세 식구 탈 없이 사는 것만도 태산이다.”
하고 며느리와 아이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영순씨가
“세상이 참 좁구나. 이북사람 딸인 내가 경상도 남자 만나서 부산 아들을 낳아 전라도여자하고 결혼시켜 서울손자를 보네. 가화야, 이 차안에서 오직 너거 자매, 가화, 우화만 서울사람, 서울여자다. 곱게 커서 세련된 여자가 되어라.”
영순씨가 말머리를 돌렸다.
집에 도착한 영순씨가 삐삐삐삐 자동키번호를 누르는데
“가화야? 나 언니야.”
영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응, 영서언니!”
제 첫돌에 서울까지 가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붙어 다니다 심지어 잠도 가화 옆에서 자려고 우기던 영서는 지난 해 열찬씨의 생일과 하기휴가에 추석까지 세 번이나 가화를 만날 때마다 제가 친언니나 되는 듯이 가화를 챙겼다.
그러면서도 친동생 현서에게는 평소에 눈길도 잘 안 주고 자기물건에 손을 대거나 귀찮게 하면 얼마나 엄격하고 무섭게 구는지 제 어미가 꼭 이복언니 같다고 할 정도였다. 그게 다 자신이 외동딸인줄 알고 어미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끝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집안의 모든 것을 제 것으로 알던 아이가 무려 아홉 살이나 되어 동생이 태어나 부모는 물론 할머니할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이 모조리 제 동생에게 돌아가서 생긴 상실감과 질투심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디.
저 역시 자기가 막내인줄 알고 이미 한글을 뗀 여섯 살이 되도록 어머니의 젖을 빨았다던 열찬씨가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여름 날 눈이 반질반질하고 속눈썹이 기다란 동생이란 갓난아기가 태어난 걸 보고 당황하던 기억을 살려 가족들에게 당분간 갓 난 현서보다도 동생에게 부모를 빼앗긴 영서를 더 세심하게 돌보아야 된다고 말 했다.
그래서 아이의 부모는 물론 열찬씨네와 신평의 사돈댁과 남희씨 내와, 가끔 아이를 보러오는 장모 순란씨까지 영서에게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보냈지만 이 아이의 성격은 보통사람과 어딘가 좀 다른 면이 있는 듯 어떤 변화도 없이 여전히 제 동생을 소 닭 쳐다보듯이 하는 것이었다.
“니가 혼자 우째 왔노? 누가 데려다 주더나?”
“아니. 가화 보러오려고 가연이를 오라고 했지.”
“가연이는 왜?”
“개는 태권도장 다니잖아? 달리기도 잘 하고 머시마들 보다 태권도 대련도 잘 해서 호수공원 옆길도 겁 안 낸다,”
“암만 그래도 주공에 사는 아이를 선경까지 오라고 해서 니 보디가드로 데리고 주공에 다시 왔단 말이가?”
“...”
“그래, 그럼 가연이는 어데 갔노?”
“일이 끝났으니 저거 집에 갔지.”
“...”
어안이 벙벙해진 영순씨와 열찬씨가 동시에 입을 딱 벌렸다. 저 아이는 왜 저렇게 만사 자기위주이며 조금만 자기 기분이 틀리면 말을 않고 자기 때문에 남이 힘들거나 돈이 드는 걸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지, 비록 두 벌 새끼지만 자기 핏줄이 왜 저런 이해하지 못 할 일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그러지마. 처음부터 아무 볼 일도 없는 가연이가 괜히 너 때문에 힘들었잖아? 반대로 니가 가연이를 위해서 선경에서 주공에 왔다가 금방 다시 선경으로 간다고 생각해 봐.”
엄마아빠가 맞벌이부부라서 같은 동 7층의 할머니가 동생 은준이와 함께 남매를 돌보는데 두 내외가 나이가 많아 세심하지도 못 한데다 할아버지가 아파트의 경비를 해 살아갈 정도로 여유가 없어 평소에 장난감이나 간식거리가 거의 없는 가연이는 열찬씨네 집이나 영서네집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밀감이나, 우유, 빵에 늘 시선을 빼앗겨 영순씨나 영서어미가 챙겨주면
“괜찮아요.”
