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뜻밖의 귀촌(4)
연산동에서 노포동 터미널까지 10km, 노포동에서 시외버스로 언양까지 40km, 언양에서 명촌까지 다시 8km, 그것도 고속버스를 제외한 부산시의 49번이나 울산시의 323번은 구비구비 돌아가니 아무리 빨라도 세 시간은 족히 걸리니 한갓 채전을 좀 부쳐보려고 다니기에는 너무나도 먼 길이었다. 주공 앞에서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자말자
(부산시소방본부, 태광아파트, 한양아파트, 연산8지구대, 경상대후문, 연천시장...)
눈을 감았다 떴다 차장 밖을 바라보며 몇 정거장을 훑어보던 눈의 아래 위 눈까풀이 그만 딱 붙어버려 아침부터 꿈속을 헤매다
“이번에 내릴 정류소는 남산초등학교입니다. 다음 내릴 곳은 신동아아파트입니다.”
안내방송에 깨어나 휴대폰의 시계를 보니 무려 50분이나 잠을 잔 셈이었다. 다시 눈을 감고
(남산고등학교 입구, 남산동 새벽시장, 남산동 농협, 범어사 입구...)
이제 두 정거장 남았다고 생각하다 또 잠이 들었는지
“할아버지, 종점입니다. 내리셔야죠?”
웬 젊은이 하나가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에 배낭을 둘러매고 내려서 터미널건물을 한참이나 걸어 버스표를 끊고 20분 간격의 버스시간에 맞추어 500원짜리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와 버스에 올라 다시 눈을 감고
(작장마을, 외송, 사송, 다방, 북정동, 양산터미널, 소토, 석계, 용연...)
차창 밖으로 스쳐갈 마을을 꼽아보다 또 슬며시 잠이 들어 내원사입구 소토마을을 지나며
... 참 많이도 졸았다. 사내가 가족을 먹여 살린다고 출퇴근을 하는 한 40년, 그 젊음을 지나 노년에 이르는 길이란 결국 출퇴근의 버스나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방금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터덜거리며 다음 목적지를 걸어가는 길, 낙타가 사막을 건너듯 최선을 다 하되 그냥 묵묵히 걸어가는 여정일 뿐이었다. 연산동망미주공에서 대한색소3거리를 지나 지하철로 환승하는 연산로터리까지 12역을 발 디딜 틈도 없는 빼곡한 사람 틈에 시달리다 내려서 한참동안을 걸어 지하철을 타고 환승역서면에서 많은 승객이 내리면서 비로소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늘 손에서 떼지 않는 문고판이나 소설책과 함께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 불과 한 5,6분 사이에 읽는 한 20페이지의 이야기가 얼마나 머리에 속속 각인되는지 옆에서 같은 사무실의 동료가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독서삼매에 빠지다 서면역에서 자리에 앉으면 범내골에서 범일동까지 두 정거장까지도 못 가서 책을 무릎에 떨어뜨리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이 드는 열찬씨를 보며 사람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잠이 드나 싶은데 한 10분쯤 지나 부산역이나 중앙동역쯤에서 귀신처럼 다시 잠이 깨어 또 한 5분간 책을 읽은 열찬씨를 보며 직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짧은 토막토막까지 책을 읽으니 사무관이 되고 서기관이 되는 거라고, 그래서 시인이 되고 구청안의 모든 기념사와 축사를 쓰거나 교정을 해주는 가 보다고...
작장고개를 넘어 경남 양산시로 접어들면서 차창가로 외송마을이 스쳐 지날 때였다. 10여 년 전 순영씨가 이제 장사에 지쳐 전원생활을 하려고 외송마을에 집을 지어 이사했다는 이야기를 성수자시인을 통해 듣고 금정산 계명봉이나 장군봉을 등산할 때마다 그녀가 사는 집이 어디쯤일까 내려다보다 한 번은 계명봉과 장군봉사이, 범어사와 외송마을로 넘어가는 4거리에서 외송마을을 따라 길을 잡고 새로 지은 듯한 건물의 울타리나 담장너머를 기웃거렸지만 순영씨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는데 정작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고 그 옆에 남편이 서 있으면 더욱 난처할 것만 같아 옆모습은 흘낏 보이되 눈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지만 마을을 다 내려와 35번 국도에서 12번 버스를 탈 때까지 그녀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고 한 해쯤 지나 수자씨와 같이 자갈치로 열찬씨를 찾아온 순영씨가 열찬씨를 보고
“남들은 전원생활을 한다고 부러워했지만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였다. 커피를 한잔 나누기는커녕 단순한 수인사로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동네에서 마음이 잘 통하지 않는 중년의 부부가 24시간을 함께 하고 잠자리에 들어 눈을 뜨면 다시 24시간을 함께하는 갑갑한 시간, 남자들이 군에 가서 방독면을 쓰면 이만큼이나 갑갑할까 생각하면서 밥을 짓고 흥미도 없는 고스톱을 한참 치다 다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뉴스나 연속극도 아닌 남편이 좋아하는 바둑프로를 보다 잠이 들어 눈을 뜨면 또 그 재미없는 남편이 지켜보고 있는 감옥 아닌 감옥에서 말이지...”
