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교장선생님의 욕심과 의심치매(4)
혼자 아침을 먹고 욕조에 더운 물을 받아 한참이나 땀을 흘리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와
“또 교장선생 전화가 와서 끊어버렸다. 얼라는 잘 노나?”
영순씨에게 전화를 거니
“이적지 칭얼대다 방금 잠들었다. 당신 아침은 묵었고?”
“응. 묵고 설거지도 했다. 당신은?”
“나도 대충 묵었지.”
“그래. 아까 당신을 너무 몰아붙여서 미안한데 마음에 두지 마. 앞으로 그럴 일이 잦을 것 같아.”
“아이구, 성질도 불같은 영감쟁이. 내가 좀 그런다고 그걸 그렇게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딨노? 당신은 그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정확히, 그러니까 남의 약점이나 의표를 너무 정확히 찔러서 탈이지.”
“...”
찬장 귀퉁이에서 컵라면 하나를 찾아 점심을 때운 열찬씨가 조금 일찍 산책길에 나섰다. 하수처리장을 지나 수영강변에 닿자 청남색 댕기가 눈부신 청둥오리수컷이 암컷 서너 마리와 새끼 서너 마리를 이끌고 V자 형 대열을 멋지게 이끌고 있었다. 그 옆에는 검은 색의 댕기에 갈색바탕의 죽지에 하얀 무니가 새겨진 날개를 가진 고방오리, 같은 물오리이면서 청둥오리에 비해 모든 것이 수수하고 기백도 없어 보이는 한 무리의 오리도 넓게 퍼져서 자맥질을 하고 광안대교 쪽 먼 하늘에서 새까만 점 하나가 빗살처럼 날아와 수직으로 수면으에 내려 꽂이는 것은 가마우지였다.
“야! 저 청둥오리의 댕기 좀 봐! 저렇게 아름답게 빛나는 빛다발, 사람의 얼을 빼는 색깔은 드물 거야.”
“그렇지. 갈라파고스 섬의 이구아나, 또 신라인이 화려한 왕관의 장식으로 썼다는 사슴벌레의 등껍질, 또 비취(翡翠)라는 보석과 비취새의 깃털도 모두 저 신비한 비취색이야.”
“그렇지. 그 비취새라는 것이 사실은 한국의 계곡에서 더러 발견되는 물총새라고 하더군. 그러고 보니 그 사다리꼴의 우스꽝스러운 동체를 가진 물총새의 깃털이 청남색이기는 하지.”
사진작가인지 조류학자인지 모를 두 중년의 사내가 펜스사이로 거치대를 세우고 한창 촬영에 열중하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야, 섰다!”
“그래. 물 닭이 섰네.”
하면서 사진기렌즈를 돌리는 것으로 보아 방금 엉덩이를 직각으로 곧추세우고 물속으로 내려 꽂이는 새까만 오리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지게 물 닭이라고? 하긴 몸통이 닭을 닮기는 했구면.”
평소 청둥오리사촌 검둥오리쯤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호기심천국 열찬씨가 이 신산한 날 좋은 상식하나 건졌다고 씨익 웃었다.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도시고속도로 옆길을 걸어 온천천과 수영강이 합류하는 교각아래 수많은 숭어떼가 도약하고 물오리와 가마우지에 덩치가 엄청 큰 재갈매기까지 거의 물새들의 천구이라 할 만 한 넓은 강폭의 여러 새와 숭어 떼를 일별하고 계속 걸어 마침내 원동교 위 네 칸짜리 꼬마 자동차가 지나가는 동해남부선 철교를 보고
“그래. 나는 열차만 보면 늘 가슴이 뛰지. 마치 디즈니랜드의 성문 앞에서 풍선을 든 아이처럼...”
입가에 웃음을 띠고 원동교 교각아래에 도착하니
“어이, 이 선생. 어서 오소.”
“아이구, 왕 선생님.”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아도 열찬씨보다 더 젊어 보이는 사내와 악수를 하고 이내 대국에 들어갔다.
“이 선생, 무슨 일 있소? 얼굴이 영 아닌데.”
“예에?”
“무슨 일인지 몰라도 마음 풀고 사소. 만 65세가 되면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지공도사가 되는데 그게 다 뜻이 있어요.”
“뜻이라니?”
“이 선생 같은 공무원 출신은 법에서 65 세로 정했으니까 그래서 노령수당이 나오니까 노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아니라니요?”
“그 때까지는 아직 생 속이란 말이지요. 만 60세까지 직장생활을 하며 한 조직의 장이나 선배로서 내가 내라고 내로라하고 살던 기백이랄까, 사실은 아무 실속도 없는 허세에 가까운 자존심이 남아서 말이지.”