하면서 못이기는 척 받아 주는 족족 재빨리 받아먹었고 특히나 열찬씨가 가끔씩 차려주는 김치볶음밥이나 스파게티도 항상 영서나 민서, 동현이 같은 친구들보다 먼저 제몫을 먹어치웠다. 피부가 좀 검기는 하지만 이마에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데다 커다란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사내아이처럼 동작이 활달해 건강한 시골처녀 같기도 해 어떤 때는 폴 고갱이 그린 타히티섬의 아가씨이 피부나 눈빛이 저렇지 않을까, 이 아이가 처녀가 되면 꽤 싱그러운 아가씨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한 아이였다.
“가화 왔나? 정석이 상미도 오고. 오오 우리 귀염둥이조카 우화도 왔네.”
문을 잠그지 않아 소리 없이 들이닥친 영서어미가 서울 식구 넷과 차례로 눈을 맞추고 현서를 거실바닥에 내려놓자
“현서야!”
외삼촌내외가 오랜만에 만난 조카의 뺨을 꼬집으며 바라보는데
“...”
오랜만에 만난 같은 또래의 사촌 두 아이는 명절이나 집안행사 때 어떤 때는 요람에 나란히 누워서, 또 어떤 때는 보행기를 타며 달리기시합을 하며 또 어떤 때는 방바닥을 기고 문갑이나 책상다리를 잡고 일어서거나 걸음마를 떼면서 가끔 보던 얼굴이라 서로 낯설지는 않은 모양이나 그렇다고 서로가 서로를 누군지 정확히 인식하거나 대화를 할 처지도 아니어서
“...!”
한참 바라보며 서로가 찬찬히 살피는 것 같더니
“엄마, 쮸쮸!”
두 달 빠른 가화가 현서의 입에서 공갈 젖꼭지 쮸쮸를 홱 낚아채는 순간
“쮸쮸!”
현서도 재빨리 가화의 입에서 쮸쮸를 낚아채며
“쮸쮸!”
자기 쮸쮸가 빼앗겼다고 서로가 비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리려다 문득 자기 입에 상대의 쮸쮸가 물려있음을 알고 안심을 하더니
“쮸쮸!”
다시 마주보는 상대의 쮸쮸를 빼앗아 입에 물기를 반복했다.
“사촌은 사촌이야. 쪼그만 것들이 놀아도 참 기가 차게 잘도 노네. 그런데 김서방은?”
“응, 지금 목욕탕에 갔는데 아마 신평에 고추친구들 만나러 갈 건가 봐. 서울이나 객지서 돌아온 신평시장친구들과 술도 한잔 하고 당구도 치고 훌라도 치고.”
“그 사람들은 제사도 안 지내나?”
“지내겠지. 열 시가 넘도록 훌라를 치면서 조상 앞에 갈아놓을 정종 값 따려고 그런다잖아?”
“아이구, 복도 받겠다. 그런데 니는?”
“시어머니가 한사코 오지마라고 하네. 짜들 차릴 것도 없는 제사에 괜히 안날부터 와서 좁은 방에서 고생한다고 말이야.”
“그래도 남의 집 며느리가 명절 안날 집안도 청소하고 전도 붙이고 주부된 의무를 해야지.”
“나도 그래 생각하고 잘 해보려고 해도 우리 어머니가 도무지 기회를 안 주는 걸.”
