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선생 사모만 생각하면 기분이 떨떠름해 며칠 밭에 가지 않다가 오늘은 정진수씨 말대로 부엽토나 밭에 묻으려고 올라갔더니 웬걸 태산처럼 쌓아 논 부엽토가 태반이나 날아가고 없었다. 집히는 데가 있어 살펴보니 교장선생의 밭에 삽으로 파고 부엽토를 넣고 도로 덮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혀를 끌끌 차면서 남은 부엽토를 밭에 묻는데 정진수씨가 와서
“봐라. 동생, 꼭 내 말대로제? 심관상할 긴데 이따 내려와서 소주나 한 잔 하지.”
“혀를 끌끌 차고 내려가자
저 위의 원두막에서 통장님이랑 이호열씨, 윤병균씨가 내려와서
“우리가 뭐라캤노? 당일치기로 땅에 안 묻으면 함한 꼴 당한다고 안 했나?”
이호열씨가 열을 내는데
“내가 어제아래 보니까 영감할마시가 얼매나 욕심이 많고 힘도 좋은지 평소 숨이 가빠 죽을라카는 사람들이 쉬지도 않고 부엽토를 퍼다 묻으며
“영감 빨리 하소. 가국장 올라올라. 하면서 아래쪽을 힐끗거리는 지라 보다 못 한 내가 교장선생님, 그 부엽토 가국장한테 이야기 하고 묻습니까? 하니 벽력같이 화가 나서.”
“화가 나서요?”
“내 땅에 내 거름 묻는데 어느 놈이 말할 거냐고 화를 버럭 내더란 말이지.”
“그래서?”
“가국장이 끙끙 힘들여 파오는 것을 이 골짝 사람들은 다 아는데 우째 교장선생님 거름이냐고 물으니 말야. 사모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 마디 하는데.”
“한마디 하는데?”
“내 땅에 있으니 내 거름이지. ‘지 놈이 내 땅에 거름 쌓아놓고 지꺼 내꺼 따지면 다시 농사는 안 지을 것인가?’ 하고 불같이 화를 내더란 말이지.”
“...”
“인자 물망골 경작자들 봄날은 갔다. 세상에 범보다도 더 무서운 기 늙은이 심청이라카는데 우리는 망했다.”
일주일 쯤 지나 열찬씨의 밭에서도 무, 배추를 뽑았다. 열찬씨가 산복도로에 주차한 영순씨의 자동차에 모두 실어놓고 지게를 제 자리에 둘 겸 올라오는데 이제 겨울 내내 오지 않을 밭의 울타리를 둘러보던 영순씨가 오각정에 가서
“교장선생님, 한 해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열찬씨도
“인제 음력설에나 한번 찾아보려나? 아무튼 추운 겨울 잘 보내십시오. 그냥 헤어지기도 뭣하니 내려가서 국밥이라도 같이 한 그릇 하시지요.”
열찬씨의 말에
“뭘, 매번 그러나? 늙은 사람들이 체면도 안 서게.”
교장선생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가득한데
“안 돼! 관수아버지, 이 어리석은 양반아 저 사람이 당신 국밥 한 그릇 먹여놓고 우리 땅 뺐어갈라는 거 아이가?”
정색을 하고 영감을 쳐다보는데
“예에?”
열찬씨와 영순씨가 깜짝 놀라자
“그라면 남의 땅이 문중 답인지 조상답인지는 와 물어보는데?”
“예에...”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던 열찬씨가
“아아, 그 이야기? 그 때 토지대장을 보니 임시조치법으로 넘어간 기록이 보여서 말이지요.”
“그래 구청에서 높은 사람 지냈으니 뭐 그런 땅은 몽땅 지 땅으로 뺏어간다는 말이지?”
“예에?”
“우리 영감할마이가 그래 만만해 보이나? 이래 봐도 우리 아들, 며느리가 교수에 의사에 박사가 셋이다. 그리고 세무사도 있고.”
“아이고, 사모님, 무슨 말씀을?”
“내가 뭐 바보가, 축구가? 아, 캐도 알고 어, 캐도 알고 당신 이까복지 같은 시꺼먼 속을 모를 줄 알고!”
새파라동동하던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숨을 헐떡거리는데
“사모님, 우리가 교장선생님하고 사모님을 부모같이 섬기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영순씨가 울상이 되어 통사정을 해도
“그러니까 자식도 아닌 사람들이 자식행세를 하며 남의 재산을 넘보는 것 아닌가 말이야?”
어디서 그런 순발력이 나오는지 세상에 의심만큼 날카롭고 사나운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자, 일단은 내려가십시다. 시간이 좀 흐르면 사모님 오해도 풀리겠지요. 밥 때가 지나서 배가 고프네.”
열찬씨가 교장선생을 일으켜 세워 넷이 줄레줄레 오솔길을 걸어 내려와
“한동안 못 볼 건데 점심이나 같이 하지요?”
