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90)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20장 평리부락 망향비(5)

이득수 승인 2024.09.11 11:04 의견 0

20. 평리부락 망향비(5)

망향비를 제막하고 돌아온 이튿날 통장님으로 부터 전화가 와서

“국장님, 오늘 밭에 안 올 거요?”

“예. 하루 쉬고 내일 쯤 갈라는데요.”

“엔간하며 오늘 올라와서 들깨 좀 베지요. 노랗게 익어 땅에 떨어질 염려도 있지만 한 번씩 참새 떼가 지나가면 한 되씩은 먹어치울 거요.”

“예. 알겠습니다.”

하고 허겁지겁 밭으로 올라가니 과연 한 길도 넘는 들깨 밭이 진초록에서 연두 빛으로, 연두 빛에서 노란 빛으로 익어 가는데 바람이 휙 불면 프리즘의 색깔이 변하듯 이파리하나하나 또 포기하나하나의 색깔이 어지럽게 물결치는 것이었다.

(그것 참, 들깨가 이렇게 아름다운 식물인줄 몰랐네. 반 고흐의 해바라기나 천경자의 보리밭의 빛깔도 이렇게 바람에 나부끼며 어지러운 물결과 반사로 화가의 눈을 사로잡고 영혼을 자극한 것일까?)

지난여름 들깨 꽃이 필 때, 농사꾼 자식이라 물론 열매를 맺는 만큼 들깨도 꽃은 피는 줄 알았지만 그 꽃송이가 너무 작아 여태 들깨 꽃이 어떤 색깔인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열찬씨가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아!”

절로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비록 좁쌀처럼 작은 꽃송이지만 넓은 밭 가득히 하얀 꽃이 만발하여 바람에 휩쓸리자 진한 향기가 진동을 하고 그 작은 꽃송이마다 벌떼들이 새까맣게 앉아 윙윙거리며 날개 짓을 하는 것이었다. 문득 중학교 땐가 배운 <이니스프리>라는 시가 떠올라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서 진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집을 지으리라
아홉 이랑 콩밭을 일구고 꿀벌 집을 지으리라
그리고 벌이 웅웅대는 숲에서 홀로 살리라.

골똘히 떠올려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아 그럼 이니스프리는 어느 나라일까, 얼핏 영국 같기도 한데 워드워즈의 <무지개>에서 우러나는 해가 지지 않은 대영제국의 기백과는 너무 동떨어진 전원적 분위기라 혹시 스코틀랜드인가 하다가 또 그 곳은 너무 추워 그런 전원의 향기가 묻어나지 않을 것 같고 단지 울울한 침엽수 속에서 우울하게 부엉이나 올빼미가 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다 또 문득

(순아, 들깨 꽃이 피었다. 작고 조밀하지만 거대한 물결로 덩이져 내 영혼을 깨우는 하얀 포말과 벌들의 합창, 우리의 유년과 그 어지러움의 빛깔로 아롱지는구나...)

엉뚱하게 순영씨의 생각으로 한 나절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 바로 인터넷을 검색해서

그리하여 거기서 평화롭게 살리라, 평화는 천천히 방울지듯 오므로
귀뚜라미 노래하는 곳에 아침의 베일로부터 떨어지는 평화
한밤엔 만물이 희미하게 빛나고 정오에는 보랏빛으로 빛나는 곳
그리고 저녁엔 방울새의 날개소리로 가득한 곳

마침내 토막 난 시의 나머지를 찾아 읽어보고 그 작가가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란 걸 읽으면서 지금껏 입속에서 뱅뱅 돌던 예, 예 하던 단어가 바로 예이츠란 걸 깨달은 적이 있었다.

같은 밭뙈기 안에서도 노랗게 익은 정도가 다 달라 우선 너무 익어 약간의 검은 빛이 비치는 들깨부터 한 2/3를 베고 이틀이 지나 나머지를 베었다. 하늘도 높고 바람도 선선해 금방 들깨가 말라 사흘 뒤 일요일 영순씨와 같이 들깨타작을 하러 올라가며

“야, 올해 들깨가 그야말로 깨가 쏟아지듯이 쏟아질 텐데 우째 다 묵겠노?”

“아이구, 걱정도 팔자다. 암만 많아도 그걸 못 먹고 남길까?”

“그래 우선 들기름이나 좀 짜지.”

“들기름 그건 들내가 나서 못 먹겠던데. 나는.”

“언양사람들은 참기름보다 들기름이 더 맛있다고 하던데 부산에도 시장골목서 김을 구워 파는 사람은 들기름에 굽고 말이야.”

“하긴 참기름보다 몸에 훨씬 좋다더구먼. 뭐 혈전을 녹여 나이든 남자들한테 특히 좋다고 교장선생님도 아침 공복에 한 숟갈씩 먹는다는구먼. 들깨만 많으면 당신도 먹지 뭐.”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옛날에 내가 늦가을에 논 고동을 잡아오면 그걸 고치미와 찹쌀가루에 들깨가루를 넣고 논 고동찜을 해주시던데. 가루도 좀 빼지.”