생각만 해도 기가 찬 듯 한숨을 몰아쉬고
“부산에 살면 시장에 간다고 나가서 잠깐 외손녀라도 보고 올 수가 있고 학원 일에 바쁜 딸네의 부엌일을 돕는다고 한두 시간 떨어져 지낼 수가 있었는데 자기는 그 갑갑한 시골생활이 체질에 맞는다며 시내의 딸네 집에 갈 생각도 않고, 그래서 말이지.”
휴대폰에서 사진폴더를 열고
“어느 날 우리 장독간 옆 산딸기나무에 작은 새가 둥지를 지었는데 어느 새 알을 세 개나 낳고 품어 새끼가 부화하자 어미애비 두 부부가 얼마나 부지런히 먹이를 잡아다 먹이는지 또 재재거리며 자라나는 새끼 세 마리가 보풀보풀한 털을 벗고 날개가 자라고 걸음을 떼는 것이 얼마나 귀여운지 한 해봄을 그 딱새라는 작은 새를 바라보면서 지냈지. 그러다 그 작은 새들이 다 자라 날개 짓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대견했는데, 참 기가 막히는 것은 며칠 뒤 다섯 마리의 새가 둥지를 비우고 몽땅 떠나버린 것이야. 그러자 다시 남편이 내 눈에 들어오며 한없는 권태감이 밀려오는데 말이야.”
스무 장도 넘는 사진을 단계별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참, 그렇구나. 순영씨 본지도 오래 되었네. 명촌에 땅을 산 줄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자기 친정 화천에서 고개하나만 넘으면 닿는 마을, 길천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간이나 지나가던 등말리고개에서 열찬씨가 새로 지은 빨간 지붕을 바라보면 또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사이에 버스가 덜컹 하는 것이 고속도로를 벗어나 통도사 진입로를 벗어나는 것 같아 눈을 뜨니 영축산 사자봉에서 취서산과 신불산에 이르는 높다란 능선이 나타났다. 통도사정류소에서 승객을 내린 버스가 다시 35번 국도에 접어들자
(방기부락 하방마을, 상천, 신안, 신복, 작하, 마산, 벌짱, 회나무정, 진장...)
삼남면사무소를 다니던 시절 어떤 날은 평리이장 황성권씨와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한창 고속도로 공사가 진척중인 십리가 넘은 길을 <유정 천리>를 흥얼거리며 걷고 어떤 날은 허령선배와 이장들을 만나 추곡수매를 독려하러 다니고 또 어떤 날은 출장 중인 옥자씨를 길에서 만나 사외이갓 솔밭 속에 들어가 밤색 바바리코트를 벗겨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던 일을 떠올리며 얼굴이 후끈해지기도 했다. 이내 벗었던 운동화도 바로 신고 배낭을 챙겨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시계를 보니 323번 버스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그러나 조금만 머뭇대다가 버스시간을 놓치면 무려 한 시간 50분을 더 기다려야하니 30분쯤 빨리 온 것은 아까울 것도 없었다. 시내버스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아 클래식을 듣는데 누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아저씨, 323번 간월 가는 버스 갔능교?”
물어서 쳐다보니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80도 넘은 할머니였다.
“아직 한 20분도 더 시간이 남았심더. 나중에 내캉 같이 타면 됩니다.”
하고 다시 이어폰을 꼽고 비제의 <칼멘서곡>의 경쾌하면서도 신명이 나는 합창부분에 몰입하는데
“아저씨도 화천 사능교?”
또 옆구리를 질러
“예. 명촌에요.”
할 수 없이 이어폰을 빼고 눈을 맞추자
“낯신 사람이네. 촌사람 같지도 않고.”
“예. 정년퇴직하고 명촌에 땅을 쪼깨사서 들어올 기라고...”
“그런가? 원래 명촌사람인가?”
“아임더. 삼남면 평리사람인데 마을이 없어져서 누님이 사는 명촌으로 왔지요.”
“명촌 어데?”
“등말리요?”
“아, 사개이 우에 등말리?”