“그것 참, 시집도 나이롱 시집이다. 편하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입맛을 쭉쭉 다시며 며느리를 바라보던 열찬씨가 영순씨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뜨끔해진 것이었다. 사실은 남의 집 일을 탓할 것이 아니라 열찬씨 자신이 자식 된 도리로 수원의 조카 현우네로 가서 명절제사를 모셔야하나 길도 멀 뿐 아니라 울산의 백찬씨네와 서울의 아들식구까지 무려 열두 명의 식구가 들이닥치면 수원의 작은 연립주택에는 눕기는커녕 발 뻗고 앉을 자리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조카 우현씨가 겨우겨우 다니던 물류센터를 그만 두고 중이 된다며 산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할머니 명촌댁과 어머니 김해댁으로 부터 장손이다, 장남이다를 이유로 <우리 집 원질>로 불리며 너무 지극한 고임을 받아 매사에 의존적이고 자신감이 없이 자란 눈이 커다란 그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억지로 해오던 공부에 갑자기 자신감을 잃고 말이 없는 아이로 변했다.
언양의 수재로 알려진 아버지 일찬씨는 반에서 1,2등을 놓치지 않던 아이의 성적이 급전직하(急轉直下)하자 몹시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다. 학비가 없어서 진학을 못 하고 책이 없어 공부를 못 했지만 늘 공부에 목말랐던 자신과 동생 열찬씨의 사례를 들먹이며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부에 매진할 것을 강요했지만 아이는 점점 더 말이 없고 공부 따위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미 김해댁이 정신과는 물론 용한 점쟁이와 관상쟁이 또 무당을 찾아다니며 부적을 받아 액땜을 하다 못 해 진장의 시아버니산소에 까지 와서 굿을 하면서
“아부님, 우리 집이 장남인데 와 복은 부산 정석이네 집으로 다 가서 저거 삼촌은 출세를 하고 슬비, 정석이는 공부만 잘 하는데 우리 현우, 장손 현우는 와 이 모양이란 말입니까? 아부지, 우짜든동 부산에 가는 복을 우리 영주에 몽땅 오게 해서 우리 우야아부지도 건강하고 우야도 공부를 잘 하고...”
영주무당을 언양까지 불러와 굿을 하면 중얼거리는 것을 6촌 누님인 허서방네 복님씨가 듣고
“아이구! 심뽀가 저래서 복도 잘도 받겠다. 아지매 초상 칠 때 동네 할매들이 저 집에 며느리 순서가 바뀌면 좋겠다고 하더니 내 인자 그 말뜻을 알겠네.”
하며 6촌동서인 종찬씨부인에게 흉을 보았지만
“넘의 속을 우째 다 아요? 여북 답답하면 저래 쌓겠능교?”
그 때까지만 해도 마을 산값으로 다툼이 없던 시절이라 은근히 일찬씨 쪽 편을 들던 종찬씨도 나중에 일찬씨와 척이 지자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진 아들을 위해 거의 필사적으로 굿에 매달려 그 먼 길을 달려와 울부짖는 제수씨를 보며
“앞앞이 말 못 하고 철 천지 포원진다는 것이 부모마음이라지만 우선 지 맘을 잘 써야 자식이 잘 되지. 동생들 한 푼도 안 주고 부모전답 다 팔아갔으면 됐지 동네 산 판돈까지 넘보니 지 놈이 복을 받을 택이 있나?”
삼촌 몫의 돈을 챙기려다 들켜서 빼앗긴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어쨌건 머슴살이를 하면서 까지 한 평, 한 평 사 모은 논 네 필지 열 마지기 2,100평, 밭 두 뙈기 850평, 집터 140평에 갱빈 논 하천부지 점용권 200평까지 무려 삼천 평이 훨씬 넘는 시전재물을 겨우 영주3동 뒤새마을 철도부지 의 청석위에 매달린 집 하나를 사서 언양의 상찬씨가 삼촌 제사를 지내러 가서 보고는
“어이쿠야! 세상에 청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도 문제지만 집을 사는 사람은 또 뭐고? 이 풀 한포기 자라지 못 하는 땅에서 무슨 발복(發福)을 하며 몸인들 성하겠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우리 삼촌 그렇게 골병들며 번 재산이 인자 얼마 못 가겠구나!)
