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88)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20장 평리부락 망향비(3)

이득수 승인 2024.09.05 10:28 의견 0

20. 평리부락 망향비(3)

“자, 시작합시다. <고향의 봄> 볼륨 좀 줄이고.”

열찬씨의 신호에 따라 유락씨가

“평리부락 실향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옥토 버든마을, 구시골마을이 고속철업무부지에 편입되어 울며불며 정든 고향을 떠난 지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옛사람들의 시에는 보통 세월이 지나 고향에 돌아오면 산천은 의구하되 인심이 변하였다고 하는데 우리의 고향 평리마을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몽땅 밀어버린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대대로 살아온 이 땅과, 이 땅에서 살아온 기억과 이웃 간의 인정과 논밭을 갈던 농심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망향제를 갖게 된 것입니다. 먼저 애국가제창이 있겠습니다.”

미리 열찬씨가 진행표에 별도의 개시멘트를 써 준 것을 읽는데 주로 축제나 이벤트의 진행을 맡던 사람이라 부드럽게 잘 넘어가기는 하나 엄숙한 맛은 좀 떨어졌다.

열찬씨의 눈짓에 따라 용해씨가 나와 두 손으로 4/4박자 반주를 시작하자 어떻게 시작은 되었는데 목소리가 작아 반주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겨우 끝이 나자

“지금 부터 오늘 참석하신 내빈을 소개하겠습니다.”

하고 망향제추진위원회 엄영관위원장, 허령 울산광역시의회 의원, 본 마을 평리출신으로 노야이불점과 노야농원을 운영하시는 향토사학자 겸 망향제 집행책임자 김영만님, 망향제비문을 써주신 출향시인 이열찬님, 본동 구시골출신으로 울산광역시산림조합장에 당선된 전주호조합장 순으로 소개가 끝난 뒤 엄영과위원장의 대회사가 시작되었다.

열찬씨에게 대회사를 써주려는 걸 마을의 철거과정을 지켜본 최후의 거주자로서 담담한 소감을 말하는 것이 낫겠다고 사양했는데

“안녕하십니까? 엄영관입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해주신 허령 시의원님과 주민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망향제비문을 써주신 본동 출신 이열찬 시인과 제를 맡아주신 노야 김영만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약소하지만 약간의 다과와 점심을 마련했으니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이야기도 나누는 의미 있는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

하고 간단히 끝내버렸다. 이어 전주호 산림조합장이 열찬씨가 미리 작성해준 경과보고를 읽고 이제 노야선생이 망향제를 진행하는데 망향비 정면에 떡과 과일, 생선, 돼지머리등의 제수를 진설하고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고는

“위원장님 이리 오시게.”

영관씨를 부복하게 하여 술을 올리고 시꺼먼 먹물글씨가 가득한 축문을 꺼내놓고

“유세차 계사년 8월 11일 평리부락망향제 추진위원장 영월인 엄영관은...”

읽어나가는데 다음 감소고우부터는 아무도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어 그냥 멍청히 듣고 있는데 다소 허스키한 목소리로 감정이 잘 잡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유장하게 이어지자 바라보는 참석자들이 눈을 껌벅거리고 둘러선 아줌마하나가 푸우 하품을 하는데 마침내

“상향!”

하면서 축문을 접고 영관씨에게 두 번 절을 시키더니

“다음 아헌관이 누구지?”

하다 영관씨가 지목하는 주호씨를 보며

“자, 산림조합장!”

주호씨를 꿇어앉히고 술을 올리고 절을 하게 했다. 이어

“우리 시인님도 한 잔 올리지.”

해서 열찬씨도 절을 하는데

“아이구, 우리 허의원님도!”

눈이 마주친 허령 의원까지 절을 하자 허령 의원이 호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돼지머리 앞에 놓는 것을 신호로 추진위원장과 열찬씨가 봉투를 꺼내자 산림조합장도 지갑을 꺼내들었다. 이어

“저도 술 한잔 올리지요.”

용해씨도 나서고 진행자 유락씨도 절을 했다.

“이제 더 볼 사람 없지요?”

위원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제상(祭床)앞에 부복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고 유락씨가

“다음은 망향제 비문을 낭독하겠습니다. 비문을 써주신 본 마을 이신 가열찬시인께서 직접 낭독하시겠습니다.”