“아, 그렇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는데요.”
“이 선생은 말투나 표정이나 눈빛이 만만하지 않고 절로 내공이 느껴지지만 젊어 현역생활을 너무 험하게 하고 아직도 그 영향을 못 벗어난 것을 느낄 때가 있어요.”
“예에? 어떻게?”
“우선 바둑이 너무 날카로워요. 처음부터 오로지 상대방을 공격하여 돌을 잡는 공격일변도에다 잡지 않아도 넉넉히 이길 텐데도 악착같이 잡으려들고 두세 판 이기면 좀 늦추려고도 하지만 다섯 판, 여섯 판 계속 이겨 상대방의 전의를 상실하게 한다든지.”
“아, 그렇군요.”
“나는 이기든 지든 상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선생과 대국을 피한다고 하더군요. 너무 공격적이라 하수입장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진땀을 빼야하니 내가 다 늙어서 마음 편히 한 나절을 보내면 될 걸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가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내가 많이 이겨 접바둑의 하수에게 몇 점을 더 놓게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해요? 수담이라는 그 말처럼 신선들이 한담을 하며 차를 마시듯 서로 편안하게 주고받으며 상대도 즐겁고 나도 즐거운 오후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굳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보다는 아예 스트레스를 발생시키지 않는.”
“예. 그렇겠네요.”
“이 선생은 엄청난 경쟁이나 갈등 속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수많은 적수가 있었거나 모진 핍박을 받고 이를 앙다물고 일어선 그런 백전노장의 기풍이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은 활도 칼도 창도 다 내려놓고 바람이 부는 데로 물결이 치는 데로 사는 것이 좋을 텐데 아직도 미련이랄까, 아니 증오 같은 것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혹시 심리상담사이신가요? 아니면 족집게철학관이라도?”
“아니요. 아주 평범한 소시민이지요. 별 갈등도 없고 큰 욕심도 없이 그저 마누라 마음 맞추며 하루하루 살다보니 어느 듯 나이는 일흔이 넘고 손주가 넷이나 되는데 신기한 건 내가 별 이룬 것은 없어도 다들 참 맘 편한 사람이라 하고 또 동안(童顔)이라 하지요.”
“그렇군요. 동안선생님. 제가 아는 몇 안 되는 왕(王)씨 중에서 가장 인상 깊고 영향력이 있는 왕씨, 반면교사의 좋은 선배로서 모시겠습니다.”
“그 보다 몇 안 되는 왕씨라니요? 이래봬도 중국에선 제일 대성이라고 들었는데?”
“예. <비단장사 왕서방>이라고 김정구씨의 노래에 제일 먼저 희화화된 것만 봐도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인에게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왕씨는 천하명필에 <난정기(蘭亭記)>란 천하명문을 남긴 일소(一笑) 왕희지(王羲之)에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정도지요.”
“그러고 보니 왕씨 성을 쓰는 나도 왕씨 성의 위인이나 유명 인사를 통 모르겠네.”
“굳이 따지자면 고려의 개국시조 왕건(王建)을 비롯한 34명의 왕이 모두 왕씨지만 세습 왕이 아닌 한 개인의 인품 또는 인간성이 느껴지는 왕은 4대 광종과 31대 공민왕정도이지요. 굳이 숫자를 불인다면 개국공신이면서 개국이후 반란을 일으킨 왕규(王規)나 왕식렴(王式廉)정도. 또 당나라 때 왕유(王維), 왕발(王勃), 왕창령(王昌齡), 왕한(王翰), 왕지환등의 시인들도 있지요. 또 왕가위라는 영화감독에 왕조현이라는 배우, 왕선재라는 축구선수, 왕숙련이란 여자농구선수 또 왕종근이란 아나운서 뭐 또 왕빛나라는 배우가 있었던가?”
“아이구, 왕가인 나보다도 타성인 이선생이 더 많이 아네. 내가 말하고자 한 이야긴즉슨 이렇게 우리 왕씨성을 쓰는 사람들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군요. 너무 강하고 독하고 철저하게 살지 말고 좀 부드럽고 너그럽게 살자고.”
“그렇지. 그런데 바둑이 이게 뭐야? 또 대마가 몰살이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왕 선생이 돌을 던졌다. 본래 두 점을 놓아야할 정도지만 흑을 들고 간간이 이기는 수도 있어 나이대접 겸 맞바둑을 두는데 세 번 연속 지면 한 점이 올라가는 룰 때문에 두 점, 석 점, 어떤 때는 넉 점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는데 열찬씨는 나름대로 두 점이 넘지 않도록 한두 판 슬쩍슬쩍 져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제가 꼭 이기려는 것은 아닌데 어째 돌을 놓다보면 대마를 공격하고 그러다 보면 강수나 독수를 찾아내고 이게 조절이 잘 안 돼요. 저도 평온하게 반면을 운영하며 간간이 거의 정석에 가까운 국지전을 벌이다 끝내기로 돌아가 한두 집 차이의 집 바둑을 두고 싶지만 일단 돌을 잡으면 그게 안 돼요.”