한 탄식처럼 김해댁은 <이선생사모님>이란 호칭이 너무 좋아 자신이 그 산동네 빈민촌에서 무슨 공작부인이라도 된 듯이 옷을 사고 반지에 목걸이, 귀걸이, 팔찌를 사 동서 영순씨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제사만 지내면 시가손님을 내쫓다시피 보내고 손도 안 댄 통닭을 비롯한 그 많은 음식을 동네 아줌마들과 일없는 남정네들까지 방과 마루에 가득 차도록 불러 화투판을 벌이며 이선생사모님 사람 좋다는 이야기에 혼이 나갔다.
또 가끔은 동네 아낙 몇을 대동해 승용차가 있는 건축업자 김사장이란 사람과 안동으로 풍기로 돌아다니며 폼을 잡다 차마 귀에 담지 못 할 소문이 가끔 제사를 지내러 가는 시가식구들의 귀에 들려와도 오로지 책과 낚시에 미친 일찬씨는 폐암에 걸려 죽고 그 잦은 굿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채 변변한 직업도 없이 처자식 세 식구를 거느린 현우씨는 차분히 직장 한 번 못 다니고 어미에게 빌붙어 사는 사이에 그 많은 시전재물과 일찬씨의 일시불 퇴직금마저 주식투자로 다 날아가자 아내와 아이들을 괴롭히고 때로는 손찌검도 마다 않아 아이 상현마저 대인기피증에 걸리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집안이 조금씩 나락으로 빠지며 혼자 고군분투하던 김해댁도 그야말로 <명은 길고 복은 짧고 청승은 늘어가고 팔자는 오그라지고>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다가 재작년엔가 마침내 우현씨가 직장을 그만두고 절로 들어갔는데 이번에도 역시 2천만원정도의 은행 빚을 남기고였다. 물론 몸도 고달프고 마음이 외롭고 갈피를 잡을 수도 없고 빚도 걱정이었지만 이번의 가출의 가장 큰 이유는 제 아비에게 수도 없이 맞고 자라며 학교에 가도 시험을 치면 평균점수는 능히 나오는 상인이가 제 아비를 닮아 180센티가 넘는 키에 80키로가 넘는 당당한 체격과 둥글고 희고 훤한 얼굴임에도 남과 말 한마디를 못 하고 친구하나를 사귀지 못 하더니 그래도 이제는 제 덩치나 힘이 제 아비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고 술 취한 아비에게 일방적으로 맞지 않고 슬슬 맞대응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제 아비가 술이 취해 들어오면 제 눈빛이 먼저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화등잔처럼 빛나면서 오히려 제가 먼저 죽인다고 덤벼 밀고 당겨 도저히 감당을 못 한 애비가 코피가 터지면서 아들만 보면 슬슬 눈길을 피하다 은행 빚이 터지기 직전에 도망하다 시피 어느 절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가장이 가출해버린 난감한 상황을 정작 본식구인 아내 상인이엄마와 딸 상미, 상인이 남매는 한 일주일이 지나자 금방 그게 무슨 뜻인지, 어떤 변화인지를 알면서 얼굴이 훤하게 펴졌다. 비록 약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시한폭탄 같은 폭군이 없어지니 집안전체가 평화롭기가 그지없어 그야말로 봄날이 온 것이었다.
어쩌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계산원으로 나가 푼돈을 벌다가도 똥 뀐 놈이 성낸다고 부실한 남편으로 부터 폭행이나 당하던 상미엄마도 이젠 걱정 없이 직장에 다녔고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상미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심관이 편해져서 그런지 얼굴이 분통처럼 뽀얗게 피어났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과 좀은 도발적인 눈빛과 다소 맹한 것도 같지만 어딘가 사내를 끄는 표정에 글래머에 가까운 육감적인 몸매가 하나의 훌륭한 처녀임에도 어딘가 형수 김해댁의 이미지가 풍기는 것이 자꾸만 신경 쓰이는 열찬씨가
“학교 백일장에서 더러 상을 받는다는 것을 보니 상미는 선대어른들의 총명한 두뇌를 닮았나봐. 할아버지에 증조부까지 문학적 소질이 탁월했으니 너도 차분히 공부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야.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문학이란 고전을 비롯한 많은 시와 소설을 읽고 역사와 철학, 신화와 동화, 동식물과 자연 그리고 연극과 영화, 또 섬세한 연애감정까지 두루 섭렵해 하나의 문학적 토양과 저만의 개성을 확립해야 되는 일이야. 문학적 성공은 나중에 천천히 이루더라도 우선 국어교사든 회사원이든 제 먹고살 방도나 마련하고 문학자체는 장기전으로 나가야 될 거야.”