해서 열찬씨가 단상 앞에 나와
“안녕하십니까? 아랫각단 명촌댁 둘째아들 이열찬입니다.”

하고 절을 하자 멀찍이서 바라보던 아주머니들이 뭐라고 수런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가끔 죽은 종찬씨에게서 평리출신 시인이 한 사람 있어 책도 많이 내고 가끔 신문에나 방송에 자주 나오고 또 계급도 시골군수쯤 된다고,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사촌동생이라고 술만 먹으면 이야기 하던 말을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대충 알고 있다고 했다. 그녀들은 그 시인이란 사람이 저렇게 머리가 허연 사람이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되어 신기한 모양이었다.

“여러분, 저 신불산 좀 쳐다보십시오. 세상에서 저렇게 높고 헌걸차며 넓고 넉넉한 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객지로 나간지가 40년이 훌쩍 넘었는데 명절이나 집안행사로 언양에 오면 옛날 어음상리 마흘에 있는 인터첸지에서 버스가 들어오면서 신불산이 보이면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었습니다. 왜 저 신불산만 바라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는지, 그래서 저는 객지에서 일이 힘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할 때 늘 저 당당하고도 넉넉한 신불산을 떠올리며 ‘내가 명색 신불산 아래서 난 사람인데 이만한 일로 좌절하지 않는다. 내 명색 신불산 밑에서 자란 사람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초심을 잃지 않는다.’고 다짐했고 아들딸 둘에게도 어떤 가훈이나 좌우명도 없이 ‘너거는 그냥 언양에 자주 따라다니고 신불산만 잘 쳐다보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두 아이들이 무난히 잘 자라 각자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눈만 뜨면 바라보던 저 신불산, 논에서도 보고 밭에서도 보고 소먹이다가도 보고 고기 잡다가도 보고 괴로워도 보고 즐거워도 보고 공동 모를 심다가도 보고 풍물을 치다가도 보고 술을 마시다가도 보던 저 신불산, 우리 버든사람들의 뿌리이자 의지이던 저 산 능선을 마을이 없어지고 이주를 하면서 이제는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뿌리가 뽑힌 부평초가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게 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떠난 지 40년이 넘은 제가 여전히 이 땅을 못 잊고 저 능선을 못 잊듯이 여러분 모두들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하며 저 능선이 눈에 선해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성실했던 사람, 순박하고 인정 있던 버든사람들의 농심을 버리지 말고 어디에서나 열심히 살고 가끔씩 열리는 망향제에 자주 참석해야 될 것입니다.

자, 비문을 읽어나가겠습니다.”
하고 호주머니에서 원고를 꺼내

이곳은 멀리 청동기(靑銅器)의 선대인들이 터를 잡은 <버든>이란 포근한 지명처럼 순하고 부지런한 이웃들이 대(代)를 이어 살아온 유서 깊은 땅이다.

읽어나가는데 자꾸만 목소리가 울멍울멍 퍼지자

“휴우-”

어디선가 한숨소리가 터졌다. 애써 진정시키며 읽어나가다

수구초심(首丘初心), 한갓 미물인 여우도 제 살던 곳으로 머리를 향한다는데, 우리 언젠가 다시 찾아오거나 꿈에 본다면 <웃각단>, <아랫각단>, <구시골>과 <진장만디>, <봉당골>의 눈에 선한 정경과 씨 뿌리고 소 먹이며 고기 잡던 <마구뜰>, <밤살매>, <복걸>과 <당수나무>, <용당수>가 어느 한 곳 살갑지 아니 하랴. 제 태어난 땅의 꽃향기와 바람소리 반갑지 아니하랴. 담 너머 다정한 목소리와 동사마당의 풍물소리가...

하는데 어디서 “후웁!”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눈가에 눈물이 번지는 것을 감지한 열찬씨가

“안되겠다. 여러분, 우리 잠깐씩 울고 다시 시작합시다.”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고 시선을 한 바퀴 돌리며

“예. 오늘 같은 날은 이렇게 좀 울어도 됩니다. 이제 속이 좀 후련하신가요? 다시 시작합니다.”

하고

우리 평리사람과 그 후손이 어느 땅에 가더라도 늘 번성하며 이 땅을 그리워하며 되돌아볼 애틋한 기원을 담아 여기 망향비를 세운다.

2013. 11. 30

평리부락 출향민(出鄕民)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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