“그러지 뭐. 들기름은 아마 가루를 빼는 것이 아니고 기피 앗는다고 껍질만 벗기면 자동으로 가루 비슷하게 되는데 그걸 국에도 넣고 여기저기 활용하지.”

“그렇구나. 기왕이면 한 두어 말 털어서 기름도 한 말쯤 짜고 기피도 좀 앗고 하지 뭐.”

“안 깐 병아리 센다고 꿈도 야무지시네.”

“무슨 소리? 나중에 이 많은 들깨를 우째 다 묵을꼬 걱정하지 마.”

“무슨 소리? 우리가 아들딸에 울산 대름에 우리 동생들에 식구가 몇인데? 거기다 구포엄마가 알면 엄마라고 한 병, 깨가 너무 좋아서 한 병 또 기피 앗은 거 한 봉지 하면서 아무리 많아도 남아나지 않을 걸. 또 그 우에...”

“그 우에 라니?”

“우리 신평 사돈 알아도 있는 기 한정이고.”

느긋한 기분으로 올라와

“당신 여게 도풍쪼가리 있는 거 못 봤나?”

“도풍쪼가리라니?”

“와, 갑바쪼가리보다 훨씬 두꺼운 거. 그 기 아마 6.25때 미군들 천막쪼가리지.”

“갑바는 천막지(紙)를 말하는 것 같은데 도풍은 듣다가 첨이네.”

하더니

“이 거제?”

냄새난다고 닭똥거름을 덮어둔 두꺼운 천막조각을 찾아내었다. 위에 밭으로 올라가 둘이 들깨를 거꾸로 들고 막대기로 두드리는데

“이상하다. 좔좔좔 깨 흐르는 소리가 나야되는데 기척이 없네.”

원두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이호열씨가 잔을 놓고 내려와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망했다. 잎만 무성하고 씨는 없다!”

하자

“진짜 그러네.”

하고 무언가 한참이나 생각하던 통장님이

“이 국장이 너무 거름을 많이 줘서 웃자란 건가봐. 내 어디서 듣기로 들깨나 콩, 고구마 따위는 영양분이 충분하면 부잣집 막둥이처럼 게을러빠져서 열매 맺을 생각을 안 한다던데. 날씨도 나쁘고 거름기도 부족해야 이러다가 열매도 못 맺는가싶어 바짝 서둘러 알뜰하게 열매를 맺는다는 구먼. 그래서 콩이나 들깨는 잎이 무성하면 꽃이 피기 직전 성장점을 자라주어 키가 더 크지 못하게 하면 잘린 자리마다 마치 비상사태가 발효된 것처럼 작은 새순이 여러 게 돋아나 그 새순마다 옹차게 열매가 연다더군.”

“그렇구나. 그게 뭐 과연불급인가 뭐지.”

“과연불급은 아니고 그 비슷한데?”

윤병균씨도 끼어드는데

“맞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뜻인데 제가 바로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맥이 빠져 막대기를 던지는데

“우리가 뭐 들깨농사로 먹고 사나? 올라와서 막걸리나 한 잔 합시다.”

해서 열찬씨는 같이 원두막으로 가고 영순씨는 오각정으로 가서 자신들이 사온 막걸리와 총각김치가 든 봉지를 들고 올라와 막 한 순배를 돌리는데 전화가 오더니

“아버지, 둘째 낳았습니다. 순산입니다.”

“그래. 축하한다. 며느리에게 고생했다고 전해라!”

하고 영순씨와 눈을 맞추는데

“아들인가, 딸인가는 왜 말 안 하는데?”

이호열씨가 나서는데

“요새 그걸 미리 모르는 사람이 어딨노?”

끼어드는 최여사를 보며

“딸인 걸 미리 알고 있다 아입니까?”

영순씨가 답하는데

“또 딸이라 딸만 둘인가베. 우리 이국장님 얼굴표정을 보니.”

역시 여자의 직감은 정확했다.

“예. 딸만 둘이지요. 이 양반이 암만 아들, 아들 아들타령을 해도 그게 맘대로 안 되네요.”

하는 순간

“내가 딸 둘이면 말을 안 하지. 아들도 딸 둘, 딸도 딸 둘이라 아들놈하고 사위놈은 모두 딸딸이아빠고 나는 딸딸딸딸 다 떨어진 슬리퍼 딸딸이 할아버지지요.”

하는 순간 이호열씨가

“하하하, 딸딸딸딸 할아버지가 또 하나 나왔네. 가국장 나랑 딸딸딸딸할아버지 계나 합시다.
하고 호쾌하게 웃었다.

“와? 당신 많이 섭섭소?”

“섭섭기는? 모르던 일도 아니고.”

“그래도 얼굴에 섭섭다고 써있는데?”

“내가 섭섭하다고 하면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마음이 조금 섭섭한 걸 감출 수는 없구먼. 그렇지만 새로운 생명, 또 하나의 손녀에게 축복을 해야지. 아들딸의 선택이 제 부모나 할아버지의 마음도 아니고 태어나는 자신의 선택도 아니고 오로지 삼신할미의 소관인데 저는 저대로 그냥 소중하고 존엄한 거지.”

“그라면 얼굴이나 좀 펴소.”

“그래야지. 아아 이름도 지어야하고.”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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