열찬씨의 말에
“그러든가.”
교장선생이 수긍을 하자 이번엔 사모가 얌전히 따랐다. 석대다리집에서 셋은 이제 만 천 원씩 하는 탕을, 열찬씨는 소주안주를 겸할 만 삼천 원짜리 특탕을 시켜 식사를 하는데 어운 국물이 들어가서 그런지 새파라동동 얼어붙은 사모의 얼굴이 조금씩 풀려 발그레지면서 까만 저승꽃이 드러나기 시작해 모처럼 분위기가 편해지는데
“에이취!”
기침과 함께 교장선생이 국그릇에 빠진 틀니를 닦아 다시 끼우고 나서 영순씨는 숟가락은 들고 있어도 도무지 먹지를 못 하는데
“사람이 늙으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틀니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다시 사모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아. 예.”
열찬씨, 영순씨가 부지런히 먹는 시늉을 했다. 그럭저럭 식사를 마치고 나와 차에 오르는 내외를 보며
“교장선생님, 겨울 내내 건강하십시오.”
영순씨에 이어
“음력설 전에 복천동 댁으로 한번 찾아뵙든 지요.”
열찬씨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복천동엔 와 오는데?”
자동차문을 열던 사모가 휙 돌아서더니
“와? 구서동 밭을 뺏어가는 것이 부족해서 영감할마이 사는 집까지 뺏어갈라 카나?”
또 눈에 쌍심지를 켜더니
“그 까짓 만두 한 벤또에 내가 넘어갈 줄 알고. 택도 없다!”
이를 앙다물었다.
“아이고, 사모님. 무슨 말씀을?”
억지로 차에 밀어 넣고 차문을 닫아주고 차가 떠나는 걸 보고나서 영순씨가
“큰일 났네. 이라다가 내년 봄에 농사짓겠나?”
눈가에 수심이 가득했다.
농사일이 끝나자 열찬씨의 생활리듬이 완전히 겨울모드로 변했다. 평소엔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아홉 시까지 대하소설을 쓰되 농사일도 있고 또 어깨도 쉬어냐 되고 해서 이틀이나 3일을 작업하고 하루를 쉬곤 했는데 이젠 영순씨가 집에 있는 일요일을 빼고 일주일에 엿새를 세 시간씩 작업을 하니 어떤 때는 머리가 띵하거나 현기증이 나기도 했다.
“좌우지간 재주는 없어도 뚝심하나는 천하무적이라. 누가 명촌댁이 아들 아니라 칼 줄 알고?”
그게 부부의 아침인사이자 저녁까지의 이별인사였다. 아침에 일어나 현서를 보러 가기 전에 보온밥통에 열찬씨가 먹을 세 끼 밥을 해 놓고 국이나 찌게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식성을 감안해 가스렌지 위에는 덥히기만 하면 먹을 수 있도록 이미 조리된 냄비를 올려놓고 냉장고에도 김치랑 나물거리를 빠짐없이 챙겨놓는 것이었다.
아홉시쯤 일을 끝내고 아침을 먹고 대충 설거지를 하고 씻고 나면 열시 반 열한 시가 되기가 일쑤였다. 가만히 앉아서 글을 쓴다는 것이 왜 그렇게 숨이 턱턱 막히도록 피로하고 어떤 때는 가슴이 빠개질 것 같고 어떨 때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도 그걸 왜 안할 수가 없는지 이제 겨우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 개의 소설 <신불산>과 <다리밑에서>가 각각 5,000쪽이 넘을 테니 하루에 6,7쪽을 쳐도 약 3천일, 중간에 쉬는 날을 빼면 3,500일을 넘어 대충 10년은 걸릴 것만 같았다. 아무 탈 없이 작업을 마친다 해도 다시 교정을 보고 맛을 내고 멋을 내자면 또 한 5년은 걸릴 터인데 이제 64세인 자신이 약 15년 후 이미 80이 가까울 그 때까지 굳세게 작업을 해낼지도 의심스럽지만 그 때까지 살아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시작을 했으니 끝을 보아야 할 것이었다. 한 시골소년의 사춘기에 시작된 두 개의 꿈, 소설가가 되려는 희망과 첫사랑 순영씨에 대한 연모의 정은 아직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는 그 질긴 미련과 집념이 어쩌면, 아니 살아만 있다면 그 마무리를 해낼 것 같기도 했다.
그 때부터 내처 한 시간 쯤 자고 나면 다시 정오가 넘어 나물에 비비거나 국에 말아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으면 다시 한 시간쯤 아침에 쓴 글을 읽어보거나 새로 조금 더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수영강을 걸어 원동교밑에서 노인들이랑 바둑을 두었다.