“예. 일식이라고, 제가 일식이 외삼촌입니더.”
“그렇구나!”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라지 뭐.”
하고 비로소 다시 음악을 듣는데
“명촌서는 뭐 할라꼬?”
“예. 재미사마 채전도 좀 부치고 책도 보고.”
“선빈가베. 암만 봐도 농사꾼 눈길이 아이다.”
“예에.”
그러고 다시 음악을 듣는데
“아이고, 아지매 장에 왔능교?”
“야, 아지매는 오늘 뭐 사러 왔능교?”
“뭐 심심하기도 하고 <솔고>에 가서 찜질도 좀 하고.”
“나는 솔고 보다 <대건의료기>가 더 친절하고 좋던데. 어떤 때는 점심도 주고.”
“그것도 자주는 못 가지. 가끔 뭐 하나 큰 것 사주지도 못 하면.”
“그렇지만 우리 같은 할마시들한테 엄마엄마 하면서 놀아줄 사람이 어데 또 있겠노?”
거기까지는 무심히 듣는데
“아, 이 양반이 부산서 명촌으로 살러온다네.”
문득 열찬씨를 화제로 끌고 가는데
“그런가? 낯신 사람이네.”
“명촌서 뭐 할랑고?”
“뭐 채전도 붙이고 책도 읽고.”
“뭐, 선비 아이면 한량인가베.
하고 둘이 새삼 흘낏흘낏 쳐다보다가
“아저씨, 저 차가 반곡 가는 차 맞능교?”
같이 이야기하던 할머니가 물어
“예. 다개, 반곡, 활천, 인보방향이네요.”
하자
“잘 가이소.”
하고 차에 올랐다. 두 노파가 친한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323번이 도착해 노파와 함께 차에 올라 명촌까지 한 30분 시달릴 것이 뭣해서 일부러 한참 떨어진 자리에서 눈을 감고
(송대성당, 삼성아파트, 대진아파트, 능산마을, 자동차면허시험장, 향산마을, 경의고등학교, 상북면사무소, 궁평, 양등마을입구, 찬물샘이...)
구비구비 돌아갈 버스정류소를 속으로 꿰는데 축협 앞에서 탄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 노파가 뭐라고 둘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동차면허시험장을 지날 때쯤
“아, 이 양반이 부산서 명촌으로 살러온다네.”
문득 열찬씨를 화제로 끌고 가는데
“그런가? 낯신 사람이네.”
“명촌서 뭐 할랑고?”
“뭐 채전도 붙이고 책도 읽고.”
“뭐, 선비 아이면 한량인가베.
기가 막히게도 아까와 똑 같은 대화가 반복되는 것이었다. 자기의 의식 맨 밑바닥에 자리한 유년시절에 형성된 첫 기억 소낙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후의 어두침침한 뒷밭에 빨갛게 돋아나던 찰남생이의 섬뜩한 기억, 또 어디선가 꼬끼오 울어대던 낮닭의 울음소리 같은 왠지 불안한 느낌이 엄습하는데
“아지매 잘 가소이.”
뒤에 탄 노파가 양등입구에서 내리고 또 한참이 지나
“아저씨 잘 가소이.”
눈을 감은 열찬씨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노파가 씩 웃으면서 내리는데 명촌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간창마을이었다.
“...?”
같은 명촌에 사는 줄 알고 자신이 일식이외삼촌이란 이야기까지 했고 마치 홍식이는 물론 누님 금찬씨까지 잘 아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뒤통수에 한방을 맞은 듯한 느낌의 열찬씨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등말리 정류소에서 내려 논길을 한참이나 걸어가는데
“야야, 오나?”
저쪽 밭에서 호미질을 하던 금찬씨가 반색을 했다.
“누님은 뭐 하능교?”
“야야, 정구지 비고 재거름 준다 아이가? 그라고 일식이가 바빠서 로타리를 안 쳐줘서 내가 호미로 콕콕 찌르고 상추씨 좀 흩었다.”
호미를 든 채 길로 나온 금찬씨를 보며
“그렇제? 나도 상추씨 하고 쑥갓씨 사왔다.”
“그래? 어데 숭굴라꼬?”
“작년에 들깨 심었던 자리에 쪼깨만 심지.”
“그래 같이 가보자.”
하고 현장에 도착해 열찬씨가 삽으로 들깨 밭을 파자
“그래도 나매라고 여자가 호미로 쫒는 거 하고는 다르네.”
하고 호미로 이리저리 골을 타더니
“보자. 씨 사온 거 이리 도고.”
하고 금방 씨를 뿌리고 손으로 덮었다.