장황히 설명하면
“예. 알겠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나 그 표정에 형수 김해댁의 매사 겁 없이 나대는 모습이 클로즈 업 되어 또 다시 가슴이 싸아해지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조금씩 밝아지고 활기찬 모녀보다 이제 싸우거나 겁낼 대상이 없어진 상인이도 심관이 편한지 이미 포기하다 시피 한 공부는 둘째 치고 혼자 심취한 장기실력이 일취월장해 골목에서는 제법 고수로 불리는 열찬씨도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 했고 제 좋아하는 장기를 이길 때면 너무 좋아 끼익, 끽 도르래가 고장 난 창문을 밀 때처럼 뻑뻑한 기계음을 발사하며 기뻐해 열찬씨가 도착하기 무섭게 장기판을 들고 나왔다. 언제 다시 졸아올지 모른다는 폭풍전야의 두려움도 어느 날 밤 전화로
“나는 어느 깊은 산 절에서 잘 지내고 있다. 더는 찾아올 생각도 말고 어머니에게도 그렇게 전해라. 내가 꼭 내려갈 일이 있으면 내려가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어머니나 가족들도 각자 몸조심하고 잘 지내기 바랄 뿐 나를 찾아오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 않으니 그렇게 알아라.”
전화가 오고 나서 수원의 연립주택에서는 소리 없는 함성으로, 식구들의 얼굴에는 햇살처럼 따스한 온기로 피어올랐다. 이제 그 악몽 같던 불안이 말끔히 씻긴 것이었다.
반면 김해댁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우현이, 우현이, 그 금쪽같은 내 아들이 뭐 어떻게 되었다고? 다시 오지도 않고 찾지도 말라고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분하고 기가 찬 일이었다.
(내가 저를 어떻게 길렀는데, 호랑이 같은 시누이 순찬씨로 부터 늘 무당의 딸년에서 시작되는 세상의 욕이란 욕을 다 먹으면서도 오로지 저 하나 잘 되라고 버텼는데 어찌 지는 애미의 심정을 그리도 모른단 말이가?)
그런 자신의 과잉보호와 탐욕이 가득한 이기심이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을 그녀는 아직 조금도 자각하지 못 한 것이었다. 천지강산을 다 뒤져도 찾지를 못하고 어느 절간의 부처님 앞에서도 울고 어느 점쟁이나 무당의 손을 잡고 울어도 감당이 안 되고 이제 얼마 안 되는 남편의 연금으로 함부로 굿을 벌일 형편도 안 되었다.
거기에 지신의 몸도 여기저기 아프고 점점 힘이 떨어져 운신하기도 힘든데 버스를 서너 시간 타고 겨우 도착한 수원 집에 도착해 하루를 묵으며 이번에는 그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한 아득한 절망, 제 아들이 없어져도 답답한 건 어미인 자신뿐이고 처자식인 며느리와 손자들은 오히려 폭군이 없어진 편안함을 즐기며 저들끼리 통닭을 사다 먹으며 콜라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고 텔레비전의 아이돌공연에 열을 올리며 너무나 즐겁게 살아간다는 점이었다.
“참 당신 얼마 전에 영주 형님이 진장 산소에 왔다간 소문 들었능교?”
아이들이 없는 침대 방으로 남편을 불러 영순씨가 입을 열었다.
“응? 금시초문인데.”
“하도 김가 막혀 당신 알면 벼락같이 성을 낼까 싶어 말을 안 할려고 했는데 그래도 알기는 알아야 될 것 같아 오늘 이야기 하는 건데.”