“그래서 아직 생 속이라니까요? 그래서 얼굴이 안 펴지지. 근 열 살이 많은 나보다도 늙어 보이고.”
“예. 요번엔 진짜 부드럽게 둘 게요. 왕선생님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두세요. 오늘 석 점으로 승진하지 않으시려면.”
“하는 수 없지. 실력이 달리고 힘이 달리고 투지가 달리는 데야.”
하고 또 한참이나 바둑에 열중하는데 이번에도 또 대마싸움이 벌어지고 어느 새 흑이 몰살지경에 몰리고 있었다.
“좀 살살 하라니까?”
“그게 의식적으로 잘 안 되네요. 그렇다고 일부러 실수할 수도 없고.”
“또 던져야 되나?”
“아니 잘 찾아보세요. 분명히 사는 수가 있어요. 백의 약점을 찾으면 도로 잡으며 사는 수도 보여요.”
하고 느긋이 허리를 젖히는데 따르릉 휴대폰이 울려
“여보세요?”
하는 순간 저쪽에서 푸우푸우 한참이나 숨을 고르는 것이 교장선생전화인 모양이었다.
“봐라. 이 국장! 내 인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날마다 이 늙은이의 거름을 훔쳐가는 것도 모자라 인자는 남의 밭을 통째로 삼킬라고 눈이 뻘개서 말이야.”
“예에? 무슨 말씀을?”
“당신 동서도 그렇지. 젊은 사람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고 인사도 없이 우째 그래 반질반질한지. 그라고 돌아서서 히쭉히쭉 웃고 땅세를 10만 원으로 올려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놈의 의심암귀가 치매가 되어 대낮부터 엄습한 모양이었다.
“교장선생님 지금 제가 바빠서요.”
“뭐, 바쁘다고? 종일 전화기 꺼놨다가 지금 겨우 받고 또 바쁘다면 언제 이야기를 해?”
“뭐 별 이야기가 있습니까? 봄 되면 밭에서 만나서 하면 되지요.”
“그새 우리 영감할마이 복장 터져 죽으면 내 밭을 다 차지할라꼬?”
“예에?”
하는 순간
“그래 우리 영감 잘 한다. 그 황 서방인가 나발인가는 당장 밭을 빼고 가국장도 땅세를 배로 올리고 우리 거름 여덟 포대 물리주고 우리 땅 안 빼앗는다고 각서도 쓰라 카고...”
옆에서 사모가 말하는 소리가 환하게 들려왔다.
“저, 끊습니다. 나중에 의논하지요.”
황급히 전화를 끊자 계속 울리와 아예 전원을 꺼버리고
“죄송합니다. 왕 선생님.”
고개를 숙이자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노인네 억지가 대판이네.”
“예. 제가 재미사마 농사짓는 구서동 물망골의 지주영감인데 교장선생까지 지낸 분이 늙어 치매가 와서 억지가 대판입니다. 거기에 심청궂은 사모까지 붙어서...”
“아, 재마사마 하는 일에 골치가 아프면 그만 두면 되지?”
“그게 어디 쉽나요? 파릇파릇 한창 자라나는 작물도 그렇고 거름이랑 장비도 그렇고.”
“그게 다 욕심이고 미련이지.”
“...”
“그리고 사모님이면 사모님이지 사모는 또 뭐요?”
“그놈의 할망구가 얼마나 심청궂고 고약하고 사람 괴롭히고 속 뒤집는 재주가 대단해서 그 동네 소작인들이 모두 님짜를 빼고 그렇게 부른답니다.”
“뭐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법이라며? 그렇게 고약하면 안 보면 되지.”
“...”
“여전히 생 속이네. 이 봐 기어이 또 대마를 잡았잖아?”
“...”
“대단해! 그 정신없이 욕을 하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얼마나 정확히 급소를 찔러 함몰시키는지?”
“아, 참 그랬구나? 손이 절로 갔구나.”
“알았어요. 이 번 판에 내가 이기면 되지.”
하고 다시 바둑을 두는데 머릿속에 교장선생의 이야기가 가득하니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거 와 이라노? 초장부터 너무 봐주는 거 아이가?”
“아닙니다. 자꾸 정신이 산만해져서.”
둘이 다 맥이 빠져 두는 둥, 마는 둥 흑이 이겨 한 점 올라가는 것만 피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왕 선생이 먼저 손을 탈탈 털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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