“아이구, 배 고파라. 목도 마르고.”
시장기를 느낀 열찬씨가 시계를 보니 열한 시 반이었다. 일곱 시에 아침을 먹고 이적지 차에 시달렸으니 배가 고프기도 할 시간이었다. 배낭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며
“누부도 이리 오소.”
하고 빵 하나를 건네주고 자기도 하나를 먹기 시작하는데
“동생 니가 와도 내가 정지출입한 지가 십 년도 넘어 아무 것도 해믹이지도 못 하고...”
중얼거리는 지라
“며느리도 직장 댕긴다면서 그래서 점심이나 챙기 묵나?”
“뭐, 우리 천집사가 밥은 해놓고 가는데 밥맛도 없고 입맛도 없어 묵다가 말다가...”
“거기 아이지. 밥맛이 없으면 입맛으로 묵고 입맛이 없으면 밥맛으로 묵고.”
“나는 입맛도 없지만 맛 없는 음석은 절대로 못 묵는다.”
“저런? 사람이 우째 지 맛있는 거만 묵고 사노?”
“동생 니 겉으면 맛없는 음식이 넘어가겠나?”
하면서 아예 정색을 하는지라
“아이구 누님이 음식이 까다롭네. 하기는 우리 어릴 때 누님 넷 중에서 제일 솜씨가 짭질었지. 개상어껍데기도 잘 벗기고 곱돌상어도 짚으로 잘 튀하고.”
하며 한 통 뿐인 우유를 꺼내다
“이건 누님이 잡수소.”
건네주자
“아이다. 동생 니 묵어라. 내가 와서 공연히 니 점심만 뺏어묵는 구나.”
“아임더. 나는 물하고 간빵하고 묵지.”
배낭에서 건빵을 꺼내 우적우적 씹으니 비로소 우유를 받아들었다.
“참, 허가는 언제 난다 카더노?”
“예. 내가 조으기는 조으는데 그놈의 설계산가 건축산가가 얼매나 농띠인지...”
“그래. 원래 허가가 잘 나기 힘들 건데 동생 니가 와서 우짜면 허가가 날 기라고 또식이, 일식이는 물론 땅임자들이 모두 목을 빼고 기다린단다.”
“아니, 허가사 허가조건만 되면 당연히 나는 거지.”
“그거는 동생 니처럼 아는 사람, 높은 사람 생각이고 우리 같은 무식쟁이는 설계사나 공무원을 이길 수가 있나?”
“응?”
“요새 또식이 일이 어중간해서 어서 외삼촌 허가가 나서 일꾼 안 놀릴 생각밖에 없단다.”
(이런? 벌써 당연히 제가 이을 뗄 것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긴 외삼촌 공사니 당연히 자기가 할 것으로 생각하겠지...)
“조금만 기다리라 카소. 금방 허가가 나겠지.”
“그래 말이다. 노랑머리 호동이하고 조선족 영감하고 하루 일당만 해도 수월찮게 나가니까 말이지.”
하고 한숨을 쉬더니
“바람도 쌀쌀한데 우리 집에 가서 한숨 자고 가거라.”
“아임더. 나는 저게 감나무 밑에 공기 존 데서 좀 쉬었다가 잠이 오면 자고 갈 게요.”
“그래. 한기(寒氣) 들라. 조심해라이.”
하면서 금찬씨가 한 손에는 호미를, 한 손에는 우유를 들고 내려갔다. 감나무 밑에서 내려다보니 면사무소에서 등억리 간월로 가는 지방도 옆의 가로수 벚나무에서 희끗하게 꽃봉오리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대밭이 오목하게 둘러싼 포근한 사개이마을과 그 앞의 고래들 뒤로 능산마을과 화장산이 앞을 막아 그 중간으로 태화강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도 바로 위에 옛날 시집간 누님이 보고 싶어 15리 길을 달려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소나무 뒤에 숨어서 바라보던 그 이불 이씨 산소의 커다란 소나무 도래솔 밑의 논을 정지하고 누가 뭉글뭉글 모양도 예쁜 소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 한층 경관을 부드럽게 조성했다. 얼마 전에 놀러온 미혜처형이
“가서방, 저 소나무가 정말 백만 불짜리다. 사람이 운이 좋으니 공짜로 저런 경치가 다 생긴다 아이가? 여게 땅 고르고 집만 지으면 땅값은 절로 올라갈 기요.”
하던 일을 생각하며 흐뭇해진 열찬씨가 한 참이나 졸다 마침내 잠이 들었는지
“외삼촌, 여 뭐하능교? 추운데 잠자면 한기듭니데이.”
생질 박장로가 깨워
“그래 니가 우짠 일고?”