“당신 꾀도 많네. 아이들 있어서 성도 못 낼 줄 알고 오늘 이야기하는 거지.”
“할 수 있나? 나중에 안 했다고 야단맞는 거 보다야 낫지.”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는데
지난 추석이 지난 며칠 뒤 문득 진장의 종찬씨집앞에 택시하나가 스르르 멎더니 쭈뼛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던 김해댁이 내려 시아버지의 산소 앞에 삼색과일과 오징어에 떡 한 접시를 차리고 술을 부어놓으며 절을 하는데
“누가 왔나?”
심심해서 놀러 와서 대낮부터 소주를 한잔 하고 얼굴이 발개진 허서방네 복님씨가
“월깨야, 저기 누고? 영주에 사는 일찬이 각시 현이엄마 아이가?”
하고 강숙이엄마랑 내다보다
“음복이나 한 잔 얻어먹을 까? 세상에 오래 살다보니 명촌아재 술을 다 얻어먹네.”
하고 신발을 신으려다 멈칫했다. 무덤 앞에 엎드려 거의 울음소리에 가깝게 비는 소리가 영 심상찮았던 것이었다.
“아부지, 지 우현이엄마 큰며느리 아입니까? 우리가 과거 골치 아픈 고향을 떠나 영주로 간 것 밖에는 죄가 없는데 왜 우리 집에는 그래도 복을 안 주고 우현이 아버지까지 그리 빨리 데려가셨는지, 또 우리 우현이는 와 그래 정신을 못 차리고 숙현이는 그래도 모진 팔자로 지 몸을 다치고 남편의 눈까지 멀게 하고 말입니다.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한참이나 온몸을 들썩이며 오열하다가
“부산 대름은 뭐 잘 한 거 있다고 집안도 편하고 아이들 공부도 잘 하고 사무관도 되고 동장도 되고 책도 내고 아들 부부가 대기업 삼성에 취직해서 돈도 잘 벌고... 다 같은 자식인데 왜 알짱 같은 장남을 두고 둘째만 보살피시는지 정말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무덤에 술을 붓고 다시 한참이나 오열하더니
“인자 부산대름은 좀 고만 살피시고 우리 장손 우현이를 좀 챙겨주이소. 대름은 서기관이 되고 국장이 되고 정년퇴직을 해서 연금이 우리 배나 되고 아무 걱정이 없심더. 죄 없는 우리 우현이가 어서 정신을 채리고 돌아와 사는 것 같이 좀 도와주십시오. 아버님, 아버님!”
하는 소리를 듣고 한참 뒤 다시 그 택시가 와서 김해댁을 싣고 가는 것을 보고
“액씨! 현이엄마 저 동새가 저라면 안 되지요? 우째 심뽀가 저럴고?”
일평생 남의 이야기는커녕 자신의 말도 한 마디 잘 하는 법이 없는 골샌님 강숙이엄마가 한 마디를 했는데
“글키 말이다. 복은 넘이 주는 기 아니라 지가 짓는 것이라 캤는데 말이다. 그냥 죽은 우리 영감이나 나처럼 소주나 마시고 얼굴이 벌개서 죽으면 될 일을 와 가만 있는 남을 원망하고 시샘을 하는지 모르겠네.”
혀를 끌끌 차전 복님씨가 장에서 만난 금찬씨에게 말을 옮기고 금찬씨는 다시 영순씨와 덕찬씨에게 옮겼지만 영순씨가 슬비아빠 알면 시끄럽다고 입막음을 했다는 것이었다.
“형수 말도 일리는 있네. 우리 집을 떠나서 형님 집도 인자 좀 잘 살아야지.”
“당신 참 속도 좋소. 골도 안 나요?”
“우짜겠노? 여북 답답하면 그랬겠나?‘
“..”
“그라지 말고 내일아침 제사는 잘 모셨는지 당신이 영주형수한테 전화나 하소.”
“...”
<계속>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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