오전 내내 그렇게 머리가 터지도록 작업을 하고 또 온 정신을 집중시켜 바둑을 두는 것이 무리일 것 같아도 글을 쓰는 뇌세포와 바둑을 두는 세포가 각기 다를 뿐 아니라 시소처럼 서로의 컨디션을 올려주는 상승작용(相乘作用)을 하는 건지 아무튼 그렇게 두어 시간 바둑을 두고 나면 머리가 가뿐했다. 그리고는 가끔 산우회사무실로 나가 훌라를 치고 소주를 한 잔 하고 오는데 양경석 회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꾼들이 모처럼 친구를 만나 장난으로 훌라를 치고 돈을 약간 잃더라도 저녁이랑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개중에 몇은 날마다 쳐야 되고 또 반드시 따야만 된다는 사람이 있어 어떤 때는 스트레스를 풀기보다는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 같아 자주 가지는 안았다.
그리고 가끔은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4, 50대 도우미들과 시시덕거렸다. 가장 모범적인 부부로써 가장 표준적인 가정을 이루면서 어느 듯 영순씨와는 한 집에 살기는 해도 한 방을 쓰는 일이 없는 사이, 젊은 날 그렇게 황홀한 떨림으로 다가오던 살 냄새도 시나브로 다 사라져 이제 한 수컷으로서 남아있는 마지막 흔적이나 습관처럼 만원짜리 지폐를 도우미의 가슴이나 치마폭에 넣어주고 돌아서도 여전히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겨우 탄력이 붙기 시작하는 소설과 여전히 그를 압박하는 언젠가 언양으로, 신불산 그늘로 돌아가려는 꿈은 가마득하기만 한데 어느 듯 청춘은 사라지고 황혼이 물드는 것만 같았다. 일모도원(日暮途遠), 아아, 해는 떨어지는 데 아직도 길은 멀고, 아아 마음은 여전한데 몸은 이미 늙어버리고...
그런 어느 날 친구 경제씨의 부친상을 당해 언양 서울산보람병원으로 문상을 가는 날이었다. 장례식장 계단을 내려가면서
“어이쿠!”
너무나 빼곡하게 늘어선 화환을 보다
(아아, 그렇지!)
경제씨의 5형제 중 맨 막내 열너덧 살이 떨어진 충제씨가 울주군의회 의원임을 떠올리고 시골일수록 내가 내다, 하고 서로 자신을 내세우는 허세가 더 심하다는 사실을 세삼 느끼며 장례식장에 들어가
“친구들 왔나?”
먼저 온 동창들과 인사를 하는데
“선배님 오셨어요?”
더러 안면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후배기수들이 차례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내 고향을 떠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날 기억하는 후배가 있다니, 이거 참, 그래서 고향에서는 전봇대 밑에서 함부로 오줌도 못 사는 구나!)
하는데
“아이구, 우리 시인님 오셨나?”
허령시의원도 찾아와 인사를 해
“형님 앉으시죠?”
좌석에 앉혀 술잔을 돌리는데 방금 신발을 벗고 올라오는 얼굴하나가 퍼뜩 눈에 들어와
“처, 철우야!”
열찬씨가 잔을 놓고 달려가자
“어, 어!”
깜짝 놀라 뒷걸음을 치던 철우가 황급히 같이 온 친구들에 휩싸여 빈소로 들어갔다. 자리로 돌아와
(벌써 나왔나? 요새는 뭐 해먹고 사는고? 그래도 양복을 입고 문상을 오는 것으로 봐서 밥을 굶는 것은 아니고...)
혼자 생각을 더듬다
(그래 산재에서 보험금이 나오니 밥은 굶지 않을 거고. 보자아, 그럼 군의원 충재씨하고 국민학교동창생이란 말인데...)
골똘해 생각에 잠기는데
“친구야, 니 그 사람 아나?”
“응, 집안 조카야.”
“아이구, 니 골치 좀 아프겠네?”
“니가 글마를 아나?‘
“내 뿐 아니고 아는 사람은 대충 다 안다. 친구 좋아 강남 간다고 친구 좋아 감방 가고 전 재산 날렸다고 말이야.”
“...”
(그래 집안의 종손이란 작자가 저리도 미욱하니 그 부처손이란 이름의 지리산에서 온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어렵게 장만한 문중 답이 날아가고 조상제사가 끊긴 거지. 아이구, 골치 아파...)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술잔을 털어 넣는데 방금 문상을 마치고 저 건너 식탁에 둘러앉는 철우를 보고 다가가서
“야야, 갈 때 내 좀 보고 가라. 내 절대로 니 안 뭐라 칼 테니까 꼭 보고 가라.”
돌아가신 동찬이형님을 닮아 넓고 구부정한 등을 툭툭 치며 귓가에 속삭이고 돌아와 자리에 앉아 다시 술잔을 더는 데 눈앞에 무엇이 휙 지나가는 순간
“야, 철우야. 철우야!”
황급히 일어나 출구로 향했지만 이미 그 등이 구부정한 사내는 흔적이 없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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