“동생 일 좀 봐주고 있는데 현장에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대나무나 좀 빌라꼬요.”
“그래?”
“장영희씨가 말하던데 삼촌이 너무 깐깐해서 모두들 식겁을 한답니다.”
“내가 뭘?”
“설계사를 통시에 앉아 개 부르듯이 불렀다면서요?”
“아니지. 그건 그 사람이 일을 게을리 해서.”
“그래도 설계사를 조지는 사람은 평생에 처음이었답니다.”
“그러게 지가 퍼뜩퍼뜩 일을 하지.”
“외삼촌, 그기 아이라 자격증 가진 사람들은 일을 퍼뜩퍼뜩 안 하고 질질 끌어 유세를 하면 돈을 더 뜯는 기 자기들 하는 일 아잉교? 변호사든 설계사든 사자가 붙으면 법에도 없는 도동놈이라 누가 말도 못 하고 당한다 아잉교?”
“무슨 소리? 이 사람아 인자 세상이 변했다 아이가?”
“아입니더. 설계사를 살살 달개야 일이 될 거 같답니다.”
“저런? 몹쓸 사람들!”
하고 혀를 끌끌 차는데
“삼촌 그 보다 더 큰일은 밑에 도자기 집에서 건축허가를 못 내주도록 군에 전화를 하고 난리라 카던데요.”
“와? 외진 마을에 이웃이 오면 좋을 텐데.”
“자기네 혼가 것 같은 고요한 골짜기에 사람들이 들어와 정신이 없다고요.”
“그래. 우째 그 사람들 인상이 좀... 부부가 다 얼굴을 안 펴고 사람을 쳐다보고 인사도 안 하고 나이 많은 사람이 인사를 해도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말이야. 특히 그 뚱뚱한 아지매는 눈길이 보통이 아니야.”
“명촌동네 하리마오아입니까? 아무도 말릴 수가 없어요.”
“자기 남편도?”
“남편은 사람이 좋아 그런지 도통 말이 없데요.”
“그래도 자주 만나면 차자 좋아지겠지.”
“외삼촌 그기 아이라 건축허가를 반대하는 것은 물론 만약에 허가가 나면 길을 막는답니다.”
“길은 와?”
“지금 포장도로에 자기 사유지가 좀 들어갔답니다.”
“아무리 사유지라도 그래 못 하는데?”
“아입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랍니다. 허가가 나서 공사만 시작되면 바로 담을 친다고 저한테 말하던데요.”
“그기 어데 마음대로 되나?”
하고 배낭을 챙겨 일어나니 좀 전까지 꿈속 같던 골짜기가 갑자기 고질민원에 시달리는 아수라장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수고해라. 나는 버스시간이 돼서 간다.”
사광리버스정류소에 도착하니 웬 빼빼한 영감이 유심히 자신을 쳐다보는지라
“혹시 이마을 사개이에 사시는가요?”
“예.”
“아, 그렇습니까? 저는 이 마을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들어오려는 사람입니다.”
“그런가요? 거기 허가나기가 어려울 텐데요.”
“아니, 허가조건만 되면 되지 굳이 안 될 것이 있나요?”
“거기는 옛날부터 농로만 있어 자동차가 다닐 수가 없을 텐데요?”
“예. 농로가 바로 국유지라 아무나 다닐 수 있고 또 제가 산 땅은 옛날 집터라 안 날 이유가 없지요.”
“아, 도산댁 땅을 샀구나. 그래도 힘들 건데요.”
“택지개발자가 토목설계를 하고 6미터짜리 사도절정도 다 마쳤고 하니.”
“하여간 능력이 되면 해 보시든지요.”
어쩐지 반갑지 않은 말투였다.
“이 동네는 뭔가 이상하네요. 제 누님도 살고 또 제 어머니가 여기 출신 명촌댁이라 저는 아주 친밀하게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어쩐지 만사가 서먹하고 정을 잘 안 주는 것 같아요.”
“허허, 촌마실에 낯신 사람 들어오는 것이 어데 쉬운 일인 건가요? 여기 살다가 나간 사람이 돌아와도 탈이 많은데.”
“그래서 옛날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다 사라졌군요.”
“뭐, 마을마다 다 사정이 있고 시빗거리가 있고...”
말끝을 흐리더니
“참, 그렇다면 이금찬씨, 그러니까 박수진씨 아들 일식이가 생질이라고요.”
“예.”
“영판 모르는 사람은 아닌데 아무튼 집짓기는 힘들 겁니다.”
하고 버스를 탔는데 그 깡마른 모습이 편안하지가 않아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